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49화 (49/245)

49화

그녀는 형이다.

우린 그녀를 ‘금 형’이라 불렀다.

그것도 엄청나게 멋있으면서도 예쁜 형이다.

그녀가 바로 나의 첫사랑이다.

아니, 우리 둘의 첫사랑이다.

의제 녀석마저 그녀를 몰래 좋아했었으니.

그 시절, 우리 둘의 첫사랑.

-광마일기 中

나와 의제, 천무휘, 한해북.

우각당을 떠난 우리 넷은 호북으로 향했다.

호북은 무림의 권역으로 볼 때,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그 영역을 양분하고 있는 지역이다.

우리가 도착한 지점은 아무래도 제갈세가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의창 위산이 바로 그곳이다.

위산은 하나의 산이 아닌 수십 개의 산과 수림이 모인 산림지대다.

워낙 산이 많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산에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았고, 그냥 통으로 위산이라 부른다.

그중 한 곳, 깊고 깊은 산중에 우리는 터를 잡았다.

내가 이들을 이끌었고, 거침없이 수풀을 헤치며 도착한 곳이다.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왜 이곳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딱 하나다.

이곳에 있어야 첫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사랑에 대한 애틋함 때문인지, 광마일기에 이곳의 위치와 그 지형 등을 아주 상세하리 묘사해 놨다.

내가 어지간히도 그녀를 좋아했나 보다.

광마일기에 적힌 대로 이곳에 도착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얕은, 그냥 커다란 절벽 아래 작은 큰 공간이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좋을 듯한 동굴 아닌 동굴이 있다.

그 앞에는 넷이 무공을 수련하기 충분한 공터도 갖추고 있고.

공터에서 바라보는 위산의 경치는 수려하고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지점에, 산 위에서 암반을 뚫고 나온 샘물이 조르르 흘러 식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은거지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을 구하기 힘들 듯하다.

묵묵히 내 뒤를 따라 이곳까지 온 의제와 천무휘, 한해북 모두 얼굴에서 만족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곳, 이 장소.

광천마제 시절 나와 의제가 화산파의 추격을 피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광마일기에 따르면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쁘지 않았지만, 딱 하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큰 곤란을 겪었다고 적혀 있다.

소금이다.

노루, 멧돼지, 꿩, 토끼 등등을 잡아 구워 먹었는데, 소금이 없어서 죽을 맛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다르다.

나도 돈이 많지만, 의제는 더 많다.

한해북은 절강에서 딱히 하던 일도 없었다고 했는데, 또 전낭은 두둑했다.

알거지는 천무휘 한 명뿐이다.

원래 천무휘도 돈이 많았는데, 천예휘가 화산파로 떠나는 날 전낭을 송두리째 들고 가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다.

뭐, 상관없고.

아무튼 이번에 위산을 오르기 전, 우리는 인근 마을 시전에 들러 소금은 물론 산중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충분히 구입하였다.

소금에 더해 향신료도 가득 샀다.

확실히 고기를 구워 먹을 때에는 잡내를 제거하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뿌려 줘야 한다.

아! 생각만 해도 벌써 입에 침이 고이는군.

이따가 멧돼지 한 마리 통으로 구워야겠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의 산중 생활이 시작됐다.

동굴 아닌 동굴인 곳에 바람을 막을 벽과 문을 나무를 베어 와 제법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 간이침대도 네 개나 만들었다.

잠만 잔다면, 넷이 충분히 지낼 만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수련에 돌입했다.

칼 찬 남자 넷이 뭐 하겠나?

일어나 수련, 밥 먹고 수련, 똥 싸고 수련, 자기 전에 수련.

수련의 연속이다.

나와 천무휘가 대련하고.

천무휘가 의제의 무공을 봐주고.

내가 한해북의 무공을 봐준다.

다시 내가 의제의 무공을 돕고, 천무휘가 한해북의 무공을 지도해 준다.

계속 이렇게 번갈아 도와가며 우리의 수련은 이어졌다.

의제가 확실히 나와 닮은 구석이 많긴 하다.

광마일기에도 적혀 있지만, 실제 의제와 함께 수련하며 그의 천재적 무재에 몇 번이고 감탄해야 했다.

어려서부터 명문 무가에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 역시 진즉 칠룡사봉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뭐, 어찌 아니겠는가?

