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한 달.
한 달에 며칠 더 남았다.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갈취무를 제압할 힘을 키워야 한다.
그의 여덟 그림자까지 상대해야 한다.
나머지 일백 명도.
휴우.
쉽지 않겠군.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우린 절정 고수가 셋이다.
나, 천무휘, 금예지.
심지어 나의 내공은 이 갑자가 넘는다.
심토만력근을 섭취하지 않았는데도 이 갑자의 내공이 된 것은, 역시나 회귀와 연관 있을 테다.
또 내가 현경의 반열에 오른 후 회귀한 것이고.
단전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않았고, 이 갑자의 내공은 내가 원하는 순간 대자연의 기운이 순식간에 내 몸으로 쏟아져 생성된다.
심토만력근과 전혀 상관없는 대자연의 기운이다.
그 이상의 기운을 운용하려면?
역시 작은 사부 말이 맞았다.
그 이상의 기운을 끌어다 쓰려면, 지금 이상의 경지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계속, 한 걸음씩 나아갈 테다.
그것을 다 떠나, 지금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미 나는 고수 경지의 시절, 압도적인 내공으로 절정 고수였던 천무휘와 싸워 이겼다.
제갈취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한 달 사이 절정의 끝자락에 도달할 것이 분명한 천무휘가 있고, 절정의 초입인 금예지까지 돕는다면, 제갈취무는 물론 여덟 그림자까지 합세해도 우리가 이길 확률이 더 높다.
나머지 떨거지 일백은 일단 의제와 한해북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고.
됐다.
할 수 있다.
아니, 꼭 해내야만 한다.
제갈취무의 입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이다.
더불어, 금예지의 이름만이 아닌 진짜 그녀가 누군지도 알고 싶다.
꼭, 성공할 테다.
호북 위산으로 출발이다!
* * *
위산에 도착해 미친 듯 무공을 수련했다.
잠까지 줄여 가며 한 수련이다.
왜 이렇게까지 수련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 제갈취무와 싸워야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천예휘 사건을 통해 나에 대한 이들의 신뢰는 이미 절대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지난번보다 확실히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날.
"어? 몸…… 몸이 이상해요."
툭.
한해북이 가장 먼저 쓰러졌고, 그다음은 의제, 곧 천무휘까지 쓰러졌다.
난 역시나 제일 마지막에 쓰러졌다.
"큭큭큭큭, 제대로 중독됐군."
흑의를 입고 손에 칼을 든 스무 명가량이 수풀 헤치며 나타났다.
"지금입니다!"
내 외침.
곧바로 쓰러진 척했던 천무휘, 의제, 한해북이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 스무 명에 달하던 적들이 모두 시체가 되었다.
설마설마했던 천무휘 등은, 막상 진짜 적들이 나타나고 그들을 제거하게 되자 놀라고 흥분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는 샘물을 마시는 척만 했다.
적들이 지켜보고 있었겠지만, 어차피 하수들이다.
그들의 눈을 속이는 일 따위는, 나나 천무휘는 물론 의제와 한해북에게조차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
"형님, 진짜로 놈들이 나타났…….
내가 손을 들어 살짝 흥분한 상태로 말을 잇던 의제를 제지했다.
이내 셋 모두 기감을 모두 끌어올려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숨었을 그녀를 녀석들이 감지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테다.
사실 나도 아까부터 기감을 풀어 살피고 있었는데도 그녀의 기운을 감지할 수 없다.
쪽팔리니 내색하지 말자.
"나오시오! 근처에 계신 것 다 압니다."
모른다.
모르지만 고수인 척, 아는 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사삭.
그녀, 한 손에 검을 든 그녀가 수풀을 헤치며 등장했다.
우리 세 녀석, 당연히 잔뜩 경계를…… 안 한다.
미친!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잖아!
조금 전 스무 명의 목을 벤 놈들이, 왜 경계를 안 해?
심지어 남장 여인이라고!
수상하잖아!
하지만 이 녀석들, 그냥 헤벌레하고 그녀를 볼 뿐이다.
돌겠다.
뭐, 내가 봐도 귀엽고 예쁘고 깜찍하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전 독에 기습까지 당할 뻔한 녀석들인데.
휴우.
됐다.
넘어가자.
"저…… 다들 괜찮으세요? 저들이 샘물에 독 타는 것을 분명 보았는데."
염려 가득한 얼굴로 우릴 보는 금예지.
당연히 내가 나섰다.
