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무슨 짓이오!"
순간 의제가 대도를 꺼내 들며 봉화 사니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천무휘와 한해북이 간발의 차이로 그를 잡아 제지했다.
내가 한 걸음 나섰다.
말 대신 눈빛으로 해명을 요구했다.
나도 화났다.
우리들의 첫사랑.
나의 첫사랑.
그녀를 갑작스레 공격해 혼절시킨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면, 아미고 뭐고 전쟁이다.
내 기세를 읽었을까?
금예지의 두 사저가 봉화 사니 앞으로 나서 검을 반이나 출검하였다.
여차하면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력이었다.
그걸 또 봉화 사니가 말리고.
이를 모두 지켜보고 있던 무당의 장문인도 나섰다.
"마 도사, 기세를 거두시게."
난 시선을 장문인에게로 옮겼다.
요 며칠 나와 많이 친해졌다지만, 이 일은 그가 나선다고 해서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쏘았다.
"휴우, 우선 진정하시게. 봉화 사니께선…… 모두 금 소저를 위해 그러한 것이라네."
충분한 답이 아니다.
나와 우리를 납득시키기엔 한없이 부족한 답변이다.
난 다시 시선을 봉화 사니에게 옮겼다.
나에게 반쯤 칼을 뽑았던 금예지의 사저는, 어느새 혼절한 금예지를 챙기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사문의 기밀이기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운인 장문인께서 말씀하셨듯, 이 모든 일은 예지를 위함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마 대협."
내 눈을 직시하며 그리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믿어야 하나?
좀 더 강하게 나아가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어디로…… 금 소저를 어디로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사문으로 돌아가야죠. 안전하게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요?"
"윤화 사저께서…… 예지의 사부님이십니다. 윤화 사저가 예지를 돌보고 가르칠 것입니다."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녀의 눈빛이 그리 말했다.
내가 막을 수 있는 명분 따위는 없다.
하지만 왜 이리도 불안하고 슬픈 것일까?
"오해가 조금 있었습니다."
천무휘다.
내가 갈등하고 있는 사이, 그가 나섰다.
아미파의 오장로라는 신분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천무휘를 향해 살짝이지만 목인사까지 하며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됐음을 표했다.
"금 소저는 일부러 무리에서 이탈한 것이 아닙니다. 아미파 임하령 소저가 개인적인 명령을 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무당파 순양자 대협의 비동을 파헤치는 수상한 무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고요."
"네, 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무당에서 본 파에 이를 상세히 전해주었고, 본 파 장문인께서 하남에 잠시 머물고 있는 저에게 다시 전달해 주었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이곳으로 달려오긴 했으나, 내막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 소저는 왜……?"
"임하령은 이미 본 파로 돌아가 합당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예지는 그 어떤 벌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상을 주면 주었지, 무당을 돕고 무림의 정의를 세운 본 파의 제자에게 어찌 벌을 내리겠습니까? 다만, 제가 방금 예지에게 손을 쓴 건, 아까도 말했듯 사문의 기밀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결국 천무휘도 한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사문의 기밀이라는 데 뭘 어쩌겠는가?
우리와 금예지가 친하다지만, 아미파 입장에서 우린 엄연히 외인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가 쭈뼛쭈뼛 망설이기만 하자, 다시 봉화 사니가 나섰다.
"본 파 장문인의 서신을 통해, 또 오늘 이곳에 방문하여 운인 장문인과 무당의 장로님들께 여러분께서 한 일에 대해 상세히 들었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 그 훌륭하고 대단한 일에 우리 예지가 함께했다는 것에, 저는 물론 본 파는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얼굴에 힘겨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예지가…… 예지가 잘만 해 준다면, 곧 여러분과 재회하게 될 것입니다. 전 예지를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믿어 주세요."
또 뜻 모를 말이다.
우리야 당연히 믿지.
당신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고.
물론, 이젠 그런 생각도 명분도 다 잃어버렸지만.
봉화 사니는 떠났다.
혼절한 금예지를 마차에 태우고, 아미의 이대 제자 두 명과 복강문의 문도 오십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그렇게 무당산을 내려갔다.
아니다.
내가 본 건, 호위가 아니었다.
경계였다.
마치, 죄수가 탈출하지 못하게 철저히 경계하고 감시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무슨 일인지…… 장문인께선 들으셨습니까?"
"아니, 나도 듣지 못했네. 아미의 내부 기밀이라는데, 나라고 무슨 방법으로 이를 묻겠나? 다만 봉화 사니 말일세."
"네."
