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66화 (66/245)

66화

"약초요?"

"네. 저 이따가 약초 캐러 가니까, 기다리지 마시고 점심 맛있게 드시라고요."

아미파 닷새째.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다.

조바심 때문에 미쳐 죽는 줄 알았다.

천무휘는 바쁘고, 한해북도 바쁘고, 의제는…… 이제 자기가 멋있다고 착각한다.

돌겠다.

아무튼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곧 떠나야 할 시간이다.

아니, 벌써 떠났어야 하는데, 내가 그냥 눌러앉은 거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했나?

엄청난 복이며 기회다.

약초라니!

"갑자기 약초는 왜?"

"아, 우리 아미파의 의각에서 쓸 약재를 외부에서 사오기도 하지만 우리 제자들이 주기적으로 직접 캐기도 해요. 호랑이 때문에 잠시 중단됐었는데, 곽 오라버니가 해결해 주었잖아요. 그래서 오늘 다 같이 아미산 곳곳을 돌며 약초 캐러 가기로 했어요. 아마 오백 명도 넘는 제자들이 갈 거예요."

"그거, 그거 좋은 약초 캐면 무슨 상도 주고 그래?"

"그렇진 않아요. 사문을 위한 일인데요. 그래도 좋은 약초 캐면 칭찬은 많이 받아요. 그동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칭찬받는 사저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저도 오늘 꼭 좋은 약초 캐서 칭찬받을 거예요, 헤헤."

"나…… 나도 같이 가도 돼?"

"오라버니가요? 오라버니 의술에도 능통하세요?"

"어? 그…… 그건 뭐 좀 하고, 하하하. 약초는 잘 몰라도 영초는 내가 좀 알거든."

"영초요? 무슨 산삼, 하오수 같은 그런 거요?"

"응. 그냥 산삼 말고. 천년산삼, 천년하오수 이런 거. 난 천년 밑으로는 영초로 취급 안 하거든."

"와아아아아."

금예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놀라도 엄청나게 놀란 눈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무한한 존경과 애정이 담겼다.

그래!

할 수 있다!

나, 현화문의 제자야!

현화승천신공을 익힌 현화문의 제자 마악치라고!

‘우리 현화문의 선조님들!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발, 제발 산삼 한 뿌리만 제 기감에 잡히게 해 주세요. 제자 체면 좀 살려 달라고요!’

내겐 현화승천신공이 있다.

그 어떤 무공보다도 자연 친화적 무공이다.

우리 사부만 봐도 알지 않은가?

또 있다.

내 내공.

이 갑자 넘는다.

아미산 전체로 기감을 퍼뜨릴 테다.

또 있다!

나, 내 신체.

현경의 신체다.

오늘 아미산에서 만년산삼 한 뿌리 캔다.

* * *

"오라버니, 수고했어요. 너무 기죽지 마세요."

눈물이 났다.

진짜 땅을 치며 마구 울부짖고 싶었다.

빌어먹을 현화승천신공.

내다 버릴 이 갑자 내공.

현경의 고수?

퉤!

도라지 한 뿌리 캤다.

그것도 예지가 내가 안타까웠는지 슬쩍 눈치를 주고 헛기침을 몇 번 해서 간신히 발견했다.

아!

난 여전히 절정의 고수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지독한 현실을 깨치고 말았다.

예지에게 쪽팔려 죽겠다.

오늘도 내 가슴엔 매서운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 * *

"의제, 혼자 여기서 뭐 해?"

"그런 형님은 왜 혼자 이 야심한 밤에 뒷마당으로 나와요?"

"나? 나는 뭐, 그냥 잠이 안 와서 달구경이라도 하려고."

"저도요."

어제도 똑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제도 그랬고.

그끄저께도 그랬고.

계속 그랬다.

뒷마당에 나란히 앉은 나와 의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 각.

이 각.

삼 각.

반 시진이 지나서야 내가 말을 꺼냈다.

"울어?"

"아니요. 그런 형님 울어요?"

"아닌데?"

또 반 시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 형은……."

"말하지 마세요, 형님."

다시 반 시진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뻔하다, 천무휘.

아미파 여승들에 둘러싸여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어제 분명 한해북도 이곳에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

그리고 그때.

"어? 마 형, 곽 형, 오늘도 달구경 하시네요?"

천무휘다.

여승들과 희희낙락, 할 거 다 하고 온 모양이다.

녀석, 볼수록 재수 없어진다.

"자, 나도 그럼 같이 달구경이나 할까요?"

녀석,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오늘도 또 우리 곁에 앉았다.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데.

한 대 칠까?

참자.

"천 형."

"네, 마 형."

"한 형은 못 봤어요? 저녁부터 안 보이던데."

"아! 한 형이요? 오다가 봤어요. 연정지 있잖아요? 거기 예쁜 연못이오. 거기에서 아미파 제자들에게 무도(舞蹈, 춤)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요. 왜, 저번에 마 형 하고 천 형이 꼭 선녀같이 예쁘다고 말했던 그 이대 제자분이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아니 된다고!

