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무슨 일 때문에 추고를 밖에서 기다리라 하신 겁니까?"
객잔 이 층에 올라왔던 추고를 다시 일 층으로 내려보내 대기하라고 했다.
이에 의제가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물은 것이다.
"추고라는 녀석, 믿을 만한 자인가? 입당은 언제고, 출신은?"
"아! 그것 때문에 그러셨습니까? 하하하."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웃는 의제였다.
"의제, 이번 일의 심각성, 잘 알고 있지?"
"알다마다요. 최악의 경우 만리현 정도 문파들과 전쟁까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음,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니, 믿을 만한 자인가 봐? 의제가 확신할 정도로."
"우리 우각당에 들어온 지 삼 년이나 됐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작았을 꼬꼬마 때부터였어요. 하하. 제법 유명한 의가(醫家)의 장남인데, 무림에 뜻을 품고 가출했다지 뭡니까, 하하하."
의제가 또 크게 한 번 웃은 후 말을 이었다.
"어린 게 괴상하게도 미쳤다 싶었는데, 뭐 하도 사정을 하고 당시 며칠 굶은 꼬락서니가 불쌍하기도 해서 거둬 줬습니다. 잡일이나 시키고 밥이나 좀 주려고요. 그런데 이 녀석이 인재더라고요. 우리 우각당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저를 포함해 셋뿐이거든요."
의제의 학문 수준은 광마일기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의제, 거짓말하면 지옥 가."
"어험, 형님. 제가 글을 다 쓰지는 못해도 읽을 줄은 압니다. 천자문에서 팔구백 자 정도까지는요."
"지옥 간다니까."
"어험, 쿨럭. 칠백 자?"
"요즘 불지옥이 많이 뜨겁다더라."
"육백 자까지는 정확히 읽을 줄 압니다. 저 이래 봬도 대도곽가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래. 아무튼 그래서?"
"어험, 추고 저 녀석이 글도 잘 읽고 쓸 줄 알고, 머리도 좋고. 여러모로 우리 우각당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삼 년 동안 제가 지켜본 결과, 믿을 만한 녀석입니다."
사부의 탁발 이후 내게 이상한 편견, 선입견 같은 게 생겼나 보다.
잘생긴 놈들만 보면 그냥 싫고 의심부터 하고.
자격지심인가?
휴우, 됐다.
"미안하군. 의제의 수하를 의심해서."
"아닙니다, 형님. 이럴 때일수록 더 철저히 의심하고 확인하는 게 좋죠. 그럼 추고 녀석을 부를까요?"
"그러지."
추고가 우리 임시지휘본부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 * *
의제가 추고에게 철저한 비밀 유지를 몇 번에 걸쳐 명령한 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종합해 설명해 주었다.
추고는 의제의 설명이 끝난 후에도 한참이나 고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천하제일과 천하제이 단순 무식인 나와 의제는, 열아홉 살 꽃미모 녀석이 입을 열 때까지 숨소리까지 죽이며 대기를 해야 했다.
"첫째, 추하객잔 주인에게 사건에 관한 내용을 자백받기는 힘들 것입니다."
"어째서지?"
내가 물었다.
"당주님께서 말씀하셨듯, 만약 칠검문을 비롯한 정도 문파들이 음모를 꾸몄다면, 가장 깊숙이 개입한 게 바로 그일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만약 우리가 그를 잡아 고문이라도 하게 된다면, 곧바로 전쟁이 발발할 것입니다. 천예휘 소저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고, 그들의 영역에서 그들의 사람을 납치해 고문하는 일입니다. 저희에겐 그 어떤 명분도 없죠."
"음, 그렇긴 하군. 명분 없는 전쟁은 필패지."
잘생긴 놈이 똑똑하기까지 하니 더 싫다.
하지만 맞는 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없고, 지금처럼 계속 감시를 붙여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계속 지켜보다 보면, 무언가라도 하나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군."
"둘째, 점소이 아죽. 그는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또 가족이나 친구 등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죠. 하지만 그는 요리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셨죠?"