그것도 멋진 모습으로.
"일단 자리를 피하시죠. 저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몰려올지 모르니까요."
말을 마친 나는 금예지의 답도 듣지 않고 몸을 날렸다.
안 따라오면 개쪽인데.
난 앞으로 달리면서도 신경은 온통 뒤쪽으로 향했다.
다행이다.
그녀가 내 뒤를 따라온다.
우리 세 녀석.
그녀가 움직이니 그제야 신법을 발휘한다.
빌어먹을 녀석들.
* * *
"현화문의 마악치라고 합니다."
"네."
나름 안전하다고 한 곳까지 자리를 옮긴 후 정식으로 그녀에게 내 소개를 했다.
짧게 답하는 그녀.
하지만 곧.
"네? 현화문이요? 혹시……?"
"네, 맞습니다. 우리 형님께서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현화검존의 현화문, 그 도문의 도사님이십니다."
의제, 아까 욕한 거 미안하다.
의제가 나에 대해 추가 설명을 덧붙이자 첫사랑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난 순간 기분이 좋아 입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정말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전 천무휘라고 합니다."
"아! 칠룡사봉의 수좌라는 수룡검 천무휘 대협이셨군요."
이런 젠장.
나보다 아주 쬐끔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얼굴 때문인가?
이어 의제와 한해북까지 자기소개를 마쳤다.
"전…… 저는…….
그녀가 갈등한다.
자신의 신분을 노출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다시 내가 나섰다.
"저희는 그 어떤 이유도 모릅니다. 왜 저들이 우리 샘물에 독을 탔고, 또 우리를 공격하려 했는지요. 지금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소저께서 신분을 밝히지 않으신다면, 저희와 함께 움직일 수 없습니다."
거짓말이다.
신분 안 밝혀도 함께할 것이다.
그냥, 그녀가 누군지 너무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조금은 수줍은 듯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뗐다.
내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순간…… 이런 젠장!
세 녀석!
입 좀 다물라고!
나를 포함 네 명이 다 그런 얼굴로 쳐다보면, 그녀가 민망해할 수 있잖아!
아니, 그보다!
바보 넷이 모인 거 같잖아!
의제, 침 닦아!
"저 실은…… 여자에요."
다 안다.
나를 포함 우리 넷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우리들의 당황한 반응을 오해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보였다.
자신의 남장(男裝)이 우리에게 먹혔다고 착각했나 보다.
"금예지라고 해요. 아미파의 속가제자입니다."
"아……."
"아……."
거의 동시에 우리 네 사람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 나왔다.
물론, 실태를 깨닫고 곧 입을 닫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미파라고?
아미파가 이곳에 있는 것이야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그녀의 무공 경지다.
광마일기에도 그렇게 적혔고, 지금 내가 봐도 정확히 절정의 초입이다.
후기지수들 가장 잘나간다는 칠룡사봉.
그중 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는 천무휘 한 녀석뿐이다.
나머지는 죄다 고수급이다.
광천마제가 된 후 금예지를 수소문하며, 또래에 관한 조사를 상세히 한 내용을 광마일기에 모두 기록하여 알 수 있다.
심지어 아미파에는 칠룡사봉 중 사봉에 속하는 유명한 여인이 있다.
소포검화(少抱劍花) 임하령.
그녀 또한 스무 살가량의 나이로 고수의 경지라 알려졌다.
그런데 왜?
임하령보다 강한 금예지의 이름이 어떻게 알려지지 않을 수 있을까?
속가제자라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화산파만 봐도 그렇다.
천무휘 녀석은 화산파의 본산제자도 아니고 속가제자도 아니며, 그 조상 중 한 명이 화산파에 잠시 몸을 담갔던 속가제자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산파에서는 천무휘를 자신들이 직접 키운 제자인 것처럼 떠벌리고 다닌다.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고강한 후기지수를, 아미파에서는 왜 알리지 않은 것일까?
"제 경지가 얕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금 소저의 경지가 범상치 않은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금 소저의 별호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궁금해하던 것.
그것을 수룡검이 대신 물어봐 주었다.
금예지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을 해 주었다.
"별호 같은 건 원래 없어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혹시 아미파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고수 같은 그런 신분이십니까?"
천무휘가 다시 물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전 그냥……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사저들이 워낙 열심인지라…….
뭔가 있다.
분명 뭐가 있어.
아직 여유가 충분히 있다.
일단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까?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아셨고요?"
"그게…….
