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이상한 동굴에서 깨어났다.
광마일기를 읽었다.
아아아아아!
왜!
도대체 왜!
그녀를 멋지게 구했어야 했는데!
난 첫사랑의 영웅이 돼야 했다고!
그랬는데 왜!
왜 그 이후의 기록이 없냔 말이다!
돌겠네, 정말.
문신!
문신을 찾아야 한다.
난 서둘러 뽀얀 내 살의 구석구석을…… 아! 찾았다.
그런데, 네 글자가 아니다.
적포초절(敵包超絶, 적중에 초절정 고수가 있다).
원생실사(原生實事, 광천마제 시절의 진실은 이러했다).
초련당백(初戀當百, 첫사랑은 홀로 일백의 적을 상대했다).
위아독희(爲我獨犧, 우리를 살리기 위해 홀로 희생했다).
난 그녀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 오두막 문을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적들을 보며 자신만만하면서도 멋진 미소를 지었겠지.
그다음은, 그냥 죽었나 보다.
초절정 고수한테.
개쪽팔린 일이다.
잘난 체하려다 뒈졌는데, 어찌 쪽팔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데, 그런데! 지금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쪽팔림 때문이 아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첫사랑, 금예지 그녀를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흐른다.
* * *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심각한 얼굴의 그녀가 나를 보았다.
"맡기시오. 이제부터 내가 상대하겠소, 하하하하!"
난 그런 그녀를 향해 주먹으로 내 가슴까지 쾅쾅 치며 힘 있게 대꾸했다.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자신감이다.
캬!
내가 생각해도 멋지다.
난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오두막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쾅!
문을 발로 쾅 차서 날려 버렸다.
역시나.
일백이 넘는 적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난 다시 세 걸음 앞으로 나아가 나를 향해 병장기를 겨누고 있는 적들을 쭉 둘러보았다.
샘물에 독이 탔을 때 우리를 습격하려 했던 놈들보다 훨씬 고수인 놈들이 우글거린다.
갑자기 가슴이 아려 온다.
광천마제 시절,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와 의제를 살리기 위해 저 많은 고수와 홀로 싸웠으리라.
그 생각을 하니 울컥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눈물을 흘릴 순 없다.
적들이 나를 우습게 볼 것은 염려하지 않는다.
곧 죽을 놈들이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녀가 오해해 두려운 마음을 품을까 하는 것이다.
난 쏟아지려는 눈물을 꿀꺽 삼키고, 환한 미소까지 지으며 뒤를 돌았다.
"소, 소협…….
"여기서 지켜보고만 계세요, 금 소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말끝에는 한쪽 눈까지 깜빡거려 더 큰 자신감을 보여 줬다.
그녀가 웃는다.
이제 그녀도 나를 믿는 것이다.
난 다시 적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수룡검을 통해 얻은 신검합일과 절정의 깨달음.
거기에 이 갑자가 넘는 현화승천신공을 기반으로 한 내공.
또 있다.
계효보가 그랬듯, 나에겐 무적 할매와 작은 사부를 통해 얻은 대해와 같은 무학과 무리가 녹아 있다.
이 모든 것을 꺼내 적들을 물리치리라.
"소협! 조심하세요!"
퍽!
쿠당탕탕탕.
결의를 다 다지는 순간.
금예지가 큰 소리를 치며 나를 밀쳤다.
그리고 곧.
웬 노인의 검이 그녀의 목을 베고, 조(爪)가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뭐야?
이내.
"놈들이 더 있다! 샅샅이 수색하라!"
오른손엔 검을, 왼손엔 한 척이나 되는 독수리 발톱 모양의 조를 착용한 노인의 외침.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내, 적들이 우르르 오두막으로 몰려 들어갔다.
남은 노인.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용서할 수 없다.
내 첫사랑을 죽인 놈이다.
난 일시에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려, 쓰러진 상태에서 곧바로 도약해 노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아! 젠장.
노인 하나가 아니었다.
내가 노인에게 몸을 날리는 순간.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갑자기 여덟 놈이 튀어나와 나를 공격했다.
간신히 몸을 틀어 그들을 막았는데, 그사이 노인의 조가 내 등을 찔러 가슴으로 튀어나왔다.
스으으으윽.
내 몸에 힘이 빠지며, 관통한 조가 저절로 몸에서 빠져나왔다.
쿵.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 나.
우연일까?
내가 쓰러진 바닥, 내 앞에 그녀가 입으로 연신 검은 피를 쏟아 내고 슬피 울며 나를 보고 있다.
"샅샅이 찾아라! 세 놈이 더 있다!"
놈들은 나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곧 죽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 어떤 관심도 두지 않았다.
오두막 내부를 수색하는 놈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찾았습니다! 지하로 연결된 통로가 여기 있습니다!"
