68화
"폭주를 끝낸 예지는 어땠나요?"
"혼절했네. 보름이 지나 깨어났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어. 의각에 누워 치료받는 나를 보며 매일 울면서 병시중을 들었지."
"다른 제자들은요?"
"예지의 화기에 대해선 본 파에서도 원래 일급 기밀로 다루던 사안이었다네. 장문인과 우리 장로들만 알고 있었지. 그런데 그 일로 인해 본산 제자들 모두 알게 되었어. 그래도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서 본산 밖으로 이 일이 번지지는 않았다네."
그녀가 장난기가 슬쩍 묻은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도 누가 믿겠는가? 호호. 열다섯 살 소녀가 아미파 전체를 상대로 홀로 싸웠다는 이야기를 말이야, 호호호."
"그렇긴 하네요. 되레 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허풍쟁이라 손가락질당하겠어요."
"우리 아미는 규율이 엄격해. 여자들로만 구성된 문파라 더 그럴 수밖에 없지. 제자들도 잘 따라 줘, 지금까진 예지의 비밀을 잘 지킬 수 있었다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는 이유가 더 크겠지만 말이야, 호호."
"아미파 내에서는 문제가 없나요? 예를 들어 따돌림을 당한다든가요."
"당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삼대 제자는 한 명도 현장에 오지 못하게 막았네. 이대 제자 중에서도 고수 급 이하는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해서, 일부만이 싸움을 치르고 목격했지. 다 어른이라네. 그냥 어른 말고 수양이 깊은 스님들일 말일세."
"아……."
"과하게 조심하는 이들도 간혹 있고, 또 가끔 예지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기도 하지만 우리 예지 잘 알지 않은가? 그 낙천적인 성격. 붙임성도 좋고. 애교도 많고, 호호호. 잘 지내고 있다네. 특히 삼대 제자 녀석들은 연배가 비슷하다고, 가끔 예지가 이대 제자인 걸 망각하고 친구처럼 지내려 하는 아이들도 있다네, 호호."
"임하령과 그때 예지의 폭주를 겪었던 이들은요?"
"그 아이들이 가장 큰 문제지. 그때 입은 정신적 충격이 워낙 컸던 모양이야. 이번에 남궁세가로 임무를 주어 보낸 일 말일세."
"네."
"예지가 지난 오 년 동안 정말 잘해 주었다네. 화기를 잘 다스리고 억제하여, 이제는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예지의 눈에서 그 기운을 감지하는 것도 쉽지 않아. 그래서 그랬네. 예지도 이제 성인 아니겠는가? 평생 아미파에서만 살 수도 없고. 마 도사 자네같이 멋진 남자도 만나야 할 나이고."
"제…… 제가…… 좀, 하하하. 감사합니다, 윤화 사니님, 하하하하!"
그녀가 또 활짝 웃었다.
"간단한 임무였지. 그리고 그때는 임하령도 겉으로 보기에는 예지에 대한 충격을 모두 씻은 듯했어. 임하령이 남궁세가 임무를 이미 여러 번 수행한 경험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과거의 상처를 씻고, 서로 잘 지내보라는 뜻으로 함께 보낸 건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네."
"임하령 소저가 여전히 예지를 두려워하고 있군요?"
"자네만 알고 있게."
"네."
"나중에 실토하더군. 너무 무서워 도망갔다고. 예지에게 거짓말을 해 홀로 남겨 두고,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제갈세가로 도망을 쳤다고 하더군. 예지가 아직도 많이 무서운가 봐. 휴우, 임하령도 우리 아미의 미래를 짊어질 뛰어난 인재인데. 이 사안은 장로회에서도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는 부분이라네."
"큰 역경을 이겨 내면, 그보다 더 큰 성과를 얻을 것입니다. 이 역시 아미의 커다란 복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윤화 사니가 살짝 감동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내 말이 좀 멋있었나 보다.
"그런데 사니님. 예지는 전혀 모르나요? 당시의 일을요?"
"내가 다 말해 주었네. 그래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측간 청소도 시작한 것이고. 또 더 열심히 화기를 다스리는 수양을 쌓고 있다네. 아, 맞다!"
"네?"
"봉화 사매 말일세."
"아! 무당파에서 예지를 데리고 갔던 오장로님요?"
