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이상한 동굴에서 깨어나고, 광마일기를 읽고…… 문신까지 확인했다.
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생각이 깊어졌다.
추고는 왜 나를 찔렀을까?
간단히 생각하니 답이 나온다.
간자(間者)다.
칠검문을 위시한 놈들의 간자.
결국 다섯 번째 시도마저 실패했다.
난 모든 상황을 다 알고 파악하였기에 거침없이 일을 추진했다.
성공을 바로 코앞에 뒀다.
적들은 똥줄이 탔을 것이다.
추고가 간자였다면, 이 일을 추진하는 중심에 내가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최악의 수를 썼고 그것이 통했다.
놈들은 성공했고, 난 다시 실패한 것이다.
이제 여섯 번째 시도다.
첫 번째 시도는 왕만두에게 죽었고, 두 번째 시도는 수룡검과 정파 놈들이 쳐들어와 우각당까지 멸문 당했다.
세 번째는 추하객잔 점소이 방에서 천예휘의 별채를 감시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고.
네 번째, 네 번째는 성과가 좀 있었군.
계집의 따귀를 한 방 때리고 죽었으니.
그리고 다섯 번째, 추고가 날 죽였다.
젠장.
하여간 잘생긴 놈들은 주는 거 없이 밉다.
우리 사부는 빼고.
이번이 여섯 번째 시도다.
닭이 닭대가리인가?
아니면 내가 닭대가리인가?
아!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하더니,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그래도 이번엔 확실히 천예휘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됐다.
문신.
당중유계(黨中有鷄, 우각당에 닭이 있다).
새끼손가락과 약지 사이에 작고 은밀하게 문신했다.
죽을 당시 그래도 제법 여유가 있었나 보다.
그나저나 이걸 계효보가 봤을까?
못 봤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번 아계상기(我鷄相欺, 나와 닭은 서로 속인다)는 글자 위에 그림을 덧그렸으니 당연히 못 봤을 테고.
이번 문신은 위치도 은밀한데다, 봤으면 광마일기 건 어디 건 계효보가 반응을 보였을 테다.
하지만 없다.
놈, 아직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를 확신한 나는 이전에 새긴 문신들을 보았다.
그중 유일하게 세 글자인 문신.
계가변(鷄可變).
역시 닭이 변신한다는 뜻이었군.
변신체로 날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천예휘 사건을 해결함과 동시, 닭까지 죽인다.
이번엔 완벽한 계책을 짜야 한다.
난 광천동에서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머리를 굴려 계책을 수립하였다.
천예휘 사건의 해결, 닭 모가지 비틀기,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번엔 내 무공도 되찾는다.
* * *
알몸으로 갑돌산까지 뛰어갔고, 사부에게 삼재검법을 가르치고, 구산사괴를 사부 몰래…… 남창에 도착했다.
한해북을 절강에서 불러들였다.
왕만두의 죄상을 밝히고 지독하게 고문한 후 죽였다.
추고도 잡았다.
오랜 고문 끝에 자백을 받을 수 있었다.
칠검문에서 우각당에 심어 놓은 간자가 맞았다.
그리고 이 녀석.
무림에 뜻을 품고 가출했다는 사연 말이다.
조사를 해 보니 이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놈이 가출 후 남창 만리현에 들러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우각당이 아닌 칠검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칠검문주가 그에게 제안을 했다.
우각당에서 간자로 삼 년을 지내면, 칠검문의 비전을 모두 전수해 주고 수제자로 삼겠노라고.
천예휘 사건 당일이, 추고가 간자로 활동하는 삼 년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한다.
녀석마저 죽였다.
스스로 내린 결단의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하는 법이다.
난 아죽의 마음을 열었다.
세 번째 하는 일이라 더 빠르고 쉽게 녀석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아죽에게 가 있는 동안, 우각당에서 큰돈을 써 인근에서 고절하다는 의원을 섭외해 아향의 아비를 치료했다.
아죽과 아향 모두 우각당으로 몰래 데리고 오는 것까지 성공했다.
