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56화 (56/245)

56화

포위다.

객잔을 중심으로 무당파 도사들이 겹겹으로 우릴 포위했다.

우릴 맞이하려 했다면, 굳이 객잔을 포위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미치겠군.

제갈세가의 삼장로 제갈세진이 분명하다.

백우선을 들고, 영락없이 그 외양이 제갈공명이다.

그 뒤로 제갈세가의 무인이 스무 명가량 더 있다.

최악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무당파의 영역에서, 그것도 무당파 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놈이 우리를 무력으로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천 형, 아무래도 천 형이 나서 줘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마 형.

천무휘가 선두로 나섰다.

아무래도 명성이 있는 천무휘가 나서는 것이 불리할지 모를 이 상황에 그나마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무리의 수장으로 보이는 무당파 도사를 향해 포권을 하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천무휘라고 합니다."

"오! 그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수룡검 천무휘 소협이었군. 반갑네. 나는 무당파의 사장로 운면이라 하네."

아직까진 괜찮다.

천무휘를 상대로 매우 호의적이다.

역시, 녀석을 내보내길 잘했다.

"부끄럽습니다. 저야 아직 무명소졸에 지나지 않는 후기지수일 뿐입니다. 무당파의 칠성우사(七星遇師) 운면 도장님의 명성에 비한다면 태양 아래 반딧불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뛰어난 무공에 대해서 귀가 따갑게 들었거늘, 그 마음의 수양과 겸손함이 무공을 뛰어넘는 훌륭한 인재로구나, 허허허."

좋다.

분위기 좋아.

계속.

계속 이렇게만 가자.

"그런데 천 소협."

"네, 운면 도장님."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

분위기 좋다가 갑자기 왜 이래?

사장로 운면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시선이 바로 옆에 있는 제갈세진에게로 향했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의 제갈세진.

그는 대뜸 호통부터 쳤다.

"네 이놈!"

적반하장이군.

"아직도 네 죄를 실토하지 않으렸다!"

천무휘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릅떠 제갈세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제가 하려는 말을 제갈 장로께서 역으로 하시는군요."

"뭣이! 네놈이 작은 명성을 얻었다 하여,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적반하장이라고 하더니. 제갈 장로께선 어찌 이토록 무모하십니까? 또, 부끄러움이란 걸 모르십니까? 순양자 대협의 비동을 무당파 모르게 파헤친 것도 모자라, 지금 무당파 도사님들을 이곳까지 불러 무엇을 하자는 속셈입니까!"

순간 무당파의 사장로 운면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또 의심 가득한 눈으로 옆의 제갈세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제갈세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분노한 얼굴로 천무휘를 향해 소리쳤다.

"네 이놈! 순양자 대협의 무덤을 발견한 것은 본 세가가 맞다. 그런데 비동이라니? 낡고 작은 무덤이니라! 또한! 그곳에서 순양검을 발견해 이를 무당파에 보내려 했던 본가의 고수들을 네놈들이 죽이지 않았더냐! 순양검을 탐해 사람의 목숨까지 해하다니!"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저걸 노렸던 거였어.

아! 진짜 무림이란 곳은 왜 항상 이따위로 흐르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무림을 영원히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제갈세진은 멈추지 않고 곧바로 운면 도장을 향해 말을 이었다.

"저것 보십시오, 운면 도장님.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순양자 대협의 무덤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음…….

운면 도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천무휘를 의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제갈세진이 우리를 만나기 전 이미 운면 도장에게 상황을 거짓으로 꾸며 말한 듯했다.

"천 소협."

"억울합니다, 운면 도장님. 저는 보지 못했지만, 여기 금 소저가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굉장한 진법이 설치된 비동이라고 했습니다."

운면의 시선이 금예지에게로 향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금예지는, 무림의 기라성이라 할 수 있는 운면과 제갈세진의 시선이 자기에게 닿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는 잠시뿐이었다.

곧 호흡을 가다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천무휘 옆에 자리했다.

"아미파의 속가제자 금예지라고 합니다."

"음…… 아미파에서 소봉황(小鳳凰)을 숨기고 있었군."

그는 진실보다는 금예지의 경지를 보며 감탄했다.