"그래. 봉화 사매가 그때 예지 데리고 온 후 이곳에 와서 나에게 뭐라고 푸념했는 줄 아는가?"
"뭐라고 했는데요? 그때 이런 사정도 모르고 저희가 너무 무례하게 군 것 같아,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호호호, 그리 생각해 주니 다행이네. 글쎄 당시는 봉화도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 딱 봐도 훗날 무림의 주역이 될 기재가 하나도 아닌 넷이나 되는데, 속사정은 말할 수 없고, 또 그냥 이렇게 데려가려고 하니 자네들에게 아미파의 안 좋은 인상만 남기는 것 같고 해서 말일세."
"아…… 충분히 그러셨을 수도 있었겠어요. 저희가 그때는 워낙 안 좋게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을 해서요."
"그러니 말일세. 봉화가 그러더군. 그날의 일 때문에, 훗날 자네들이 무림의 중심이 되었을 때, 우리 아미파 제자들을 핍박하고 괄시하면 어쩌냐며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호호."
"설마 그럴 리가요."
"호호호, 아무튼 그때 봉화 사매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나에게 그리 말했다네."
이제야 이해가 된다.
무당파에서 봉화 사니가 왜 복강문 문도들을 이끌고 왔는지.
아마 턱없는 전력인 것을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임시변통으로 하남에 있던 복강문에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또 무당파 태청전에서 왜 그렇게 금예지를 경계하고, 심지어 검까지 뺏은 후 혼절시켰는지도 이해되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납득은 되는데,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나와 윤화 사니는 나란히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을 이어 갔다.
"윤화 사니님, 제 눈 한번 보시겠어요?"
대략 한 식경이 지나 내가 몸을 틀어 윤화 사니에게로 향한 후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갸우뚱한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눈? 갑자기 눈은 왜 그러시는가?"
"제 눈에서도 혹시 뭐가 보이는지 봐주세요."
"알겠네."
"진지하게요. 부탁드립니다."
내 덧붙인 말 때문이었을까?
윤화 사니가 미소까지 지운 후 정말 오랜 시간 진지한 얼굴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일 각이 흘렀을 때였다.
내 얼굴을 살포시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떨려 왔다.
곧, 놀라 내 얼굴에서 손을 떼어 버리는 윤화 사니.
처음으로 놀람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하지만 이는 잠시였을 뿐.
그녀가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아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마 도사. 실태를 보였네."
"아닙니다. 누구라도 제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면, 같은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천하의 작은 사부마저 내 광기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니, 윤화 사니의 반응은 그나마 굉장히 절제된 것이리라.
"무슨…… 기운인지 물어도 되겠나?"
"광기입니다."
"아…… 나무아미타불."
"얼마나 보셨습니까?"
"정확히 보지는 못했네. 다만…….
"……."
"예지의 눈에서 본 화기에 절대 덜하지 않은 어마어마한 기운을 느꼈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이 광기로 천하를 피로 물들이는 경험을 해 보았으니까요."
"……."
광천마제를 말한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녀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어떠한 것에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보다 윤화 사니는 다른 것에 더 집중하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 기운을 다스릴 수 있었는가? 우리 아미파에서 예지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 정말 오래된 고대 경전까지 찾아가며 엄청난 심력을 쏟았네. 하지만 자네가 자네의 기운을 억제하고 다스리는 것에 비한다면, 너무 부족한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네. 도대체…… 어찌 그리할 수 있었는가?"
내가 바라던 질문을 그녀가 해 주었다.
이 질문을 듣기 위해 내 눈과 내 눈 속의 광기를 보여 준 것이다.
"현화문의 이십삼 대 문주, 제 사부님. 유 현 자를 쓰십니다."
"아! 자네…… 자네가 그랬지. 현화문의 도사라 했었지. 내 어찌 그 중요한 사실을…….
크게 놀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리곤 역시 빠르게 놀란 마음을 정리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 사부님께서 자네의 광기를 다스릴 수 있게 도와준 것이군. 맞나?"
"네. 맞습니다. 저 말고 저와 비슷한 상황의 다른 분의 광기도 완벽에 가깝게 봉인해 주셨습니다. 비단 봉인만 한 게 아니라, 광기로 인해 얻은 힘은 살리고, 오로지 신(神)과 혼(魂)이 마(魔)에 잠식당하지 않게 광의 기운만 봉인하고 다스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녀가 이제는 입까지 쩍 하고 벌려 놀란 얼굴을 했다.