"내 그녀를 어렸을 때부터 봐 왔다네. 금 소저보다 훨씬 어렸을 나이부터 말이야. 그런데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야. 누가 나에게 이 땅의 참 스님이 누군지 묻는다면, 난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가장 먼저 언급할 걸세. 그러니, 마 도사."
"……."
"너무 염려 마시게. 그녀는 정말 금 소저를 돕기 위해 저러는 것일 테니 말이야."
운인 장문인의 말로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는 것만으로 나와 우리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는데, 떠나는 모습마저 저렇다 보니 그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이튿날 우리도 무당산을 떠났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침울한 얼굴이었다.
* * *
"휴우."
"하아."
"의제, 그만해. 천 형도 그만하고."
"휴우우."
"하아아."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
성질 같아선 진짜 의제고 천무휘고, 그냥 마구 두들겨 패 주고 싶었다.
그깟 한숨 좀 쉰다고 두들겨 팰 것까지 있냐고?
내가 너무한다고?
아흐레 동안 온종일 저 소리 들어 봐라.
사람이 미치지 않고 배기는지.
진짜 잘 때 빼고는 마치 장단이라도 맞추듯 둘이서 저렇게 돌아가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한해북?
그래도 나이가 가장 많고 의젓한 한해북은 정상이지 않냐고?
제일 심하다.
원래 말수가 없던 녀석이, 아흐레 동안 딱 한마디 했다.
사흘 전, 정말 내가 이러다 미칠 것 같아 한해북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
"한 형! 한 형이라도 말 좀 해요!"
그랬더니.
"네."
이 한마디.
와!
그러고 다시 사흘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
진짜 이러다 내가 미칠 것 같다.
결국, 터벅터벅 가던 말의 고삐를 쥐어 멈추었다.
그러자 무언가 내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지, 녀석들 셋이 동시에 말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그러고는 아주 초롱초롱, 별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 게 아니겠는가?
"가. 가자고."
"어, 어디로요, 형님?"
입이 벌써 귀에 걸린 의제가 물었다.
아니, 세 녀석 다 입이 귀에 걸려버렸다.
"아미파! 지금 아미파 가자고 이 지랄들 하고 있는 거 아냐!"
"정말 가요? 아미파? 우리 금 소저 보러 가는 거예요, 형님?"
"가자니까! 젠장 할."
"야호!"
"와아아! 우리 마 형 최고!"
천무휘와 한해북까지 함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조금 전까지 다 죽어 가던 얼굴을 했던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아미파로 가자는 말 한마디에, 어디서 대환단을 숨겨 두었다 처먹었는지 아주 기운들이 팔팔 넘친다.
심지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말 나온 김에 바로 출발하시죠. 요 앞에서 서쪽으로 우회전하면 사천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아까 객잔에서 상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한해북, 이 미친놈.
아흐레 동안 했던 말의 일흔네 배나 많은 말을 단숨에 쏟아 냈다.
에휴, 내가 졌다.
이건 애초에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사내놈들에게 첫사랑이란 아마도 다 그런 것 같다.
"아미파에 들렀다가 날짜 맞추어 몽고 사막까지 가려면 시간이 촉박하니까, 미친 듯 달려. 다들 알았지? 똥오줌도 말 위에서 싸라고!"
"넵!"
그렇게 우리는 말머리를 돌려 사천 아미파로 향했다.
* * *
사천 아미산.
아미산 중턱, 아미파 본산으로 진입하는 입구에 열 명가량의 젊고 어린 비구니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살짝 긴장한 얼굴이 되는 그녀들이었다.
이런 곳엔 보통 연배가 있는 사람이 한두 명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때마침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가 온 모양이었다.
"어디서 오신……. 앗, 나무아미타불. 어디서 오신 누구신가요?"
이십 대 중반의 비구니다.
아무래도 우리 중에 천무휘가 가장 유명해서 녀석을 앞장세웠더니, 얼굴까지 불그레하며 말까지 더듬는다.
아! 맞다.
무당산을 내려온 후 객잔 같은 곳에서 우리에 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이곳 아미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열 명가량의 젊고 어린 비구니들이 천무휘의 얼굴만 슬쩍슬쩍 훔쳐보며 얼굴만 발그레할 뿐이었다.
무당을 떠난 후 처음으로 우리 신분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딱히 사문이 없습니다. 이름은 천무휘라고 합니다."
"허걱!"
툭.
고작 이름을 밝혔을 뿐이다.
그런데 천하의 아미파 제자라는 자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뒤의 끄트머리에 있던 아직 열댓 살이나 먹었을까 가장 어려 보이는 제자였다.
나머지도 자리에 주저앉지만 않았을 뿐, 거의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그레했던 얼굴은, 아주 그냥 새빨갛게 타올랐다.
