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엄청난 위압감이다.
말 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무슨 팔부신장(八部神將,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수호신)이라도 마주하는 것 같다.
기운을 끌어올린 것도 아닌데, 그를 그냥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피부가 따끔거리는 느낌이다.
광마일기에도 저 노인네에 대한 기록이 몇 줄 있다.
초절정 극상(極上).
어디서 칼 좀 휘둘러 봤다는 수준.
-광마일기 中
아! 범접할 수 없을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마구 뿜어 대는 괴물급 고수를 내가 왜 그렇게 기록했을까?
돌겠다.
그보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숙부님!"
천무휘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간절해졌다.
"이대로는 갈 수 없습니다. 제가 떠나면…… 제 친구들이 위험해집니다.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오."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화산을 먼저 언급한 적이 없는 천무휘다.
누구나 다 그가 화산의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화산에 도움을 바란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 눈물까지 흘리며 극혼검왕 범철승에게 빌고 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다.
천무휘도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런 모습에 극혼검왕도 마음이 흔들렸나 보다.
단단한 철과 같이 단호하기만 했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천무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그러했다.
"사부님!"
계집!
빌어먹을 계집!
계집이 극혼검왕의 소맷자락까지 잡아당기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뭔가 이곳까지 오기 전, 단단히 약속을 받고 온 모양이다.
그런데 설마 이것까지?
난 빠르게 시선을 제갈세진에게로 옮겼다.
미세하지만 웃고 있다.
이 또한 그가 계획한 것이다.
거기에 천예휘는 덩달아 가세했을 테고.
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제갈세가와 무당파, 그리고 화산파의 기둥뿌리까지 뽑아 죄다 불살라 버릴 테다!
"정녕 종파의 명을 거역할 셈이더냐!"
"숙부님!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제발, 제발 시간을 주십시오!"
"종파의 명을 거역하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모르느냐?"
"숙부님…… 흑흑."
"네 가문에 전한 본산의 무공을 모두 회수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오빠! 도대체 왜 이래? 저 사람들 만난 후부터 오빠 변했어! 화산이 우리와 우리 가문에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 몰라?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남기셨던 유언 잊어버렸어? 진짜 왜 이래! 숙부가 내 단전 파괴하고, 내 사지의 근맥을 모두 자르는 걸 본 후에야 화산으로 갈 거야? 오빠, 제발 쫌!"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천무휘가 흐느껴 울었다.
숙인 그의 고개로 투명한 액체가 하염없이 흘러내려 마른 땅을 적셨다.
"숙부님, 부디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가 간신히 울음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극혼검왕을 향해 말했다.
"오빠!"
찢어 죽일 계집.
욕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내가 욕을 뱉을 필요가 없었다.
극혼검왕이 손을 들어 그런 계집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말해라, 무휘야."
"제가 지금 이렇게 이곳을 떠나면, 제 친구들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숙부님께서…… 숙부님께서 그들의 안전을 약속받아 주십시오."
천무휘의 말에 극혼검왕의 시선이 천천히 우리에게로 향했다.
아니, 나에게로 향했다.
그는 이미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계집이 안 좋은 얘기만 잔뜩 부풀려 말했으리라.
하지만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이 곱건 그렇지 않건, 천무휘의 간청이 통한 분위기였다.
이내 극혼검왕의 시선이 나에게서 떨어져 뒤로 향했다.
제갈세진과 운면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와 어정쩡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제갈세가의 세진이 검왕 선배님을 뵙습니다."
"무당의 운면이 검왕 선배님을 뵙습니다."
"배분의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그리 격식 차리실 필요 없으시네들."
"아, 네. 하하."
"무량수불, 하하하."
극혼검왕의 나이가 현 화산파의 장문인보다 스물네 살이 더 많다.
나이로 따지면 한 배분 위다.
다만 극혼검왕의 화산 입문 시기가 늦어 배분은 같기에 이런 조금은 이상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무려 서른세 살이 넘어 화산의 제자가 됐다.
무공을 익히기 위함이 아닌, 온전히 도를 닦는 도사가 되기 위해 화산의 제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엄청난 무재를 숨길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근맥이 굳어 모두가 무공을 익힐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화산제일검이 되기까지 했다.
뭐, 그 엄청난 무공을 천예휘에게 전수해 줘서 결국 내 몸에 칼자국만 아흔여덟 방, 아니 아흔아홉 방을 남긴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저 아이들…….
