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무당파에서 열흘 조금 넘게 머물렀다.
우리에 대한 무당파의 대접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융숭했다.
내가 매일 오전에는 장문인 그리고 오후나 저녁 시간에는 송암 도장과 독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에서 나와 우리의 위상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무당의 수뇌부만 그런 것도 아니다.
무당의 젊은 제자들도 우리를 보는 눈이 그냥이 아니었다.
위에서 시키니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들의 첫사랑 금예지 말이다.
이런 혼인도 못 할 어린 말코도사 녀석들까지 그녀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만 봐도 침을 질질 흘려 대는 놈이 있는가 하면, 혹시라도 그녀가 웃으며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면 얼굴이 시뻘게지는 놈도 있고.
하여간 그녀가 무당의 어디를 가도 그 분위기는 언제나 봄바람이고 꽃내음이었다.
의외로 천무휘 녀석에게 말을 건네는 젊은 도사들은 많이 없었다.
가끔 한두 녀석이 말을 건네 오는데, 잔뜩 긴장하고 상기한 얼굴에 몸까지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 말을 걸어왔다.
같은 연배지만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벽, 어쩌면 우상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기에 그런 모습들일 테다.
금예지만큼은 아니라도, 천무휘 녀석이 어디에 있건 숨어서 혹은 곁눈질로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훔쳐보는 도사들 천지였다.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는 건 의제와 한해북이다.
겉으로만 봤을 때, 인기만큼은 그 둘이 가장 좋았다.
그나마 천무휘에 비해 상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둘은 열흘이 조금 넘는 동안 각각 오십 회 이상의 비무를 치렀다.
매일 아침이면 우리 숙소 앞에 긴 줄이 서 있다.
모두 의제와 한해북에게 비무를 신청하는 이대 제자와 삼대 제자들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의제는 전승무패로 한해북도 딱 두 차례만 패하고 모두 비무에서 승리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개중에는 삼십대 후반의 이대 제자도 있었음에도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역시 의제가 훗날 화경의 벽을 깰 인재가 맞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해북 역시 나를 놀라게 한 건 마찬가지고 말이다.
변방의 흔하디흔한 그런 무인이 절대 아니다.
이 속도로 계속 성장한다면, 훗날 그 역시 화경의 벽을 깨지 않을까 싶었다.
충분히 가능하다.
그 외에도 우리 녀석들은 송암에게 무당 무공의 묘리와 정수에 대해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그가 전수해 줄 수 있는 최대치까지 배울 수 있었다.
뭐, 나도 함께 듣긴 했지만, 나는 다 아는 내용들이고.
화경급 고수에게 직접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그 자체로 기연일 터.
우리 녀석들의 무공 진전에 큰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당에서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있다.
* * *
장문인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
별 잡다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장문인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송암 사조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무슨 말요?"
"우리 순양자 선조님의 비동에 비급 말고 두 가지 물건이 더 있었다고. 철전 몇 닢과 검. 그 검을 순양검이라고 부른다네. 아는가?"
"그런가요?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올 게 왔다.
"우리 무당의 삼대보검 중 하나라네. 귀한 보물이고 신물이지."
"아! 중요한 물건이군요."
뻔뻔.
뻔뻔해야 한다.
이미 검집까지 새 걸로 갈지 않았는가.
또, 순양검을 실제 본 무당의 도사는 당대에 아무도 없다.
광천검은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자네 검이 좋아 보이는군."
"아! 네. 아주 좋은 검입니다. 제 손에 착 감기는 게, 그냥 제 몸의 일부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래."
"네."
"음."
"네."
어색했다.
갑자기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미친 듯 솟구쳤다.
땀은 왜 나는 걸까?
가시방석이 뭔지 제대로 알 것 같았다.
그때, 장문인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말이다.
"검이란, 언제나 자신의 주인을 찾아가기 마련이라네."
"그, 그런가요……?"
"허허, 그렇다네. 하늘의 뜻이고 검의 뜻이고, 그 또한 인연이라네."
"아…… 네. 네, 그렇죠."
"순양검도 자신의 주인을 찾아갔을 거라 생각한다네, 허허허."
무당에서의 마지막 날 하루 전.
운인 장문인은 나에게 묘한 미소와 함께 그런 말을 해 주었다.
아! 빚 하나 까인 것 같다.
뭐, 그래도 남는 장사지만 말이다.
* * *
"이번엔 사막입니다. 사막의 왕이라 불리는 마적단을 때려잡을 것입니다!"
무당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나와 천무휘, 금예지, 의제, 한해북.
우리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함께한다면!
우리가 함께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
그 자신감과 의욕이 우리 사이에 마구 폭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 한마디를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전 못 가요."
금예지다.
그녀의 한마디가 뜨거웠던 우리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그건, 이별과 절망이란 이름의 쓰라린 찬물이었다.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나라라도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 천무휘와 의제, 한해북.
미안함에 고개도 들지 못하는 금예지.
어색함만이 감돌았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금 소저?"
의제가 한껏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녀가 답을 하기도 전, 천무휘가 의제의 말을 보탰다.
"아미파에 돌아가면 또 사저와 사매들의 따돌림이 있지 않을까요? 전 그게 걱정입니다, 금 소저."
"그게……."
그녀가 무슨 죄를 지은 게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한껏 미안한 얼굴을 하고서야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서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저에겐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세요. 몸도 편찮으시고. 제가 빨리 돌아가 사부님을 모셔야 해요."
아!
어찌 저리 마음까지도 착할까.
