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이 갑자가 넘는 힘이 실린 내 검강에 열 장이나 뒤로 밀린 제갈세진.
곧바로 놈의 수하 둘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수하가 쓰러졌음에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볼 뿐이었다.
놀랐겠지.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이 갑자의 내공을 막아야 했을 테니.
"매화천검!"
"난피풍파!"
놀란 제갈세진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 천무휘와 금예지가 곧바로 자신의 절기를 뿜으며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
엄청났다.
실로 엄청난 폭발이 연이어 터졌다.
초식명까지 일부러 외치며 제갈세진을 공격한 두 사람.
제갈세진의 눈을 가리기 위한 속임수다.
둘의 공격을 막은 후 곧바로 반격하려는 제갈세진을 향해, 내가 다시 검강을 쏘았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폭발.
하지만 하나가 아니다.
첫 검강의 뒤로 아홉 개의 검강을 연이어 쏘았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멀쩡하다.
역시 제갈제일검, 초절정 상상(上上)의 고수가 맞긴 하다.
우리의 공방은 순식간에 이백여 합을 넘기고 삼백여 합, 다시 오백 합을 넘었다.
주변의 땅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다.
이 갑자에 달하던 내 내공마저 바닥을 보이려 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천무휘 녀석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이 싸움은 진즉 우리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을 것이다.
내 내공도 분명하게 한몫했고, 금예지의 여전사 상태 돌입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
그래도 역시 핵심은 천무휘였다.
나와 금예지가 제갈세진을 상대로 오 할의 힘을 상대했다면, 천무휘 홀로 나머지 오 할을 상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도 한계다.
내공이 고갈 난 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고, 이미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금예지 역시 지칠 대로 지쳐,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상태다.
내가, 내가 조금 더 힘을 내야 한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남은 내공을 모조리 쥐어짜 한 방을 갈겼다.
아!
제갈세진, 지독한 놈.
쓰러지지 않는다.
숨을 헐떡대고, 입으로는 검은 피를 연신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지독한 눈빛만으로 우릴 죽이겠다며 노려본다.
그리고 그가 움직였다.
진 건가?
송암이 나서겠군.
아! 쪽팔려.
큰소리 뻥뻥 쳤는데.
콰콰콰콰콰콰콰쾅!
나를 죽이려 몸을 날린 제갈세진.
무엇이 그의 검을 막았다.
엇?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의제와 한해북.
경지의 차이로 우리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던 이들이 가장 위급한 순간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악적 제갈! 죽어라!"
콰콰콰콰콰콰쾅!
천무휘와 금예지가 다시 힘을 내 몸을 날렸고, 의제와 한해북 역시 미친 듯 제갈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라고 어디 쉴 수 있겠나.
입으로 시작해 콧구멍으로도 피가 철철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힘을 냈다.
그렇게 우리 다섯이 제갈세진을 향해 미친놈처럼 달려들고 또 달려들고 계속 달려들었다.
그렇게 일천 합의 공방 끝.
우리가 이겼다.
* * *
호북성 이창 염산의 싸움이 있고 닷새 뒤.
무당파 장문인 집무실.
"반응이 좀 어떻습니까?"
"어떻긴. 난리가 났지, 허허허."
"제갈세가의 삼장로이며 제갈제일검이라는 제갈세진의 죽음. 거기에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교류 전면 중단까지. 천하가 놀랄 만한 소식이긴 하네요. 무엇보다 무당파에서 화경의 고수가 탄생했다는 사실까지 공식적으로 선포했으니,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겠죠."
우리는 무당파로 왔다.
현재는 장문인 집무실에서 나와 운인 장문인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사실 운인의 기분을 고려해 한 가지 사실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삼장로 운면.
그는 기사멸조의 죄로 면벽뇌옥에 평생 갇히게 됐다.
평생 어두운 동굴에 갇혀 사람을 볼 수도 없고, 오로지 물과 벽곡단만 지급될 테다.
단전까지 파괴된 상태의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염산의 싸움 후 이틀이 지나 무당파는 무림을 향해 이러한 일들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내가 지금 무당에 들어와 있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반응이 엄청났을 테다.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교류 중단.
거기에 제갈제일검이라는 제갈세진의 죽음.