"아, 네. 검왕 선배님. 저는 그 누구도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저희 무당파가 순양검을 되돌려 받은 것으로 감사합니다. 뭐, 지금 누구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제자 몇 명을 붙이고 저는 물러갈 것입니다. 우선 순양검을 사문에 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분명 약속드립니다. 저희 무당은 저 아이들이 어떠한 일을 했다고 판명이 나든, 그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희 무당의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도 없었고, 본파의 보검인 순양검을 되찾게 된 것이니까요."
극혼검왕은 일의 전말을 묻지 않았다.
잠시 순양검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이미 그 어떤 통로였건, 이 상황을 전해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 어떤 통로란 것이, 결국 제갈세진의 모략이겠지만 말이다.
순양검에 잠시 시선을 멈추었던 극혼검왕이 다시 운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이번에는 제갈세진을 향했다.
"검왕 선배님, 저희 제갈세가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으흠."
"제 수족과 같은 수하가 저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진즉 저들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당파에 이 일을 알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본 세가와 제 명예를 걸고 약속드립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이 일을 모두에게 명명백백 밝힌 후 공명하게 처리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극혼검왕.
제갈세진의 간사한 혀를 믿는 것 같다.
그러더니 이내.
"저 아이가 아미파의 제자라 하였나?"
"네? 아,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금예지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는 극혼검왕이다.
"아미파의 제자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간, 우리 화산과 척을 지는 것보다 훨씬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걸세."
"검왕 선배님의 충고,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숙부님!"
상황을 지켜보던 천무휘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극혼검왕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가현운."
"네, 장로님."
사십 대 초반의 도사가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가왔다.
검에 달린 수실과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문양이 다른 도사들과 조금 달랐다.
매화검수다.
"삼대 제자 둘을 데리고 제갈 대협을 도와라."
"넵!"
"제갈 장로, 기분 나빠 마시게. 내 조카 녀석이 저렇게 울며 간청하니, 늙은 마음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네."
"물론입니다. 오히려 저로서는 환영할 일입니다. 본 세가에서 이번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것을 화산에서 증명해 주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무휘야."
"숙, 숙부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가자, 화산으로."
* * *
천무휘가 떠났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뭐, 이해한다.
극혼검왕이 말했던 ‘본산의 무공을 모두 회수한다’는 말.
천예휘의 말마따나 단전을 파괴하고 근맥을 자른다는 뜻이다.
정파 놈들이 자신들의 사문 무공을 지키는 데에는 사파보다 더 가차가 없고 냉혹한 것 같다.
설마 극혼검왕이 천무휘와 천예휘에게 진짜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천무휘가 그와 화산파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음은 충분히 짐작하고 이해한다.
내가 제갈세가를 너무 우습게 봤다.
후회한들 어찌하랴?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복수건 뭐건 할 수 있을 테니.
다행히 우리에겐 금예지가 있다.
극혼검왕 이 노인네, 사실 광마일기에는 별 비중도 없는 노인네였다.
그런데 제대로 한 건 해 주고 가네.
금예지가 있는 한, 쉽사리 우릴 죽이지 못할 테다.
"가현운 도사님, 덕률 도사님, 덕강 도사님. 그리고…….
화산파에서 이대 제자이자 매화검수인 가현운과 삼대 제자 둘, 이렇게 총 세 명을 남기고 갔다.
무당파에서는 이대 제자인 덕률, 덕강 그리고 삼대 제자 다섯을 남겼다.
제갈세진이 각 파의 대표인 이들을 호칭한 후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렸다.
천무휘가 없으니 누가 대표로 나설 것인가 확인하는 것이다.
금예지를 내보낼 순 없다.
전장에서는 여전사지만, 이런 무대에서는 아직 부족하다.
내가 나섰다.
"자네군."
"마악치라 했습니다."
"흥, 그래 마악치."
소협이란 호칭도, 도사란 호칭도 붙이지 않는다.
그는 이내 비웃음을 내게 날리고 시선을 다시 무당과 화산으로 돌렸다.
"진상을 밝히는 일은 매우 간단합니다. 번거롭지만 도사님들께서 저희와 함께 위산으로 가 보시면 무엇이 진실인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갈세진의 말에 무당파 덕률이 나섰다.
"저희 순양자 조사님께서 우화등선한 장소를 확인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그것이 무덤이면 제갈 대협의 말씀이 맞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비동의 형태라면 저 친구들의 말이 사실이 되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덕률 도사님."
"제갈 대협, 말씀 낮추십시오. 제가 어렸을 적 뵈었을 때처럼 편히 해 주십시오."
"오! 자네가 그때 그 꼬꼬마 도사, 운면의 제자 덕률이었군. 내 정신이 이렇다니까, 하하하!"
"네, 대협. 기억해 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하하. 어차피 순양자 조사님께서 우화등선하신 장소도 확인하란 명을 받았습니다. 저희 무당은 당연히 함께하겠습니다."