일은 적토마를 타고 광야를 질주하는 것처럼 빠르고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향의 아비를 치료한 의원에게서 뜻밖의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고의인지 돌팔이인지, 누군가 잘못된 약을 써 병을 더 키웠습니다. 일 년 이상 된 것 같군요. 독이 깊숙이 침투해 있어서 치료하는 데 꽤 힘들었습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놈들이 이번 음모를 계획하고 준비한 기간이 최소한 일 년 이상 됐다는 뜻이다.
삼 년 전에 추고를 우각당에 간자로 심었다는 건, 그때부터 우각당을 없앨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독한 놈들이긴 하군.
하지만 이젠 끝이다.
"의제, 아죽, 아향, 준비됐지? 가자."
새벽과 아침 사이의 이른 시간.
변용한 우리 넷이 은밀한 걸음으로 추하객잔을 향했다.
천예휘 사건 발발까지 아직 칠 일이나 남은 시점이었다.
어제 오후 천무휘, 천예휘 남매가 이곳 남창 만리현에 도착해 추하객잔에 머물게 됐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 * *
아죽과 아향이 눈물을 마구 흘리며 진실을 모두 밝혔다.
수룡검 천무휘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칠검문에서 집요하리만큼 나를 남창으로 초빙한 것인가?"
혼잣말이다.
아죽과 아향의 자백을 모두 믿고, 내 말까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빠! 정신 차려. 이 사람들 사파야. 저런 간사한 혀 놀림 따위를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어?"
하! 빌어먹을 년.
또 초를 치는군.
옆에 있던 의제가 발끈했지만,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 내가 신신당부를 했기에 숨만 거칠게 몰아쉴 뿐 나서지는 않았다.
아무튼 천예휘의 싸가지 없는 말 때문에, 수룡검이 충격에서 벗어나 진위 여부를 파악하려는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먼저 나선 것은 그가 아닌 천예휘였다.
"이봐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도사님. 당신 말이 그럴듯하긴 했는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요."
"압니다."
"알아요?"
"네."
"……?"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조사했다는 부분이 의심스러운 것 아닙니까?"
"어머, 뻔뻔하기도 하시네. 뭔가 준비를 한 모양이죠?"
깐죽이고 비아냥이다.
죽방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난 숨을 한 번 깊게 내쉰 후, 시선을 수룡검에게로 향했다.
"현화문의 제자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수룡검.
그러더니 이내 놀란 얼굴이 되었다.
"현화문이라면……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현화검존께서 몸을 담고 계셨던 도문(道門)이 아닙니까?"
"오빠!"
내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천예휘가 순간 꽤액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수룡검이 한 손을 들어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맞습니다. 제가 현화문의 제자 마악치입니다."
"아…… 현화문이 존속하고 있었군요."
"심산유곡에서 도를 닦으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하산을 하게 되신 겁니까? 혹, 이 사건 때문에요?"
"하산은 천하를 돌며 수양을 쌓기 위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 것은, 믿기 힘드시겠지만, 예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러시겠죠. 현화문이라면 그 무공과 도력이 매우 깊은 도문이니까요."
수룡검은 완전히 넘어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오빠! 정말 왜 그래? 평소 그 냉철하고 이성적인 머리는 어디 두고 왔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저 가짜 도사 말을 어떻게 믿어? 시골 사파의 우두머리랑 의형제까지 맺었다잖아! 정말 왜 이래!"
천예휘는 안하무인이었다.
자기 오빠를 믿는 것인지, 버젓이 우리가 앞에 있음에도 막말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진짜 한 대만 더 후려갈기고 싶다.
그래도 참았다.
할 일이 많다.
"마 도사님."
수룡검은 신중한 모습이었다.
나를 불렀지만, 다시 입을 꾹 닫고 약간의 시간 동안 고심한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도사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하지만 제 여동생의 말 또한 충분한 일리가 있습니다."
"증명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일부러 제 여동생을 돕기 위해 이렇게 수고를 해 주시는데, 면목 없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천 대협의 입장이라도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럼……?"
"증명하겠습니다."
"다른 증거가 있습니까?"