"들은 바로는 그렇네."
"돈만 있다면 언제든 다른 곳으로 떠나 작은 객잔이라도 열 수 있다는 뜻이죠. 다년간 점소이로 일했던 경험과 출중한 요리 실력까지 겸비했고, 근면 성실 하다고까지 했으니까요."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흉수들이 그 조건으로 돈을 제시했을 수 있다는 말이군."
"네, 맞습니다."
"우리가 더 큰 돈을 제시하면 그가 자백할까?"
추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방진 새끼.
내가 처음으로 의견을 낸 건데, 저렇게 거만한 태도로 부정한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다.
"이곳은 정파의 영역. 아마 어리고 약한 그는 칠검문과 같은 곳에 속한 무인을 절대적인 힘과 권력이라 여길 것입니다. 돈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두려움이 더 컸기에 그들의 악행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지?"
"마음을 열어야죠."
"마음?"
"네. 섣불리 자백을 받으려 했다가 오히려 아죽이 정파 무인들에게 고자질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그들의 역습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부터 열어야 합니다. 그가 순순히 자백할 수 있을 때까지요."
"쉽지 않군. 그냥 잡아다 족치는 게 내 방식인데."
내 말에 옆에 있던 의제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래도 해야지요."
"음,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직도 아죽을 괴롭히는 자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때마다 누군가 짠 하고 나타나 그를 구해 주는 것입니다. 든든한 형이나 아버지처럼 말이죠. 아죽 한 사람을 위한 영웅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마음을 다해 의지할 수 있게요."
"괜찮은 방법이군. 그럼 그건 누가 해야 하지? 의제, 우각당에 적당한 인물이 있겠지?"
"물론입니다, 형님."
"잠, 잠깐만요, 당주님."
추고가 갑자기 난감한 얼굴을 하며 손까지 들어 나와 의제의 대화를 막았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런 추고를 보았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어야 합니다. 아죽은 물론, 이 일대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인물. 그래야 흉수들의 의심을 피하지 않겠습니까?"
또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각당 녀석들을 쓸 수 없다는 말인데.
그럼 누가 그 역할을……어? 이 녀석들 왜 날 쳐다봐?
"도사님, 도사님보다 이 역할을 잘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첫째,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고. 둘째, 현 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난 지금 내상을 당해 내공을 사용할 수가 없네. 아죽을 괴롭히는 놈들이 조그만 내공을 가지고 칼을 휘두른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내가 될 수 있다고."
"아! 형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제가 형님께 믿을 수 있는 친구 한 명 붙여 드리겠습니다."
"친구?"
"네. 제가 일 년 전 복건 장주에 갔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그곳에서 크게 칼싸움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해북이라는 녀석으로, 제 칼에 패배 후 죽여 달라는 걸 제가 살려 준 후 친구까지 먹었습니다. 그때 녀석이 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녀석을 불러 형님의 호위 무사로 위장해 붙이면 되지 않을까요?"
"칼은 좀 쓰나?"
"완연한 일류 무사의 경지입니다. 이곳 만리현에서라면, 문주 몇 명을 제외하고는 놈의 칼을 삼 초식 이상 받아 낼 고수는 없습니다."
"복건이라면 멀지 않나?"
"복건 삼명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 강서에서 멀지 않아, 제가 부르면 며칠 내에 곧 도착할 것입니다."
"음, 뭐. 그러면 내가…… 내가 나서야겠군."
"그럼 아죽은 마 도사님께서 맡아주시면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게 한 후, 우각당에서 뒤를 봐주고 객잔을 열 돈까지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분명 어떠한 진실도 다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아죽은 내가 맡겠다. 그럼 이제 아향만 남았군. 아향에 대한 대책도 있나?"
"네. 물론입니다. 아향은…….
추고가 나와 의제의 눈치를 잠시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향은 아무래도 제가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가 직접? 무슨 수가 있나?"