한눈에 금예지의 경지를 꿰뚫어 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더 불안했다.

지금 상황, 우리에게는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이다.

목숨이 걸린 상황이다.

무당파의 입장에서도 당연히 순양자에 관련한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왜?

금예지란 걸출한 후기지수를 두고 감동할 만도 하지만 상황이 지금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엄중하지 않은가?

"금 소저가 보았다고?"

"네. 이를 지켜본 지 보름이 넘습니다. 분명 커다란 비동이었고, 칠십여 명의 흑의 무사들이 경계를 섰습니다. 또 여덟 명의 진법가와 술사 복장을 한 자들이 비동의 진법을 해진 하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옆에 계신 제갈세가의 삼장로님도 사흘에 한 번꼴로 현장을 찾아온 것까지 목격하였습니다."

운면 도장이 습관처럼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금예지가 더욱 힘을 내어 말을 이었다.

"순양검 외에 더 있었습니다. 비동에서 녹슨 철전 몇 닢과 한 권의 낡은 서책을 꺼내는 것을 분명 목격하였습니다. 저희는 이 사실을 알리고 또 순양검을 전달해 드리기 위해, 밤낮을 달려 무당파로 향했던 것입니다."

천무휘가 말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운면 도장님. 만약 저희가 순양검을 탐내 제갈세가의 무인을 죽였다면, 어찌 무당파로 도주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지금 이 길이 바로 위산에서 무당산으로 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음…….

또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

그러면서도 천무휘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인다.

된 건가?

모르겠다.

저 늙은 도사의 속을 좀처럼 알 수 없다.

하지만 제갈세진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심계가 깊거나 허장성세, 둘 중 하난데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때 고심하던 운면이 드디어 입을 뗐다.

"우선 순양검을 볼 수 있을까?"

아 씨.

광마일기에 지금 상황 적고 있었는데.

우리 녀석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자, 다시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난 서둘러 광마일기와 각혼필을 수습한 후, 허리에 맨 검을 검집째 통으로 풀어 천무휘에게 건넸다.

내게 순양검을 받은 천무휘가 이내 운면 도장에게 다가가 이를 건넨 후 자리로 돌아왔다.

한참이나 순양검을 뚫어지게 살피는 운면 도장.

그도 처음 보는 검일 테다.

검집에 순양검이란 글이 적혀 있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내.

스르릉.

검을 뽑았다.

그 현묘하면서도 예리한 기운이 순간 장내를 뒤덮었다.

곧 무당파 도사들의 여기저기서 얕은 감탄성이 새어 나왔다.

"본 파의 검이 확실하군. 순양자 선조님의 순양검이 맞다."

운면 도장의 말에 다시금 술렁이는 무당파 도사들이었다.

무당파의 삼대보검 중 하나를 찾았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문제는, 그들이 감탄하건 말건 우리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제갈세진은 여전히 여유로운 상태였고.

계속 불안하기만 하다.

"누구신가? 함께 있는 소협들은?"

운면 이 말코도사 새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뭐가 저렇게 여유로워?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화가 나고, 짜증 나고, 불안했다.

하지만 윗 항렬, 그것도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무당파 도사의 물음이다.

천무휘가 간신히 화를 누르며 우리를 소개했다.

"이분은 남창 우각당의 당주 곽우적 소협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절강에서 홀로 활약하던 한해북 소협입니다."

"허허, 천 소협."

"네, 운면 도장님."

"소협이란 말은 천 소협 한 명으로 족하네."

"하지만…….

발끈하려는 천무휘.

그의 손을 내가 잡았다.

이내 화를 삭이는 그였다.

무시였다.

운면이 지금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

찢어 죽일 말코도사 새끼.

난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

지금 이 상황, 이미 제갈세진과 저 말코도사가 사전에 모두 계획한 상황이다.

저들의 뜻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광천마제 시절 무당파의 장문인 뺨을 내가 아홉 대 후려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홉 대가 아니라, 구천구백구십구 대를 후려갈겼어야 했다.

지금 너무 화가 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이분은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님이십니다."

"현화문?"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현화검존께서 몸담고 계셨던 그 현화문이 맞습니다."