"저희 화산도 제갈 대협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함께하겠습니다."
"고맙소, 하하. 그럼 이제 남은 건…….
나군.
이미 손을 써 놨겠지.
하지만 지금 방법이 없다.
제갈세가가 선동하고, 무당과 화산이 동의했다.
우리 현화문이 대단하긴 하나,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힘이 없다.
"다들 동의하신다니 어쩔 수 없죠."
가면서 방법을 찾자.
그렇게 우린 위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방법?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뱀의 머리를 가진 제갈세진이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해 놓았는데.
열흘 만에 순양자의 비동에 돌아왔다.
오는 길,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매일 그 숫자를 늘렸다.
제갈세가 본가에서 지원 무인을 계속 늘린 탓이다.
도망갈 기회는 아예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순양자의 비동.
아니, 무덤이다.
미친!
작고 오래된 봉분이 거기 있었다.
비동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가 미친 것일까?
아님, 세상이 미친 것일까?
그도 아님, 진짜 하늘의 농간일까?
아니다.
제갈세진의 농간이다.
무당이 거기에 장단을 맞추었고, 화산의 매화검수는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모든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저 죄인들을 우리가 압송해 가도 되겠습니까?"
"무량수불. 무량수불. 본 무당은 제갈세가의 뜻을 막지 않겠습니다."
운면의 제자다.
또 운면은 제갈세진의 둘도 없는 친구란다.
큭큭큭.
빌어먹을 새끼들.
역시 처음부터 다 계획된 것이었어.
"화산은 어떤 입장인가?"
이미 이곳으로 오면서 가현운의 기를 꺾을 대로 꺾어 놓은 제갈세진이었다.
가현운에게는 아무것도 기댈 수 없다.
"저희 화산도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다만, 어린 친구들이니 제갈세가에서 손속에 사정을…….
"가 도사!"
갑자기 제갈세진이 분노하여 호통을 쳤다.
"넷?"
놀라고 겁먹은 얼굴의 가현운.
"내 형제와 같은 수하들이 죽었네! 생사고락을 같이한 평생의 전우가 저놈들에 의해 죽었단 말이야! 어찌 손속에 사정을 두라 말하는 것인가!"
"제,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오라…… 죄, 죄송합니다, 제갈 대협."
역시.
머리 굴리기와 혓바닥 놀리기는 제갈세진을 당해 낼 수 없다.
안타깝게도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무당을 순양자의 무덤에 남겨두고, 화산파는 떠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소문이 나 봐야 무당이나 화산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다며 입단속 시키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제갈세진, 철두철미한 놈이다.
* * *
우리는, 제갈세가 본가도 아닌 와룡산의 선산으로 끌려갔다.
마혈을 제압당하고, 포승줄에 단단히 묶인 상태다.
그곳에 제갈취무의 무덤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처형할 생각인 것이다.
"제갈세진, 죽기 전에 부탁이 있다."
죽기 전 내가 그를 향해 말했다.
"부탁하는 놈치곤, 혀가 많이 짧구나."
"일기를 쓰게 해 다오."
"일기?"
"그렇다, 일기."
"큭, 풉, 푸하하하하하!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구나!"
"제발…… 부탁……한다."
내 진지함 때문이었을까?
놈이 광소를 뚝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이내.
"놈의 포승줄을 풀어 줘라."
무슨 생각에서인지 수하들에게 그리 명령을 내렸다.
글쟁이라서 그런가?
모르겠다.
난 서둘러 위산에서부터 이곳의 일까지의 일들을 빠르게 기록했다.
"하나 더! 하나만 더 들어줘라."
"말이…… 계속 짧다."
"제갈세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
"금 소저를 살려 줘라. 극혼검왕의 말대로 아미파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지 않은가?"
그러고 싶었다.
내가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풉, 금예지? 저 계집을 죽인다고 우리가 왜 아미파와 척을 져? 하하하! 웃기지도 않는 놈일세."
"금 소저가 아미파의 제자임을 모르는가?"
"이봐, 현화문의 마악치."
"……."
"지금 본가에 누가 와 있는지 아나? 저 계집의 사저들. 소포검화 임하령이 와 있다고. 내 조카, 본 세가의 소가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금예지에 관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더니, 몸까지 덜덜 떨며 제발 없애 달라고 사정을 하더군, 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금예지, 우리들의 첫사랑이 슬피 울고 있다.
나 때문에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죽게 된 그녀다.
이 내용까지 기록 후, 나도 죽었다.
이것이 나의 열아홉 번째 죽음이었다.
그리고 나.
이번엔 진짜로 화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