놈들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난, 오른 소매에 있던 각혼필을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문신을 새겼다.
여전히 검은 피를 토해 내며, 고통 속에 죽지도 못하고 나를 바라보며 울기만 하는 그녀.
난 그녀의 그 서글픈 얼굴을 보며 울고 또 울고, 눈물을 마구 흘리며 문신을 새겼다.
한 글자라도 문신을 더 새기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그녀를 향한 나의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적들을 향한 나의 분노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모두 쓸 때까지 나의 죽음마저 미루게 하였다.
이것이 나의 열여섯 번째 죽음이었다.
* * *
일검일조(一劍一爪, 한 손으론 검을 한 손으론 조를 쓴다).
암수팔영(暗隨八影, 그에겐 여덟 명의 그림자가 따른다).
총 스물네 글자다.
이번엔 죽을 때 여유가 좀 있었나?
아!
기억이 없으니 미치겠네.
도대체 죽을 때 어떻게 죽었지?
그녀 앞에서 창피하게 죽진 않았겠지?
젠장.
기억은 없는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또, 조금 전 멈추었던 눈물이 조르르 다시 흐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내가 자만하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다시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가만, 그녀가 죽었을까?
음, 죽었을 테다.
내가 광마일기에 아무것도 적지 못할 상황이었으면, 그녀와 내가 힘을 합쳐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적들이란 뜻이다.
초절정에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조를 쓰는 고수라.
조합이 매우 특이하다.
심지어 그 주변엔 여덟 명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누구지?
광천마제 시절의 나는 천하의 고수들, 특히 초절정급의 고수들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걸 일일이 광마일기에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아마 광천마제 시절의 나였다면, 이런 특이한 조건을 보고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의 난 아니다.
머리가 하얀 도화지 같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무림의 기본 상식 같은 건 광마일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안다.
이건 그냥 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다.
마치, 내가 광천동에서 깨어나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데 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어쨌거나 기본적인 무림의 상식 외에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기억도, 지식도 없다.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겠군.
광천마제 시절의 내가 주화입마에 빠져 상단전이 손상되었고, 현경의 반열에 오르자마자 그것을 제대로 치료하기 전에 회귀했을 테니.
지금으로선 이 가능성이 가장 확실하다.
휴우.
다시 시작이다.
이번엔, 자만하지 않겠다.
그녀를 또 죽게 만들 수는 없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완벽한 계책을 수립한다.
남창 만리현에서와 같이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 * *
알몸으로 사문으로 뛰어갔…… 사부에게 삼재검법을 가르쳤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그놈들이 찾아오는 날이다.
구산사괴.
올까?
오지 않을까?
온종일 마당을 홀로 걸으며 초조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구산사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행이다.
성공했다.
놈들이 개과천선했는지는 어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놈들의 몸에 새긴 문신으로 인해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디, 어디에 살건 착하게 잘 살길 바란다.
이건 진심이다.
* * *
"모르오."
"몰라? 모른다고요?"
"그렇소. 모르오."
쓰윽.
난 더러운 멍석 위에 놓인 오리구이 한 마리와 화주 두 병을 슬쩍 놈에게 밀었다.
개방 허창 풍평분타의 분타주 아갈개(娥渴丐)는 물론, 그 주위에서 몰려 우리의 대화를 구경 중인 거지 녀석들까지 침을 꼴깍꼴깍 넘기고 있다.
하지만 끝내 오리구이와 화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투투투툭.
철전 오십 닢까지 멍석 위에 던지듯 놓았다.
아갈개의 눈동자에 지진이라도 난 듯하다.
그래도 놈은 꿈쩍하지 않았다.
미친!
거지 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뭐가 잘못된 거야?
내가 이상한 곳으로 회귀했나?
거지가 오리구이와 화주 그리고 돈을 거절해?
"이보십시오, 분타주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라니. 우리 언제 본 적 있소?"
"아, 그건 아니지만. 아니, 개방에 정보 좀 의뢰하는데, 이렇게 후하게 정보비를 내는 사람이 어딨다고 계속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십니까?"
"값, 값이 안 맞소."
"뭐라고요? 한 손에는 검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조를 쓰는 초절정 고수. 그리고 그 주변에는 여덟 명의 그림자가 따라붙는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렇게 특징이 확실한 사람을 찾는데, 값이 안 맞다니요?"
"어험, 그만 오리구이랑 술이랑 돈 가지고 가 보쇼. 안 맞는 건 안 맞는 거니까."
"나 원 참.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무 무림인이나 잡고 물어봐도 누군지 알려 줄 만큼 그 특징이 너무 독특하고 분명한데 말입니다."
"그럼 아무 무림인이나 잡고 물어보시든지. 얘들아, 손님 가신단다."