또 뭐라 뭐라 천무휘를 향해 말을 하는데, 이게 중원의 언어인지 새외 이민족의 언어인지 영 알아듣기 힘들었다.
아!
천무휘라는 얼굴이, 그 이름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또 한 번 지독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곽우적이라고 합니다, 하하."
"한해북입니다."
미친놈들.
여승들의 반응에 천무휘가 부러웠나보다.
두 녀석이 묻지도 않았는데, 서로 앞다투어 자신을 소개한다.
너네 금예지 보러 온 거 아냐?
하여간 내가 쟤들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다.
"현화문의 마악치라고 합니다.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현화검존의 그 현화문이 맞습니다, 하하하."
* * *
"꺄아아악!"
"수룡검이다!"
"천 대협!"
아미파 본산으로 올라가는 길.
그새 소문이 퍼졌나 보다.
빠르다.
아니, 그보다.
무당파 장문인.
내게 거짓말을 했다.
빌어먹을 노인네.
무당파의 장문인씩이나 되는 작자가 거짓말이나 하고 말이다.
아미파 본산으로 올라가며 한두 명씩 모이던 아마피 제자들이, 어느새 구름같이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또 그런 젊은 제자들을 연배가 있는 비구니가 혼내는 소리도 들리고.
그런데 뭐!
왜!
어쩌라고!
무당파 장무인?
와!
돌겠다.
아니, 솔직히 부럽다.
무당파 장문인이 나에게 했던 거짓말은 인기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의 인기가 진동하는 게 아니라, 천무휘의 인기만 진동했던 것이다.
젠장할!
죄다, 수룡검 수룡검.
죄다, 천무휘 천무휘.
눈물이 난다.
그렇게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아나,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데, 의제 녀석을 슬쩍 봤더니 그냥 대놓고 운다.
돌겠네.
아무튼 아미파 본산, 복마전(伏魔殿)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아미파 장문인은 물론, 무당에서 보았던 오장로 봉화 사니를 포함 세 명의 장로가 더 자리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형식에 더 치우친 인사.
뻔한 대화.
살짝 지루한 시간이었다.
"금 소저를 볼 수 있을까요?"
역시 의제다.
단도직입으로 묻는다.
"부르도록 할게요."
‘색시가 고우면 처갓집 말뚝 보고 절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서 그런 건 아니다.
아미파 스님들은 나이로 보아, 우리보다 항렬이 두 배분 위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놓지 않았다.
그건 참 마음에 들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희가 직접 가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금 소저가 아미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의제 멋지다!
의제의 말에 장문인과 봉화 사니가 슬쩍 눈을 마주치며 고심하는가 싶더니.
"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우리는 금예지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미 복마전 밖으로 구름같이 몰려든 아미의 제자들이 그런 우리의 뒤를 따랐다.
얼핏 보아도 기백은 넘는 숫자였다.
* * *
충격!
충격이었다.
금예지가 왜?
도대체 왜?
측간(廁間), 변소(便所) 말이다.!
똥오줌 싸는 곳.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그곳과 댓 장을 남겨 두고 충격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영웅 대접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왜 똥간 청소를 하고 있냔 말이다!
"꺄아아악."
"수룡검 오라버니!"
우리를 따라붙은 기백의 아미파 제자들의 소란 때문이었을까?
한참 측간의 바닥을 물걸레로 닦고 있던 금예지가 반쯤 열렸던 문을 완전히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 오라버니들……."
잠시 놀랐으나, 이내 우리를 보고 환히 웃는 그녀.
그래서 더 슬펐다.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그리고 그때.
우뚝 굳어 버린 우리와 달리, 천무휘가 단번에 그녀를 향해 멋진 동작으로 몸을 날렸다.
"금 소저."
대번에 다가간 그가 금예지의 두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곧 금예지가 서둘러 자신의 손을 뒤로 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더러워요."
이내 부끄러운 듯 고개까지 숙이며 말하는 그녀.
그런데 그때.
덥석!
금예지가 뒤로 숨겼던 손을 천무휘가 가로채 덥석 잡아 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그대의 손이 아무리 더러워졌다 한들, 그대 때문에 바싹 타 재가 되어 버린 내 마음보다 더 더럽겠소."
기백의 아미파 제자들이 지켜보던 정적 속, 유일하게 들려온 천무휘의 대사.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꺄아아아악!"
"오빠아아아아!"
소리를 지르고, 서로 얼싸안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다.
또 누군가는 게거품을 물었고, 어떤 여승은 혼절해 버렸다.
우리가 찾아간 아미파의 첫날 광경은 그러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