"검으로 증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순간 수룡검의 얼굴에 곤란함이 가득 묻어났다.
나를 배려한 마음이 그의 얼굴을 그리 만든 것일 테다.
또래의 후기지수 중 자신을 상대로 무공을 통해 무언가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무공을 절대적으로 믿기에 그리 생각한 것일 테고.
물론, 그는 이미 내게 내공이 없음을 알고 있을 터였다.
"풉. 이봐, 가짜 도사. 지금 누구한테 뭘로 무얼 증명한다고? 우리 오빠 누군지 몰라? 호호호. 간사한 도사인 줄 알았더니, 미친 도사였…….
"예휘야!"
호통이었다.
천무휘가 근엄하면서도 화가 잔뜩 나 계집을 향해 호통쳤다.
"아니, 난……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소림사의 금강소룡(金剛少龍) 단장 스님이나 남궁세가의 소황검협(小皇劍俠) 남궁무기 소가주도, 오빠한테는 십 초 지척도 안 되는데. 갑자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가짜 도사가 갑자기 오빠한테 검으로 뭘 증명한다니…….
"예의를 갖춰라, 예휘야."
"오빠, 그래도 말이 되는 일을 벌여야지. 저 가짜 도사의 뭘 믿고 이러는 거야? 난 조금도 믿을 수 없다고!"
"그래서 도사님께서 증명한다고 하지 않으시냐?"
"증명? 나만 미친년이야? 무슨 사술을 부릴 줄 알고!"
수룡검이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계집을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결국 천예휘가 입을 닫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도사님. 일찍 부모님을 여의어 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 아직 철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 말을 믿어 주시는 천 대협께 감사할 나름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하신 말씀. 진심이십니까?"
난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룡검의 눈에 이채로움이 가득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 * *
추하객잔 후원의 작은 공터.
나와 수룡검이 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수룡검 뒤로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천예휘는 팔짱까지 끼고 한껏 불만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추하객잔 주인에게 돈을 주고 후원의 출입을 통제하게 한 의제가 조금 전 돌아왔다.
이제 시작이다.
우각당에서 가지고 온 싸구려 검을 검집째 들고 자세를 취했다.
"내상을 입어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것까지 양해해 주시고. 고맙습니다, 천 대협."
"아닙니다. 내공을 사용하고 하지 않고는 실력을 입증하는 데 조금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긴 하죠. 그럼, 시작할까요?"
"그러시죠, 도사님."
겉으로는 차분한 척, 진지한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 나는 뛸 듯, 미칠 듯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이 상황, 다 계획한 일이다.
수룡검 이 녀석, 아주 내 계책대로 술술 따라와 준다.
세상 사람들이 다 수룡검 같다면, 내가 제갈공명이고 사마의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크하하하하!
내가 왜 이런 일을 벌였냐면?
무공을 되찾기 위함이다.
오랜 시간, 나는 무공을 되찾을 방법에 대해 고민하였다.
결국 이 무한 회귀에 그 답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그중에서도 광천마제 시절의 나와 깊게 연관된 사람이나 사물이 그 핵심이다.
사부와 초향, 무적 할매, 작은 사부, 의제를 보았을 때의 감정.
수룡검과 천예휘에게서도 느꼈다.
수룡검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을 내쉬었고, 천예휘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또 있다.
회귀 후 사문의 무공을 읽는 것만으로 모두 빨아들이듯 익힐 수 있는 신비로운 현상.
그리고 또.
작은 사부를 통해 광마일기에 적은 내 후회와 참회를 되돌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내 비뚤어진 인생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는 방법 역시 그 안에 답이 있었다.
난 광천마제 시절 수룡검과의 싸움을 통해 신검합일을 깨닫고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이다.
수룡검과 전력을 다해 부딪히면 신검합일이 보일 것이고 느껴질 것이다.
내가 절정 고수의 힘을 되찾는 방법이다.
수룡검이 답이다.
그와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양보하지 않겠소. 조심하시오, 수룡검!"
난 검집에서 낡은 검을 뽑아 들고, 수룡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