"그게…… 특별한 수라기보다는…… 당주님과 도사님께 없는 무기가 제게는 있습니다. 한창의 때인 아향의 마음을 단번에 열어젖힐 특별한 무기요."
내가 이 녀석 첫인상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름 똘똘한 모습에 조금은 마음을 열어 가는 중이었다.
하!
하지만 역시나 재수 없는 놈들은 뼛속까지 재수가 없기 마련이다.
싸가지 없는 놈.
난 내 옆에서 놈의 계책을 듣고 있는 의제의 얼굴을 보았다.
못생겼다.
흉악하다.
나?
나는 뭐 보통은 된다.
어험.
아무튼.
잘생긴 놈들은 자기가 잘생긴 걸 안다.
지금 그걸 이용해 아향의 마음을 열겠다는 게 아닌가?
뭐, 방법은 좋다.
훌륭하다.
열일곱 살 소녀의 가슴에 꽃미모의 미공자만큼 치명적인 무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지금 이렇게 열받는 건, 추고 녀석의 말 때문이다.
뭐?
나와 의제에게는 없고, 자기한테는 있다고.
아! 진짜 주먹이 날아가려다 말려다, 불끈불끈한다.
의제야 뭐 그렇다 쳐도.
나는 아니지 않은가?
"특별한 무기? 너한테 그런 게 있었어?"
상황 파악 못 한 의제가 멀뚱멀뚱한 눈으로 추고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추고 녀석, 이때다 싶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자기 잘생긴 얼굴을 자랑하려나 보다.
진짜 한 대 칠까 심각하게 고심 중이다.
"당주님, 잊으셨습니까? 저희 집안이 유명한 의가 아닙니까? 제가 호남 악양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의가의 장손이자 후계자였다고요. 하하하."
"아! 맞다. 그걸 내가 깜빡했네. 하하하.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의술로 가문 어르신들의 기대가 컸는데, 무림에 꿈을 품고 가출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하하하하."
아! 그런 거였어?
내가 잠시, 아주 약간 오해를 했었군.
어험.
뭐, 주먹 안 날리길 잘했군.
"아향의 중심은 무엇보다 아픈 아버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제가 아향의 아버지를 치료하고, 그 아버지가 건강하게 회복한 모습을 본다면, 아향도 마음을 열고 어떤 진실이라도 말해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돈부터 시작해서 필요한 것은 다 말해. 내가 아낌없이 지원해 줄 테니까."
"넵, 당주님. 그런데 이건 아주 작은 가능성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
조금 전 녀석에 대한 오해는 곧바로 잊고, 내가 물었다.
"일 년간 지역의 의원들도 치료하지 못한 병이라 했습니다. 제가 그 환자를 치료해 낫게 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음, 그렇게 되도 어쩔 수 없지."
"또, 추하객잔 주인에게서도 끝까지 특별한 증거를 찾을 수 없을 가능성 또한 높습니다."
"그도 그렇군."
"이번 계책의 핵심이 마 도사님이라는 뜻입니다. 아죽을 통해 진실을 자백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나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사건의 주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들로부터 증거를 찾거나 자백을 받아야 한다.
추고는 계책 수립 후 의제의 지원 아래, 돈과 약초 등을 넉넉히 꾸려 곧바로 아향의 본가로 떠났다.
복건 삼명으로 사람도 보냈다.
의제가 말했던 한해북이란 자는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 도착하였다.
의제와 같이 도(刀)를 쓰는 도객으로, 고작 일류라는 보잘것없는 실력에 비해 분위기가 꽤 살벌하면서도 멋들어진 자였다.
위장이 아니라, 그냥 딱 봐도 어디 대가의 금지옥엽이라도 철통 호위할 호위 무사처럼 보였다.
든든한 호위 무사까지 구했겠다, 이제 내가 진짜로 활약할 시간이다.
이번엔 정말, 진짜로, 확실히, 아주 멋지게 활약해 보일 것이다.
일명 ‘왕따 아죽을 구해라’ 작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