"금 소저,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한 치의 숨김없이 말씀해 주신다면, 적들과 대면했을 때, 제 등을 믿고 맡기겠습니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 살짝 커졌다.
뭔가 엄청나게 감동한 얼굴이다.
내 얼굴이 잘생겨 보이나?
큭큭큭.
어쩌면, 등을 맡기겠다는 동료가 처음이어서 그런 것일까?
전자이길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다.
"네, 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그녀가 결단한 얼굴을 하고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심장이 다시 떨려 온다.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광천마제 시절, 그렇게 간절히 찾아 헤매도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실체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사부님 덕분에 처음으로 아미산을 하산하여 임무를 맡게 되었어요. 다들 아실 거예요. 소포검화 임하령이라고요."
"알다마다요. 칠룡사봉 중 사봉에 속한 아미파의 여고수 아닙니까?"
한해북이 나와 천무휘에게 질세라 아는 척을 했다.
"네. 임하령 사저가 수장이 되어 총 넷이 하산을 했어요. 남궁세가에 서신을 전하는 간단한 일이었죠."
사천에 있는 아미파와 안휘에 있는 남궁세가를 오가려면 이곳 호북 땅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남궁세가에 서신을 전한 후 아미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저께서 저에게 임무를…… 주셨어요."
"금 소저에게만요? 다른 제자들은요?"
이건 의제가 물은 것이다.
"그게, 꼭 제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며…….
얼굴까지 살짝 붉어지며 조금은 난처한 얼굴을 하는 금예지.
나는 물론 우리 넷은 이때부터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산에서 내린 임무가 아닌, 임하령 여협이 소저에게 개인적으로 내린 임무였나요? 금 소저 한 사람에게만요?"
이젠 풀이 잔뜩 죽었다.
금예지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살포시 끄덕였다.
"무슨 임무였는데요?"
"이곳 위산에 대정화(大靜花)라는 꽃이 필 시기라고 했어요. 산의 꼭대기 봉우리에 피는 꽃으로, 대정화가 만개했을 때 그 뿌리에 대자연의 기운이 쏠린다며, 그것을 캐어 사문으로 복귀하라는…….
"위산에 몇 개의 봉우리가 있는지 아십니까?"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으며 의제가 연이어 물었다.
금예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몇 개의 산봉우리에 올랐습니까?"
"서른두 개……요."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한해북이 나섰다.
"따돌림……입니까?"
한해북의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런 질문.
금예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알 것 같았다.
나와 우리는 그녀가 왜 이곳에 홀로 떨어져 있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오로지 전진밖에 모르는, 달리 말하면 불같은 성격의 의제가 발끈하여 나섰다.
아! 물론 의제는 내 앞에서 항상 고분고분하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던 것처럼.
하지만 일단 이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우각당 악당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의제 되시겠다.
"천하의 아미파에서 따돌림이라니! 내 절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당장 아미파로 가시죠! 제가 가서 아미파 장문인을 만나 따져야겠습니다! 금 소저를 따돌림한 임하령을 비롯한 제자들에게도 큰 벌을 주라 할 것이고요!"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분명 무언가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
간절하게 말렸다.
금예지는 의제의 팔까지 두 손으로 꼭 잡으며 그렇게 간절한 얼굴로 말렸다.
이에 버럭 성질을 내던 의제가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이 녀석아, 얼굴은 왜 빨개지고 그래!
그나저나 부럽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천무휘와 한해북도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군요?"
다시 한해북이 제법 어른스러운 분위기로 물었다.
그러자 다시 풀이 죽은 금예지가 갈등하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 주세요. 우린 이제 동료잖아요."
갈등하는 그녀를 향해 내가 쐐기를 박았다.
그녀가 이내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갓난아이였을 때 아버지를 잃었어요. 어머니 홀로 저를 키우셨어요. 여자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이 시대에는 정말 힘든 일이잖아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저희 집이 아미산 자락에 있어요. 어머니께서는 거의 매일 아미산을 올라 아미파의 측간을 돌며 인분(人糞, 사람의 똥)을 퍼 산을 내려왔어요. 그것을 거름으로 만들어 밭에 뿌리면 굶을 걱정하지 않을 만큼의 돈을 벌 수 있거든요. 저도 예닐곱 살이 될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아미산을 올라…….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나와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두 주먹만 불끈 쥐며.
입술을 꾹 깨물고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가며.
그렇게 마음으로 울고 울고 또 울며 그녀의 서글픈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