"그, 그게…… 그게 가능한가?"
난 대꾸 대신 내 양팔을 쫙 펼쳐 보였다.
지금 내 상태를 보라는 뜻이었다.
다시금 윤화 사니가 경악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눈이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간절함과 절박함, 또 희망에 의한 그런 눈물이 순식간에 고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 도사…… 마 도사…… 흑흑."
이제는 흐느끼기까지 하는 윤화 사니.
"염치 불고하고…… 흑흑. 자네 사부님께…… 흑흑. 우리 예지를…… 부탁드릴 수 있겠는가? 내 그렇게만 해 준다면, 자네에게 큰절이라도 매일 하겠네. 아니, 내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자네에게 주겠네, 마 도사…… 흑흑흑."
제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는 윤화 사니.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내 눈시울까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
"제가 하려던 말이었습니다. 저와 제 친우들, 모두 예지를 좋아합니다. 친우고, 동료며, 전우입니다. 예지가 꼭 자신의 화기를 다스릴 수 있길, 저 또한 윤화 사니님 만큼이나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고맙네, 흑흑흑. 고마워, 마 도사. 흑흑흑."
* * *
다음 날.
절강 항주로 전서구를 보냈다.
바로 전날, 나와 윤화 사니가 나누었던 대화를 복강전에서 장문인과 장로들이 밤샘 회의 끝 결론을 맺었다.
나 역시 회의에 참석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아미파의 장문인과 장로들 모두 내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난 그냥 우리 첫사랑 예지가 좋아서 그녀가 잘되게 하려고 한 일인데, 또 뜻밖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무당에 이어 아미파에까지 큰 빚 하나를 지게 한 것이다.
뭐, 우리 첫사랑의 사문에 빚 좀 지게 했다고, 내가 뭘 할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미산 깊은 곳의 가파른 절벽 위.
나와 윤화 사니 그리고 장문인과 다른 장로들이 동쪽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가는 여덟 마리의 전서구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서신은 혹시 중도에 맹수에 잡히거나 하는 등의 사고를 대비해 여러 마리를 보낸다.
어쨌든.
"그나저나 놀랐네요. 아미파에서 위화궁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장문인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본 파의 정보력이 제법이라네. 더군다나 다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와 달리, 우리 아미파는 하오문과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네."
"기녀들 때문인가요?"
"그렇지. 아닌 경우도 있겠으나, 대부분 곤궁에 처한 여인들 아니겠는가? 수백 년 전부터 본 산의 제자들이 그런 기녀들을 도왔던 일은 셀 수도 없이 많다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아무리 정사지간이라는 하오문이라 해도, 본 파에만큼은 매우 협조적으로 일을 도와준다네."
"하오문 덕분에 위화궁의 존재도 알게 된 것이고요?"
"비슷하네. 몇 번 절강으로 임무를 수행하러 갔던 본 산의 제자들이 위화궁의 여고수들과 접촉해 작전을 수행했다는 기록도, 본 파의 사서에 적지 않게 기록되어 전해진다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마 도사."
이번엔 일장로가 나에게 물었다.
어젯밤 내가 몇 번이고 간절히 부탁해 이들 모두 나에게 편히 말하고 있다.
할머니들에게 존대받는 게 영 달갑지만은 않지 않겠는가?
"네, 일장로님."
"자네 사부님께서…… 우리 예지를 받아 주실까?"
일장로의 질문으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에 갑작스러운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들 모두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내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만약 사부님께서 예지를 보았다면, 스스로 나서서 도우려 하셨을 것입니다."
"아……."
내 말에 이들 모두가 거의 동시에 얕은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오장로, 무당파에서 만났던 봉화 사니가 내게 물었다.
"마 도사의 사부님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물어도 되겠나?"
"글쎄요. 우리 사부님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또 집중.
침 넘기는 소리마저 죽여 가며, 내 입에 집중하는 아미파의 수뇌부들이다.
그런 그녀들에게 나는 멋들어진 미소와 함께 우리 사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잘생겼어요.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아……."
이번 탄성은 조금 전보다 더 깊고 길게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