원래 착했지만, 또 착하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우리들의 첫사랑이다.
슬쩍 다른 녀석들 표정을 봐도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부님을 뵙고 우리와 다시 함께하면 안 될까요? 사막의 마적단을 해치우는 일입니다.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민초들을 돕는 일이고요."
이번엔 한해북이 나서 물었다.
"그게…… 아마 이번에 사문에 돌아가면 쉬이 나오기 힘들 거예요."
"왜죠?"
"사부님 곁엔 제가 있어야 해요. 정말 많이 편찮으세요."
"아……."
사부님이 아프다는데 어쩌겠는가?
가지 말라는 건, 그냥 패륜아가 되라는 소리로밖에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해북도 입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나섰다.
"아미파까지 함께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저 혼자서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저 힘센 거, 헤헤."
미안함과 어색함을 가득 담아 웃는 그녀였다.
내가 너무 순순히 그녀를 보내 준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순간, 내 뒤통수로 수천 다발의 검강이 꽂히는 듯했다.
우리 녀석들이 눈빛으로 날 살해하는 순간이었다.
"금 소저,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 사천으로 움직이는 표국이나 상단과 함께하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무당에 부탁해 보겠습니다. 사천으로 가는 무리를 쉬이 찾을 수 있을 것입…….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이대 제자 덕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십시오."
덕해라는 무당의 제자가 들어왔다.
급히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숨이 살짝 가빴다.
"장문인께서 태청전으로 모시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저요? 오전에 이미 봤는데, 또 왜 부르실까?"
"아니요. 다섯 분 다 모시라 하였습니다. 특히 금 소저……."
덕해와 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금예지에게 쏠렸다.
하지만 그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
"아미파의 봉화 사니께서 이대 제자 두 분과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남 복강문의 문주와 그 부인, 또 문도 오십 명까지 대동하여 조금 전 무당산을 올라 태청전에 있습니다."
뭘까?
그 이유는 몰라도, 그들이 누군지는 금예지가 바로 설명해 주었다.
"봉화 사니께선 저희 아미의 오장로님이세요. 아마 사고(師姑)의 두 제자와 함께 오신 듯해요. 저에겐 두 분 다 사저시고요. 그리고 복강문은…… 하남 복강문주의 부인인 안수인 여협께서 저희 아미파 속가제자 출신이라 들었어요."
"그분들이 왜 왔는지 아십니까?"
내가 물었다.
하지만 금예지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답을 하지 않았다.
"우선 가 보죠. 가면 무슨 일인지 알겠죠."
결국 그녀 대신 내가 이끌었다.
그렇게 우리 다섯은 덕해와 함께 무당의 태청전으로 향했다.
* * *
태청전의 뜰.
그 넓은 마당에 수십에 달하는 무당의 도사들과 오십여 복강문 무인들이 서로 대치라도 하듯 그렇게 정확히 반을 갈라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하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렸다.
아니, 정확히 금예지에게 쏠렸다.
복강문 무사들이 그리 금예지를 주목한 것이다.
"네가 예지구나. 안수인이라고 한다."
"사고님을 뵙습니다."
복강문도들 사이로 나서는 중년의 여인.
허리에 검까지 찼다.
우아한 외양과 다르게 금예지를 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금예지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가득 숙여 존장에 대한 예법을 갖췄다.
동시에.
복강문주로 보이는 자와 더불어 복강문 무인들 사이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도대체 이 분위기 뭐야?
왜 이래?
"들어가 봐라. 봉화 사저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네."
금예지가 그녀를 향해 다시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 후 태청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그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역시나 같은 분위기다.
우리가 태청전 안으로 들어서자, 긴장과 경계로 인한 묘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 시선 또한 일제히 금예지에게 쏠렸다.
"제자 예지가 사고와 사저들을 뵙습니다."
다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가득 숙여 예를 차리는 금예지.
그런데 이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
바깥에서보다 더하다.
봉화 사니는 그나마 걱정과 경계, 놀람의 표정이 뒤섞인 듯했다.
하지만 금예지의 두 사저라는 삼사십 대의 두 여승은, 자신들의 검에 손까지 올려놓으며 대놓고 증오의 빛을 띠는 듯했다.
제갈세진에게 금예지를 죽여 달라고 했다던 소포검화 임하령이 무슨 수작질을 부렸나?
그러기엔 상황이 좀 과한 것 같은데.
아니지.
아니다.
자신의 사매를 죽여 달라고까지 했는데, 이 정도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우선, 단정 짓지 말자.
좀 더 주시해 보자.
"괜찮은 거니?"
봉화 사니가 금예지에게 다가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동시에 뒤에 있는 금예지의 사저라는 자들이 더욱 긴장과 경계의 빛을 띠었다.
아! 진짜 뭔지 모르겠네.
"네, 전 괜찮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사고님."
곧이어, 봉화 사니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검…… 내게 줄 수 있니?"
검을?
검을 왜?
금예지가 아무리 아미파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제자지만, 그전에 무림의 일원이요 당당한 한 사람의 무인이다.
무인에게 칼을 달라고 한다?
그건 목숨을 맡기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말이다.
난 이 상황이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들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금예지의 행동은 더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네."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그렇게 대답을 한 후, 천천히 검을 풀어 조심스럽게 봉화 사니에게 건네는 모습이었다.
마치, ‘이 검으로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것을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때.
타타타타탓!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검을 건네던 금예지의 혈도를 정확히 점혈해 버렸다.
우리들의 첫사랑이, 의식을 잃고 힘없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