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광마일기를 읽었다.
참, 세상 한번 지랄맞게 엿 같다.
세상 삶이라는 게 녹록지 않음은 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간계와 모략이 너무 판을 친다.
싸우다 죽었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얘들 말이다.
제갈세진 이 새끼.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임하령.
너도 이제부터 여자 아니다.
* * *
"사부님, 궁금한 게 있어요."
돈이 필요하다.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돈을 벌 방법이 없다.
의제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 봐야 하오문에 호구만 잡힐 테다.
아무튼 돈이 필요하다!
"허허, 그래 우리 악치야. 무엇이 궁금하더냐."
심장이 두근두근.
제발, 제발 있다고 해 주세요, 사부님.
정말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걸 지금 물으려 한다.
"사부님, 우리 십간산에 혹시 영초나 영물, 그런 영약 같은 거 있어요?"
"허허, 갑자기 영약은 왜 그러느냐?"
"그냥 궁금해서요."
"내공이 사라진 것 때문에 그러느냐?"
"아니에요. 내공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도를 닦는 데 내공이 있어서 뭘 하겠어요?"
"허허허, 역시 우리 악치가 참 도사가 다 됐구나, 허허허허."
"그래서 있어요, 없어요? 천년산삼 같은 것에서 영묘한 기운이 흐른다고 하던데. 그것을 느끼며 도를 닦으면 좀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아!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까? 그것도 도를 닦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구나, 허허허."
아! 사부님아, 사부님아!
그래서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따라오너라."
"있…… 있어요?"
"허허, 그렇다."
우리 사부 말이다.
진짜 천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대자연의 기운은 완전히 꿰뚫고 있는 천하제일 도사님 맞다.
하하하하하!
* * *
산삼밭이었다.
사부의 말에 따르면 종주삼(宗主蔘)이 팔백 년 동안 주변에 씨를 뿌려 산삼 군락을 이루었을 것이라 했다.
난 사부에게 그곳에서 수양하겠다고 한 후, 팔백 년 된 종주삼과 주변의 작은 산삼 몇 뿌리를 더 캐어 챙겼다.
아! 대자연의 기운을 본인의 몸과 같이 느끼는 사부라면, 이거 감지하겠는데?
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난 서둘러 캔 산삼들을 들고 산을 내려가 팔았다.
제값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개방 녀석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모든 정보를 토해 낼 정도의 충분한 돈을 벌었다.
* * *
"오! 아갈개 분타주 오셨소? 구지개 소걸개도 같이 오셨군요."
"도사님, 안녕하셨어요?"
"네, 도사님, 헉헉. 산이…… 여기 산이 정말 높군요, 헉헉. 오다가 목이 말라 쓰러지는 줄…….
"아갈개 분타주님. 연기 그만하고 앉으시오. 여긴 술 같은 거 없으니까. 고기는 더더욱 없으니 기대 접으시고요."
"아! 진짜 도사님이셨습니까?"
"그렇소, 하하."
내가 허창 풍평분타를 들른 후 정확히 열흘이 지나 이들이 우리 현화문으로 찾아왔다.
내가 요청한 정보가 그들 분타에서 다 찾을 수 없는 정보였기에 이제야 온 것이다.
마침 사부님이 안 계셔서 다행이다.
다른 산으로 수양하러 가신 참이다.
"도사님 덕분에 요 며칠 우리 분타 거지들이 극락을 경험한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를 향해 허리까지 꾸벅하며 인사를 하는 구지개다.
아갈개는 누가 개방 거지 아니랄까 봐, 우리 사문이 뭐 하는 곳인지 빠르게 염탐하는 눈치고.
"정보는?"
"앗! 여기 있습니다. 그 양이 꽤 됩니다."
제갈세가와 제갈세진 그리고 아미파와 임하령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내가 복수할 대상들이다.
그리고 또 있다.
무당파에 관해서도 광마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운면 이 빌어먹을 말코도사에 관해서 매우 상세히 기록된 정보까지 확보했다.
* * *
구산사괴는 이번에도 오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계효보 이 녀석은 뭐 하지?
역시 내가 죽은 뒤에만 나타나는 것인가?
계속 보다가 안 보니 조금은 섭섭……은 개뿔!
온전히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용서하지 않겠다.
제갈, 무당, 화산, 아미!