무당파 도사들이 다시금 술렁거렸다.

운면 이 말코도사도 이번엔 꽤 놀란 얼굴을 했다.

그건 제갈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우리 현화문이 사기적으로 대단한 문파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까지 이렇게 유명할 줄은 몰랐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던 게, 그나마 조금 잠잠해졌다.

어깨도 살짝 으쓱해졌고.

"그렇군."

말코도사 이 새끼!

방금 엄청 놀란 얼굴 한 거 다 봤는데.

애써 폄하하려 저렇게 짧은 말로 끝내 버린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본 도사는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히기 어렵군. 순양검을 돌려준 것에 대해 누구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비급! 순양자 대협의 비급이 있다고 금 소저가 말했습니다!"

천무휘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를 보는 운면의 얼굴은 냉랭하기만 했다.

역시 맞다.

짜고 치는 도박판이다.

제갈공명의 후손과 무당파의 도사가 말이다.

"그 또한 진실인지 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아미파의 제자입니다. 어찌 거짓을 고한단 말입니까?"

"금 소저는 아미파의 속가제자고, 여긴 제갈세가의 삼장로시네. 현검공명(玄劍孔明)이란 별호까지 얻으신 분이시고. 내 사안이 중요함을 알기에 최대한 그 명성을 뒤로하고 객관적으로 보려 애쓰는 중이네, 천 소협. 괜히 배경을 들먹여 좋을 것이 없다네."

"하, 하지만…….

천무휘는 아직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나 보다.

억울함에 어깨까지 들썩인다.

하지만 난 아니다.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괜찮다.

왜?

죽지 않고 살면 된다.

그러면 뭐든 할 수 있다.

그리고 난 죽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천무휘가 있고 금예지가 있기 때문이다.

제갈세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백주대낮에, 그것도 무당파의 앞마당에서 화산파를 뒷배로 하는 천무휘와 아미파의 제자인 금예지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뭐, 나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은 덤으로 사는 것이고.

덤이면 어떻고 꼽사리면 어떤가?

사는 게 중요하지.

복수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

제갈세가와 무당파를 송두리째 뽑아 불살라 버릴 테다.

아! 나쁜 마음을 먹으면 안 되는데.

아무튼 이번엔 죽지 않는다고 난 확신한…… 젠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엄청난 속도로 뿌연 먼지까지 뿌리며 말을 몰아 다가오고 있다.

그들의 가슴에 매화 문양이 새겨있다.

화산파다.

그리고 선두에, 한 노도사와 함께 빌어먹을 계집이 있다.

천예휘다.

이히히히히잉.

천예휘와 스무 명가량의 화산파 도사들.

그중 천예휘 옆에 있는 노도사의 신분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그는 무당파의 운면이나 제갈세가의 제갈세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천무휘 앞으로 말을 몰아 왔다.

아니, 그가 말을 몰며 다가오자 운면과 제갈세진은 놀란 얼굴까지 하며 길을 내주었다.

"소제 천무휘가 숙부님을 뵙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무휘가 숙부라 부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화산파의 일장로 극혼검왕(極魂劍王) 범철승.

화산제일검이다.

그리고 그가 바로, 광천마제 시절 나에게 칼빵을 아흔여덟 방이나 먹일 수 있게 천예휘를 가르친 사부다.

다시 그가 바로, 천무휘와 천예휘의 사망한 아버지 천개혁의 의형이다.

"화검천가의 가주 천무휘에게 본산의 명을 전한다. 천무휘는 즉시 화산으로 귀환하여 종파의 일을 돕도록 한다."

"숙, 숙부님!"

"어헛! 지금은 숙부가 아닌 본 파 장문인의 지엄한 명을 전하는 신분이다. 어서 무릎을 꿇고 영지를 받들지 못할까!"

좆됐다.

첩첩산중이다.

천무휘가 떠나면, 금예지만 남는다.

십 할 살 수 있었던 가능성이, 딱 절반으로 줄어들게 된다.

아! 미치겠네.

정말, 정말로 이 상황 때문에 돌아버리겠다.

하늘이시어.

진짜 저한테 왜 이러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