"그분하고 나란히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어? 마 형! 곽 형! 어디들 가세요?"

나와 의제는 미친 듯 달렸다.

그렇게 연정지에 도착해 은형술을 극대로 펼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보았다.

젠장!

빌어먹을!

한해북과 그녀.

나란히 앉았다.

대화를 나누는 그들 사이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또, 슬쩍슬쩍 어깨가 맞닿는다.

난 울었다.

진짜 눈물을 마구 흘리며 울었다.

이건 배신이라고!

천무휘야 그렇다 쳐도, 한해북 너까지!

-형…… 형님.

떨리는 의제의 전음.

녀석을 봤다.

녀석도 운다.

오늘따라 참 많이 못생겼다.

-형님, 오늘따라 왜 이리 못생겼어요? 엉엉.

-너도. 엉엉.

아! 갑자기 광천마제가 되고 싶다.

광천마제가 되어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싶다.

그것도 간절히.

* * *

어제의 충격이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가시지 않는다.

진짜 천무휘까지는 내가 인정하겠다.

그런데 한해북은 왜?

아!

진짜 돌겠다.

의제는 아침 댓바람부터 밖으로 나갔다.

아미파 대연무장이다.

호랑이를 잡겠다는 녀석의 생각은 멋졌다.

사흘 동안 잠 한숨 안 자고 산을 몇 개나 넘어 호랑이를 뒤쫓아 혈투 끝에 잡았다고 했다.

그 노력 역시 가상하다.

하지만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첫날, 모두를 놀라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도 의제에게 천무휘를 대하듯 해 주지 않았다.

그때 포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녀석, 어제 충격을 나보다 더 크게 받았나 보다.

계책을 바꾼 모양이다.

대연무장에 가서 비무를 하겠다고 했다.

칼을 부딪히다 보면 살을 부대끼는 것처럼 정이 쌓인다나 뭐라나.

‘의제야! 의제야! 아직 모르겠니? 문제는 그게 아니란 걸 말이다. 얼굴! 얼굴이라고! 너나 나나. 그게 제일 큰 문제야.’

에휴, 차마 한껏 들뜬 의제에게 목까지 차오른 이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쿠당탕.

내가 윤화 사니와 예지의 거처 앞마당에서 우울함에 잠겨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뒷마당에서 뭔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서둘러 뒷마당으로 향했다.

윤화 사니가 커다란 솥을 들고 움직이다가 이를 떨어뜨린 모양이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좀 많이 나은 줄 알았는데, 솥을 들 정도의 힘까지 손목에 들어가지 않네요."

"솥은 왜요?"

"우리 예지 친구분들이 왔는데, 사부가 되어 따뜻한 약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해 주지 못해…… 이거 부끄럽네요."

"밥이야 사감당(謝感堂, 아미파의 제자 공동 식당)에서 먹으면 되는데요. 맛있어요."

"그래도……."

그녀가 미안함과 멋쩍음, 대략 그런 느낌의 미소를 지었다.

나와 그녀는 떨어진 솥과 그 안에 담겼다 쏟아진 곡식들을 함께 정리했다.

그녀의 아픈 손목에 깊게 덴 화상 자국이 있었다.

이미 목에 난 화상 자국은 첫날 보았다.

며칠 함께 지내며 추측한 건데, 윤화 사니의 병이란 게 그냥 질병이 아닌 큰 사고를 당해 얻은 것이라 생각 들었다.

예를 들어 엄청난 양강계열(陽剛系列)의 고수와 혈투를 치렀다든지 말이다.

아마 그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하면 될 것 같아요. 내가 밥은 못 해 줘도, 차는 우릴 수 있느니, 그거라도 함께 마셔요, 마 도사."

"네, 윤화 사니님."

우린 앞마당에 나란히 앉았다.

현화문 앞마당에서 십간산을 보는 것만큼, 이곳의 경치도 아름다웠다.

"아미산을 오른 게 우리 예지를 데리러 온 건가요?"

"윤화 사니님, 이미 몇 번이나 부탁드렸지만, 제발 말 좀 편히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불편해서 그래요."

윤화 사니가 미소 지었다.

내가 재밌다는 미소였다.

"웃지만 마시고, 제발요. 일부러 저희 불편하게 해서 쫓아내시려는 거 아니면, 진짜 좀 편하게 대해 주세요."

"알았네, 알았어. 호호호."

정말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웃은 후 조금 전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우리 예지 데리러 온 건가?"

"그게…….

"괜찮네. 예지는 속가제자라 혼인도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다네. 아, 현화문 도사님들도 혼인이 가능한가?"

"네. 가능해요. 역대 조사님들 중에 혼인하고 자녀까지 낳으신 조사님이 몇 분 계세요."

"오, 그렇군. 좋네, 호호."

뭐지?

이 분위기.