너희 모두 내 적이다.
절강 항주로 사부와 유람을 갔다.
귀정사에 들렀고, 남창 만리현 정도 문파를 쓸어버렸다.
수룡검을 만나 무공을 되찾는 느낌은 언제나 그렇듯 황홀하다.
다시 이 갑자의 내공과 절정의 경지를 되찾았다.
* * *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서지 마시오.
내 말에 천무휘, 의제, 한해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금 순양자의 비동에 와 은신한 상태다.
어두운 밤이었고, 몇 개의 횃불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쉬이이이이익.
바람 소리와 함께 막사의 중심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귀신과 같이 움직이는 게 목격되었다.
툭.
투투투투툭.
마혈을 제압당한 경계 무인들이 쓰러졌다.
그녀다.
금예지.
하지만 곧 발각되었다.
댕댕댕댕댕!
경종이 마구 울려 댔다.
"침입자다! 신물을 지켜라!"
챙!
채채채챙!
퍼퍼퍼퍼펑!
"으아아악!"
"고수다! 으악!"
그녀가 간신히 순양검 하나만을 들고 빠른 속도로 장내를 벗어났다.
"모두 뒤쫓아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제갈취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사자후까지 터뜨리며 흑의 수하들을 이끌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이 모든 상황을 우리는 숨죽여 지켜보기만 했다.
순양자의 비동 주변에 남은 이들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제갈세진은 역시나 없다.
오늘 일이 터졌고, 내일 이곳을 오게 된다.
-형, 형님, 방금 그 사람…… 남자인데 여자 맞죠?
-집중하자, 의제. 일단 계획대로 움직인 후 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겠다.
-네, 형님.
-지금입니다. 갑시다.
우리 넷은 어둠을 뚫고 움직였다.
순양자의 비급을 지키고 있는 열 명의 적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의제와 한해북 둘이서 눈 깜짝할 사이 제거해 버렸다.
난 곧바로 막사 내부로 들어가 비급만을 챙겨 빠져나왔다.
순양자의 비급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근처에 있는 것 다 아오. 나오시오!"
샘물에 독을 탄 스무여 명의 흑의인들을 제거한 후.
내가 목청을 높이자, 한 사람이 수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다.
"적들이 더 몰려올지 모르니 일단 자리를 옮깁시다."
* * *
순양자의 심득이 담겼다는 비급.
다시 회귀 후, 삼 년 동안 고심 끝에 하나의 추론을 할 수 있었다.
광천마제였던 내가 광천동에서 죽어가며 내 일생을 모두 기록했듯, 순양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비급에, 당시의 모든 상황을 명확히 기록해 놨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추측이 모두 들어맞았다.
제갈세가에서 위산에 엄청난 진법을 구축해 놓았다.
순양자는 그 덫에 빠졌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화경의 고수였던 그를 제갈세가에서도 어쩌지 못했다.
결국, 말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광천마제 시절 내가 알던 것과 달리, 순양자는 무공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천재였다.
특히 그는 진법에 대해서도 일대종사라 불릴 만큼의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제갈세가의 진법에 갇혔어도, 제갈세가에서 끝내 죽이지 못했던 이유가 오로지 그의 무공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일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진법제일가라는 제갈세가의 진법가와 술사들이 삼 년 동안 비동의 진법을 해진하지 못한 이유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난 이 모든 내용이 담긴 순양자의 비급을 금예지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놀람을 넘어 엄청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날 쳐다보기만 했다.
"순양검과 이 비급을 바꾸고 싶습니다, 금 소저."
"어…… 저…… 그런데…… 제가 여자인 거 아셨어요?"
"풉."
심각한 상황.
의제 녀석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내 시선이 닿자, 곧 정색을 했는데…… 꾸역꾸역 참으며 웃는다.
이건 뭐, 천무휘나 한해북 모두 마찬가지였다.
사실 나도 웃긴 거 억지로 참고 있었고.
금예지만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여전히 자신의 변용이 엄청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험, 그게…… 사실 외모만 봤을 때는 몰랐습니다. 정말 감쪽같이 속을 뻔했지요."
그녀가 웃는다.
그녀가 기쁘면 됐다.
지난 생에서 나 때문에 육신은 물론 마음까지 죽어야 했기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환히 웃어 주니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더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도사님. 마 도사님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금 소저."