훗날 화경의 반열에 올라 무림오대고수에 그 이름을 올리는 의제인데 말이다.

의외였던 것은 한해북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우연인가 싶었지만, 그의 무재 역시 엄청났다.

사문도 없이 홀로 검을 익혀 이십 대의 나이로 일류의 반열에 오른 게 역시 운만 따라서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싶었다.

나이로 따지면 그가 맏이지만, 그는 항상 우리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나와 수룡검이 스물한 살로 동갑.

의제가 우리보다 네 살이 많아 스물다섯 살.

한해북이 의제보다 한 살 더 많아 스물여섯 살이다.

그런 그의 예법이 가끔은 과하다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한 번도 우리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잡일도 가장 많이 했다.

밥이며 청소며, 수련 후 뒷정리까지.

물론 우리도 다 했지만, 그가 제일 많이 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나나 천무휘를 통해 무공에 대해 많은 배움을 얻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그리 표현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도 열심이고, 우리 모두 정말 열심히 수련에 임했다.

아! 근데 말이다.

수룡검 천무휘 이 녀석.

마음에 든다 든다 했지만,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을 발견하고 말았다.

하여간 잘생긴 놈들은 나와 어떻게 해서든 안 맞는 게 있기 마련인가 보다.

이것도 업보고 운명인가?

어쨌거나, 녀석.

빌어먹게도 진짜 천재 중의 천재다.

내가 다시금 그의 천재성이 나보다 더 뛰어남을 몇 번이고 인정하고 말았다.

매일 똑같이 열심히 수련하는데 말이다.

오직 녀석의 무공 상승만이 두드러지게 보인단 말이지.

일취월장이란 말이, 딱 천무휘를 두고 만든 사자성어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저는 쑥스러워하며 또 일부러 숨기려고도 하고 그러는데, 어디 그게 숨겨지겠냔 말이다.

온종일 같이 있고, 온종일 함께 수련하는데.

아!

부럽다.

그래서 짜증 난다.

나나 의제 그리고 한해북의 무공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만, 천무휘 이 녀석은 그냥 우리와 비교 대상 자체가 아니다.

여기서 계속 수련하면, 이 녀석 모르긴 몰라도 일 년 안에 초절정의 벽마저 깨 버릴 것 같다.

스물두 살에 초절정 고수가 되는 것이다.

미친!

뭐, 광천마제 시절의 나도 스물네 살이 되기 전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 * *

"마 형, 여기 샘물 좀 드세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천무휘가 마른 나무로 깎아 만든 그릇 가득 샘물을 담아 나에게 건넸다.

이 녀석은 한 달이 훌쩍 넘었음에도, 나를 볼 때마다 새색시를 본 노총각처럼 헤벌쭉 웃는다.

매일 항상 이렇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뭐, 나도 녀석의 질투 나는 무재만 아니면 마음에 들긴 하지만 말이다.

녀석만 그런 게 아니다.

의제도 또 한해북도 냄새나는 남자들끼리만 한 달이나 같이 지내고 있음에도,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다들 정말 뭐가 그리도 좋은지 모르겠다.

"형님! 저와 한 형 먼저 수련 시작하겠습니다."

"어, 그래."

의제와 한해북은 오늘도 역시나 아침나절부터 기운이 철철 넘친다.

"마 형, 우리도 시작하시죠?"

"아, 네. 그러죠, 천 형."

천무휘의 권유로 나도 싸구려 검을 들고 공터의 한편으로 향했다.

그렇게 막 대련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어? 몸이…… 몸이 좀 이상하네요?"

한해북이었다.

그가 자신의 도를 잡아 의제와 대련 자세를 취한 상태로 혼잣말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툭.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혼절한 건 아니다.

"한 형!"

급히 의제가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툭.

그 역시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말았다.

"왜들 그러세요?"

천무휘가 놀라 그 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어?"

툭.

그 역시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말았다.

나?

"어? 나도…… 나도 몸이 이상…… 이상하네."

툭.

나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니, 난 쓰러진 척했다.

일부러 천무휘가 쓰러진 다음에 쓰러졌다.

왜?

내가 천무휘보다 조금 더 고수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다.

큭큭큭큭.

그렇다.

중독이다.

적들이 샘물에 산공독 일종의 독을 탔고, 우리 모두 중독됐다.