무엇보다 송암 도장이라는 화경 고수의 등장은, 무림 세력의 지각 변동까지 일으킬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무림에 있어서 화경 고수 한 사람의 영향은, 이루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 정도로 크고 대단한 일이다.
지금 당대에 알려진 화경급 고수는 총 다섯 사람이다.
이는 광마일기에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무림맹주이며 남궁세가의 세가주인 창궁검제.
소림사의 천수신권.
화양문의 극양신장.
황룡회의 유령신검.
마지막으로 사파의 인물로 그 사문이나 소속이 없는 수라섬전도까지.
이 다섯을 일컬어 당대의 무림오대고수라 부른다.
무림의 세력 지형 역시 그들을 중심으로 짜였고 흐르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화경급 고수가 탄생한 것이다.
무림오대고수가 무림육대고수가 됐고, 이는 무림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무림판이 짜여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말이다.
천하 무림이 진동할 어마어마한 일인 것이다.
"틀렸네."
"네? 뭐가 틀렸다는 말씀이신가요?"
장문인 이 노인네 말이다.
며칠 지났다고 제법 나랑 친한 척을 한다.
제갈세진을 상대할 때의 그 위엄은 온데간데없다.
은근 농담을 좋아하는 노도사다.
"세인들은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즐겨 하지 않는다네."
"음, 그렇기도 하군요. 그래도 송암 도장님의 등장은 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을 엄청난 사건 아닌가요?"
"큰 사건이긴 하지. 하지만 자네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반응은 아니라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화경의 고수에요. 그런데 그 반응이 제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하지 않다고요?"
"만약 다른 문파에서 화경급 고수를 배출했다면, 천하가 기겁을 하고 난리가 났을 테지. 하지만 우리는 무당일세. 무당에서 화경급 고수 한 명을 배출했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사건이 될 수 없다네. 오히려 우리 무당에서 수십 년 동안 화경급 고수를 배출하지 못했다는 게 더 놀랄 만한 일이지."
광오하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그 무엇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네, 천무휘 소협, 금예지 소여협, 거기에 곽우적, 한해북 소협들까지. 바로 자네들이라네."
"네? 저희요? 저희가 뭐요?"
"밖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열이 모이면 아홉은 자네들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군. 무당의 화경급 고수 배출도 아니고 제갈제일검의 죽음도 아닌, 자네들 이야기만 한다고 해. 허허. 벌써 칠룡사봉의 명단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까지 들끓고 있다는군, 허허허."
"저, 저희가요?"
"어찌 아니겠는가? 이십 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 제갈세가의 제일검을 꺾었는데 말이야."
"휴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좋다!
좋아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다.
큭큭큭큭.
마두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진데, 칠룡사봉이라니!
뭐, 꼬맹이들이랑 같이 언급된다는 게 광천마제였던 나로서는 조금 그렇기도 하지만.
그건 진짜 천 중 일에 불과하고.
진짜 기분 최고다.
크하하하하하하!
개고생을 하긴 했지만, 내가 참 잘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래도 너무 티를 내면 체신 떨어지니, 자제하자.
"제갈세가는 어떤가요?"
"그 마부석에서 흑의를 입었던 두 사람 말일세."
"네. 천 형과 금 소저가 죽이지 않고 혼절시켰죠."
"제갈세가로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모두 보고했더군. 가감 없이 모두 사실대로 말이야. 정당한 대결이었고, 그 일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간 자신들의 치부만 드러날 것이 자명하지 않겠는가?"
"그래서요? 우리를 어쩌겠대요?"
"제갈세진과 자네들의 대결을 정당한 대결로 인정했네."
"휴우, 최소한 대놓고 복수하지는 않겠다는 소리네요. 그나마 다행이에요."
"그래. 이미 그들에게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네. 머리가 좋은 자들이니, 아마 그들도 당분간 자중할 걸세. 또, 우리 무당이 그들을 견제하며 주시할 테니, 섣불리 자네들에게 무슨 흉계를 꾸미기도 힘들 테지. 그래도 항시 조심해야 할 것일세. 상대는 제갈세가니 말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무당에 좀 더 오래 머물면 어떤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인가 보군."
"네. 제 인생이 걸린 일이거든요."
"사람을 붙여 줄 수도 있네.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 장로 중 한 사람을 보내 주겠네."
"말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제힘으로 극복해야 할 일들입니다."
운인이 잠시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거 받게나."