"누가 봐도 그 가치의 중함에 있어 검보다 비급이 비교도 하기 힘들 만큼 클 텐데, 정말 이걸 바꾸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저에겐 필요 없습니다. 금 소저도 이것을 가지려는 것이 아닌 무당파에 전할 생각 아니십니까?"
"네. 그렇긴 해요. 그래도 순양자의 심득이 담긴 비급인데, 탐나지 않으세요?"
난 진짜 필요 없다.
살아 있는 사부가 있고, 살아 있는 작은 사부가 있다.
무적 할매도 전부는 아니지만, 나에게 많은 것을 전수해 준다.
심지어 우리 사문에 있는 비급들에 죄다 천하제일인이었을 법한 선조들의 심득이 담겨 있다.
천하제일인도 아닌, 무림팔대고수의 심득을 내가 욕심낼 이유가 전혀 없다.
뭐, 이런 걸 금예지에게 다 말해 줄 필요는 없고.
툭툭.
"전 검이 필요합니다. 그 검이 마음에 드는군요."
우각당에서 가지고 와 허리에 찬 싸구려 검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녀가 또 웃는다.
"심각한 상황에 이런 말 하는 게 아닌 줄 알지만, 도사님…… 재미난 분 같으세요."
아!
예쁘다.
미소가.
그리고 내 뒤통수가 따갑다.
질투의 화신이라도 된 세 녀석이, 눈빛으로 내 뒤통수에 검강을 마구 쏘아 대는 중이다.
"무당파로 함께 가겠습니다. 무당파는 비급만 있어도 충분히 사건의 전말을 간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정말 같이 가 주실 거예요?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어요."
"저희도 비급을 가지고 왔습니다. 적들이 쫓는 건 이미 금 소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희도 이미 적들이 쫓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그녀가 말과 함께 순양검을 내게 건넸다.
나도 즉시 비급을 건넸다.
그녀는 순양자의 비급을 받아 자신의 품 깊숙한 곳으로 넣었다.
난 싸구려 검을 버리고, 순양검을 허리에 찼다.
"가시죠."
우리는 이틀 동안 위산에서 도주극을 펼쳤다.
* * *
"조심하시오, 금 소저!"
제갈취무가 갑작스레 독수리 발톱 모양의 조를 꺼내 금예지를 엄습했다.
하지만 이미 나에게 들어 충분히 대비하고 있던 그녀는 이를 정확히 피하였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나와 천무휘가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검강을 쏘아붙였다.
잠시 후, 제갈취무와 그 졸개들은 전멸하였다.
위산 끝자락 오두막에서의 전투였다.
"이제 이곳을 벗어나 무당파로 전력을 다해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헉헉."
지친 금예지가 말했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니다.
이미 처절하리만큼 아프게 당했던 길이다.
그 길을 다시 갈 이유는 없다.
"아니오. 우린 무당파 반대로 길을 떠날 것이오."
"그럼…… 그럼 무당파는요?"
"상대는 제갈세가입니다.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대비를 했을 것입니다. 지금 곧장 무당파로 가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천무휘와 의제, 한해북의 나에 대한 신뢰는 거의 사이비 종교의 맹목적 신앙과 같았다.
또한 금예지 역시…… 음, 나를 좋아해서 그러나?
큭큭, 희망 사항이다.
아무튼 금예지도 내 말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 * *
광동 불산의 모처.
광천마제 시절 내가 보유하고 있던 수십 개의 안가 중 하나가 있던 자리다.
지금이야 허허벌판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숨기에는 이보다 안성맞춤이 곳이 없었다.
위산에서 무당파로 가는 반대 방향이고, 이 장소를 아는 이는 십수 년이 지난 후에도 나와 의제 그리고 사패천의 핵심 소수만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석 달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나는 변용을 하고 홀로 인근 마을로 가 순양검의 검집을 바꿨다.
순양검이 다시 천하제일검, 광천검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 우리는 안가를 떠났다.
무당파를 향해서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광천마제의 사악한 복수극을 시작할 시간이다.
난, 미래를 알고 있다.
지금 세상이 모르는 비밀 또한 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무당이다.
승천하지 못한 용 한 마리.
그것이 일백 년 넘게 무당산에 웅지를 틀어 꿈틀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