"네? 아, 네."
오리구이랑 화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거지 몇 놈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놈들도 나를 보내야만 하는 게 매우 안타깝다는 얼굴들이다.
분명 아는데, 알려 주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대체 누군데 내가 먹다 남긴 오리구이도 아니고 통 오리구이에 화주까지 두 병 곁들였고, 거기에 철전 오십 닢이나 건넸음에도 값이 안 맞는다는 거야?
아! 돌겠네.
난 결국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하고 거지 소굴을 나와야 했다.
환장하시겠다.
돈 없고 힘없는 서러움을 다시금 뼛속까지 느끼는 순간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혹시나 해서 구산사괴를 열흘이나 더 기다렸다.
사부의 기감을 통해 주변 산들도 샅샅이 감지했다.
그들은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사부의 허락을 받은 후 갑돌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며칠 다녀온다니, 사부가 은자 한 냥과 철전 오십 닢을 내게 주었다.
사문의 전 재산이다.
허창 풍평현까지는 걸어서 사흘이 걸린다.
그나마 갑돌산에서 가장 가까운 제대로 된 정식 개방 분타다.
예전에도 이미 그곳에서 정보를 산 적이 있었다.
내가 먹다 남은 오리구이 반 마리를 건네자 황제가 입은 속옷 색깔까지 죄다 털어놓을 기세였다.
그런데 오늘!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까지 오는 사흘 동안 돈 좀 아낄 걸 그랬다.
오리 한 마리에 화주 한 병, 그리고 철전 오십 닢이면 녀석들에게 정보를 사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는 길에 먹고 싶은 것도 사 먹고, 술도 좀 마시고.
싸구려 객잔이지만 독방에서 잠도 자고.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그래도 충분할 것이라 여겼는데.
실패다.
뭐지?
무림을 통틀어도 그렇게 독특한 조건을 갖춘 고수는 없을 텐데.
심지어 초절정 고수다.
천하를 다 뒤져도 초절정 고수가 몇 명이나 있겠냔 말이다.
당연히 유명 인사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아! 돌겠네.
거지들이 그놈에 대해 아는 게 확실하긴 한데, 도대체 정보값이 얼마인 거야?
서럽다.
무공만 있었어도, 그냥 산으로 냅다 뛰어들어 가 호랑이 한 마리 잡아서 시전에 내다 팔면 돈 좀 만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의 난 무공이 없다.
내공도 없다.
수룡검을 만나야 다시 절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산에 가면, 내가 호랑이를 잡는 게 아니라 호랑이가 날 잡아먹을 것이다.
뭐, 조금 더 기다린다고 당장 큰일 날 일은 없다.
문제는,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지.
사부와 유람을 떠날 때까지 참아야 하는데.
아니, 그때까지 궁금해서 못 참을 것 같다.
그래서 사흘이나 걸려 거지 소굴을 찾아왔는데, 안 알려 준다.
정보 값이 안 맞는다고.
빌어먹을 거지새끼들!
"도사님."
내가 속으로 거지 놈들을 마구 욕하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아! 맑은 눈망울을 가진 어린 거지다.
그냥 딱 봐도 순진하고 착한 소년이다.
조금 전에 속으로 거지들을 싸잡아 욕한 내가 너무 미안하다.
"어험, 네, 거지님. 아니, 죄송합니다. 개방의 소걸개님."
소걸개는 개방의 어린 거지들을 나름 존경해 부르는 호칭이다.
"헤헤, 소걸개는요. 그냥 작은 거지라 불러 주세요. 이름은 구지개입니다."
맑은 눈만큼이나 해맑은 웃음을 짓는 구지개였다.
난 슬쩍 구지개의 손가락을 보았다.
혹시나 해서 봤는데, 역시나였다.
"헤헤, 손가락이 아홉 개뿐이라 방(幇)에서 구지개(九指丐)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손가락이 아홉 개인 게 무슨 잘못도 아닌데요.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도사님께서도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열대여섯이나 됐을까?
나이에 비해 맑으면서도 어른스럽다.
나보다 더 도에 튼 도사 같기도 하고.
"그런데 저를 부르신 이유가……?"
"제가 우리 분타에서는 유일하게 글을 쓰고 읽을 줄 압니다. 그래서 총타와 저희 분타를 오가는 정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럼 혹시……?"
"아!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본 방에 큰 은혜를 입어 충성하고 있습니다. 방규를 어길 수는 없습니다."
"앗,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히 기대를 하게 한 것 같아 제가 더 죄송합니다."
"그럼 저를 찾으신 이유가……?"
"정보의 적정 값을 알려 드리고, 거기에 반값으로 그 정보를 살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조언해 드리려고 따라왔습니다."
아홉 손가락의 소년은 착한 거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