그가 나에게 신패 모양의 물건을 건넸다.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게 뭔가요?"
"무당태극패(武當太極牌)라네."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고맙네, 마 소협."
"……."
"나, 즉 무당 장문인의 권위를 담은 신패일세. 본산의 제자에게 이를 보여 주면, 내 명령에 따르듯 자네의 명령을 따를 것일세. 또한 속가 출신의 가문이거나, 우리 무당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라면, 최대한 자네의 말에 도움을 주려 노력할 것일세. 자네의 부탁이 곧 나의 부탁이니 말이야."
"장문인 도장님, 제게 이건……."
"자네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네. 이 신패 하나로 그 모든 걸 갚을 수 없음을 알고 있네. 그저 우리 무당의 마음이라 생각해 주시게. 고맙네, 마 도사."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정말 이건 제게 필요……."
"허허허, 그만 넣어 두라니까. 허허허."
"아니요. 정말로 저는 이게 필요……."
"하하하. 사절의 덕양까지 갖추고, 하지만 정말 받아도 된다…….
"그만! 그만!"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레 소리까지 지르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하는 장문인이었다.
무당태극패?
이거 죽으면 말짱 도루묵.
사라져 버릴 거 아니겠는가?
솔직히 죽을 생각은 없지만, 지금까지 겪어 온 바로.
내가 앞으로 갈 길이 순탄치 않음을 이제는 뼛속까지 제대로 깨치고 있다.
앞으로 상대한 놈들의 면면을 보면, 제갈세진 따위는 그냥 범 앞의 하룻강아지도 안 되는 수준이다.
결국 몇 번이고 또 죽을 거란 소린데.
이 무당태극패를 지금 가진들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마 도사?"
"앗! 갑자기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휴우, 깜짝 놀랐네. 그런데 왜 그러는가? 신패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게요, 장문인 도장님. 이거 대신…… 혹시 추천서 같은 거, 서신 같은 걸로 대신해 주시면 안 될까요?"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 그였다.
"제가 물건을 진짜 잘 잃어버려요. 이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고 일어나면, 알몸이라니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진짜 다 잃어버리고 알몸이에요. 일기장과 붓 한 필만 가지고 있어요."
"무슨…… 몽유병 그런 건가?"
"그게 설명하려면 좀 길고 힘들어요."
"휴우, 참, 모든 걸 다 가진 줄 알았더니, 자네에게도 그런 속사정이 있었구먼."
"네."
"그래, 추천서고 서신이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써 주겠네. 지금 당장 써 주지."
난 품에서 광마일기와 각혼필을 꺼냈다.
그것을 슬쩍 운인 장문인에게 건넸다.
차마 쪽팔려서 광마일기란 글자는 보여 주기 그랬다.
일기장의 제목을 손으로 가리고, 그렇게 그걸 건네며 펼쳤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쪽.
그곳에 무당파의 장문인이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부분에선 친절하게 수인까지 찍어 주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엄청난 수확.
제갈세진에게 복수했을 때보다 훨씬 더 기뻤다.
정말 정말 정말 극악과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면, 도저히 내가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말이다.
그때는 작은 사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전에 도움을 요청할 곳이 한 군데 생긴 것이다.
무당파.
큭큭큭.
화경의 고수를 머금은 무당파가 이제부터 나를 지원해 줄 테다.
"그런데 장문인 도장님."
"또 뭐가 있나?"
"그게 실은…… 저희가 이번에 돈을 좀 많이 썼거든요."
"……?"
"의제가 우각당이라는 문파를 이끌고 있는데, 거기 재산의 절반 가까이를 팔아서…….
"알, 알겠네, 허허허. 그래야지, 허허. 도사도 돈이…… 허허. 가끔 필요하기도 하지, 허허허."
의제가 하오문 만리현 지부에 썼던 돈까지 모두 받아 냈다.
수고비와 이자까지 살짝 덧붙여서.
* * *
"이번엔 사막입니다. 사막의 왕이라 불리는 마적단을 때려잡을 것입니다!"
나와 천무휘, 금예지, 의제, 한해북.
우리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함께한다면!
우리가 함께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
그 자신감과 의욕이 우리 사이에 마구 폭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 한마디를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전 못 가요."
금예지다.
그녀의 한마디가 뜨거웠던 우리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그건, 이별과 절망이란 이름의 쓰라린 찬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