아니, 나는 중독되지 않았다.

아까 천무휘가 내게 건넨 샘물은 모두 마셨다.

사실 나에게도 약간의 모험이었다.

내 신체, 정말 내 신체가 현경의 반열에 오른 신체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캬!

만독불침인지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천무휘나 의제, 한해북을 단숨에 쓰러뜨릴 정도의 제법 극독까지도 내 몸은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다.

최소 천독불침 정도는 되겠군.

"다들 일어설 수 있겠소?"

내가 셋을 향해 말했고.

셋은 힘들어하면서도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공을 흩뜨리는 산공독에 근력의 힘마저 무력화하는 꽤 지독한 독인 것이 분명했다.

난 계속 연기 중이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의제가 크게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독 같은데…….

천무휘의 수심이 깊어졌고, 곧바로 셋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큭큭큭큭, 제대로 중독됐군."

우리가 머물던 공터 주변의 수풀.

그곳의 풀과 나무를 헤치며 칼을 손에 쥔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얼굴은 가리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흑의를 입은 자들이었다.

천무휘, 의제, 한해북은 크게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나도 그들에 맞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럴 힘은 더더욱 없었다.

결국, 우리 넷은 임시로 지은 동굴 아닌 동굴 집의 나무 벽에 등이 닿고 말았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고 내공을 어떻게든 회복해 봅시다."

의제의 말에 우리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동굴 집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가부좌를 튼 다음 내공을 운용하려 애썼다.

이거 안 되는 거 안다.

정확히 삼 일이 지나야 내공을 회복할 수 있다.

광마일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

하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 가부좌를 틀고 열심히 내공을 운용하려 애쓰는 모습을 했다.

의제와 천무휘, 한해북 모두 그러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이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또 간절하게 내공을 끌어올리기 위해 힘쓸 뿐이었다.

"크하하하하. 이 녀석들 아직 상황 파악 못 한 모양이네. 이런 어설픈 집에 숨는다고 뭐가 되냐? 하하하! 야! 여기에 불 질러 버리기 전에 어서들 나와라."

"큭큭큭큭."

"하하하하."

대략 스무 명가량 되는 놈들이다.

동굴 밖에서 한 놈의 말에 나머지 놈들이 마음껏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난 슬쩍 눈을 떠 천무휘와 의제, 한해북을 봤다.

가뜩이나 정신을 집중해서 내기를 운용해도 안 되는 게 뻔한데, 동굴집 안으로 들려오는 놈들의 말과 비웃음에 집중력마저 흐트러져 버린 모습이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초조해하며, 분노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야! 이 새끼들 안 나온다. 그냥 불 질러 버려!"

"넵!"

이내 부싯돌을 탁탁 튀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화르르르르.

제법 화력을 갖춘 불이 일어나는 소리까지 들렸다.

결국, 우리는 모두 내기 운용을 포기하고 두 눈을 떠 버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야! 마지막 경고다.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진짜 불 지른다. 하나! 둘! 세…….

우리 넷이 어떻게 해야 서로 눈을 맞추며 긴박하게 고민과 갈등하던 그때.

우릴 협박하던 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쉬이이이익.

샤아아아악.

툭.

"뭐야!"

"컥!"

샤샤샤샤샥!

"막아!"

"으악!"

파파파파팟!

샤아악!

샥! 샥!

툭.

서걱.

서걱.

파파파팟!

쿠당탕탕.

"으아아악!"

소리만 들렸다.

뭔가 빠르게 움직이고, 베이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또다시 바람과 같이 움직이는 소리.

정확히 반 각이 걸렸다.

그리고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 넷은 동굴집 안에서 두려움과 긴장으로 얼음이 되었다.

그저 귀만 쫑긋 세워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의 시간이 찾아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런 정적을 뚫고 나를 제외한 세 녀석의 심장 소리만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터벅터벅.

누군가, 미칠 것 같은 정적을 깨고 하나의 걸음이 우리 동굴집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넷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문으로부터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넷 모두 벽에 등을 붙인 상태로, 잔뜩 긴장한 두 눈만 부릅떠 문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내.

끼이이이익.

동굴집의 나무 문이 열렸다.

"다 끝났어요. 이제 나오셔도 돼요."

그 시절, 우리 둘의 첫사랑 되시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