지금…… 천무휘랑 한해북, 의제까지 다 헛짓거리 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이 시대의 혼사란 당연히 부모나 사부가 결정하는 거.

아무리 무림이란 곳이 개방적이라 해도, 엄연히 전통과 예법이 존재하는 곳이지.

암!

그렇고말고.

큭큭큭.

그런데 그때, 차를 마시던 윤화 사니의 손목을 또 보고 말았다.

정확히는 손목에 난 화상.

"궁금한가?"

"네?"

"이 상처 말일세."

"아, 조금…… 말하기 그러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가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의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고심하는 미소 같기도 했다.

그렇게 잠시 후.

"예지가 그런 것이라네."

"예지가요? 뜨거운 솥이라도 실수로 엎었…… 아, 그건 말이 안 되죠?"

윤화 사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꽤 긴 시간 침묵을 잇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 듣겠나?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어쩌면 우리 예지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뭐지?

지금 나를 시험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예지에게 우리가 모르는 무슨 사연 같은 게 있나?

궁금했다.

너무 궁금했다.

"예지를 싫어할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듣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미소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윤화 사니.

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윗감 시험이라면, 당당히 맞서리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 이런 생각할 분위기 아니군.

진중하게 집중해야 할 분위기였다.

"만약 자네가 이 이야기를 다 듣고서도 예지와 함께 떠나고 싶다면, 내가 자네들 대신 장문인 사저께 허락을 받아 주겠네. 약속하네."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보는 윤화 사니였다.

"저희 사부님께서 그러셨거든요. 인연이 있으면 꼭 다시 만나게 된다고."

그녀가 고개를 절로 끄덕이며 답했다.

"멋진 사부님이시군."

맞는 말이다.

"이야기, 들려주실래요?"

윤화 사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회상에 잠긴 모습을 잠시 보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우리들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예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아홉 살 어린 것이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매일 아미산을 올랐다네. 그것도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수레를 끌고 말이야."

"인분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때 스님께서 예지를 긍휼이 여겨 제자로 받아 주었다고요."

"어린 것이 불쌍하기도 했지만, 자네도 분명 보았을 텐데? 예지의 극도로 선한 마음과 천재적 무재를 말이야."

"두말하면 입이 아프죠. 살다 살다 그렇게 착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또 수룡검이 있어서 그렇지만, 제가 봤던 이들 중 수룡검 다음으로 천재적 무재를 갖춘 인재가 바로 예지였습니다."

"그렇지. 천 대협이 있었지. 내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첫날 천 대협을 보고 전설 속에나 나오는 천황성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며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네."

"그 정도예요?"

"천황성은 아니겠으나, 그에 버금가는 무재를 타고난 건 맞네. 곧 천하는 새로운 화경의 고수를 보게 될 테야."

아! 이 자식, 개부럽다.

알고 있었지만, 또 부럽다.

"스님, 그 녀석…… 아니, 천 형 이야기는 그만하죠. 지금은 예지에 관해 듣고 싶어요."

"호호, 그러세. 우리 예지도…… 음…… 천 대협에 비해 부족하지 않는 무재를 갖고 있지."

난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지가 천재적 무재를 갖고 있음은 나도 안다.

하지만 천무휘에 비할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제 자식이 예뻐 보인다는 뭐 그런 건가?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네, 자네."

"그게…… 실은 예지의 무재가 대단한 건 이미 알지만, 그 정도까지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예지가 익힌 검법과 심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미 무공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합니다."

"포옥검(抱玉劍)일세. 삼대 제자들이나 배우는 검법이지. 또 심법은 소청기공(小淸氣功)을 익혔네. 역시나 삼대 제자들이 익히고 있는 아미의 기본 심법 중 하나라네. 아무리 속가제자라도 이대 제자 중 이를 계속 수련하고 있는 이는 아미산 전체에 예지밖에 없다네."

"아…… 그렇군요."

"예지가 검법 수련하는 걸 본 적 있나?"

"네. 일을 모두 마친 밤에 한 식경(30분) 정도 윤화 스님께서 직접 봐주시잖아요. 내공 운용을 금기하는 기간이라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네. 예지는 어려서부터 딱 하루 한 식경씩만 무공 수련을 했다네."

충격이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천무휘는 무공에 미친 녀석이다.

온종일 수련만 한다.

아니, 녀석은 잘 때도 수련하는 꿈을 꿀 테다.

하루 한 식경만 수련해 스무 살의 나이로 절정의 경지에 오른다는 건 천황성이 아니라 천황성 할아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금예지의 무재는 천무휘를 뛰어넘는다는 소리다.

아니!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재라는 소리다.

아미파는 그런 금예지를 왜 숨기기 급급한 것일까?

왜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는 것일까?

진짜 모를 일이고, 답답한 일이다.

그리고 곧.

나는 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예지는 극강의 화기(火氣)를 품고 태어났다네. 극화지체(極火之體)가 바로 예지의 신체를 일컫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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