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누구냐! 감히 누가 내 여동생에게 암수를 쓴 것이냐!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부로 우각당은 사라진다."
풍문으로 들었던 수룡검 천무휘는 차분하고 똑똑하며 공명정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날 내가 본 천무휘는 한 마리의 악귀를 보는 듯했다.
"누구냐! 정녕 모두 목이 잘린 후에야 후회할 것이냐! 나와라!"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차분히 말씀을 해 줘야 알 것 아니겠소."
곽우적이 선두로 나섰다.
이곳 우각당의 당주가 그이니, 의제가 나서 상대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난 불안했다.
천무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당시의 내가 가늠하기 힘든 경지에 올라 있었다.
나는 고수의 끝자락, 놈은 절정의 고수였다.
반면 의제는 이제 막 고수의 반열에 든 초입이었고, 내공 면에서도 많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둘이 격돌하는 순간, 의제는 죽을 게 뻔했다.
"네, 이놈! 지금 시치미를 떼려는 것이냐!"
"이보시오! 말이 지나치오! 내 분명 그대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차분히 대화로 풀려 했으나,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참지 않을 것이오!"
"참지 마라, 사파의 쓰레기들아."
확실히 수룡검이 선을 넘었다.
이에 의제도 분기탱천해 버렸다.
아니, 오히려 대도를 꺼내 단번에 수룡검을 향해 달려들 기세였다.
이 녀석을 두고 왜 내가 천하제일 단순 무식이라고 했냐면, 항상 이런 식이다.
뭔가 앞뒤를 재지 않는다.
본인도 싸우면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의제를 얻은 바로 다음 날 그의 장례를 치를 순 없지 않겠는가.
"의제, 이 형을 봐서 한 번만 물러서 주시게."
"형님! 하지만!"
"의제, 부탁일세."
"……네."
결국 의제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수룡검의 살기 충만한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순간이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입니다. 짧게라도 좋으니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 수룡검 측에서도 다른 이가 나섰다.
흥분해 숨을 씩씩거리는 수룡검이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칠검문의 문주 공손반이라 하오. 귀하는 누구시기에 우각당주 대신 나서는 것이오?"
"우각당주의 의형입니다. 마악치라 합니다."
중년을 넘어선 나이의 공손반이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였다.
"어제 새벽 축시(丑時, 01~03시) 경, 본 문으로 추하객잔의 점소이가 다급히 찾아왔소. 당시 수룡검 천 대협께서는 본 문을 비롯한 이곳 남창의 문주들과 연회를 갖은 후, 본 문의 연무장에서 홀로 수련을 하고 있을 때였소."
수룡검은 고작 스물한 살의 나이 때부터 대협이란 칭호를 받고 있었다.
"추하객잔의 점소이는 천 대협의 여동생, 천예휘 소저께 큰 변고가 생겼다며 빨리 가 봐야 한다고 했소. 나는 즉시 이를 천 대협께 알리고, 천 대협과 본 문의 정예를 이끌고 추하객잔으로 향했소. 이미 그곳은 난리가 나 있었던 상황이오. 그리고…….
수룡검 측과 우각당 사람들, 그리고 저 멀리 싸움 구경을 하기 위해 몸을 숨긴 사람들까지 하면 수백이 훌쩍 넘는 인원이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여 공손반의 입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객잔 별채에서 창백하게 질려 덜덜 떨고 있는 천 소저를 발견하였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불행 중 다행이라, 천 소저는 안전하였소. 다만 크게 놀랐을 뿐이오. 천 소저가 잠을 자던 중, 복면을 한 괴한 세 명이 천 소저의 방에 수면연(睡眠煙)을 뿌렸소."
"수면연? 미혼산과 같은 수면약 말입니까?"
"그렇소. 연기 형태로 미혼산과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악독한 독연(毒煙)이오."
"그걸 왜?"
"때마침 늦게까지 일을 하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객잔의 시비 아향이 방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문을 열었고, 복면을 쓴 괴한 세 명이 천 소저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것을 발견하였소."
"……."
"아향은 소리를 질렀고, 괴한 셋은 도주를 했소. 그리고 그 도주하는 모습을 점소이이자 숙방 보조 숙수로도 일하던 아죽도 목격했소."
"그런데 왜 이곳입니까? 복면을 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툭.
공손반이 바닥에 박도 한 자루를 던졌다.
눈에 익은 박도다.
"괴한 셋 중 한 놈이 떨어뜨리고 간 것이오."
난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우각당 왈패들이 손에 들고 있는 박도가 죄다 같은 모양이었다.
"이 박도뿐만이 아니라, 당시 도주하던 괴한들 셋 모두 누런색의 배심(背心, 조끼)을 입고 있었다고 하오."
난 다시 뒤를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우각당 이 빌어먹을 새끼들, 죄다 누런색 배심을 걸치고 있다.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증인도 데리고 왔소. 보시겠소?"
당시 나는 너무 당황해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했다.
"공 문주님, 고맙습니다. 이제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건 제 여동생의 일입니다."
수룡검이 다시 나섰다.
"더 할 말이 남았나?"
"……."
"셋을 세겠다.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우각당은 전멸이다."
"……."
"하나."
"둘."
"셋."
"잠깐!"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수룡검을 제지했다.
"만약 모함이라면? 누군가 우각당을 음해하려 꾸민 모함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늦었다. 구차한 변명은 염라대왕에게 해라."
수룡검이 곧바로 몸을 날렸다.
아찔했다.
무서워서 아찔한 게 아니라, 억울함이 극에 달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아찔했던 것이다.
"형님, 비키십시오!"
수룡검에 맞춰 의제가 대도를 휘두르며 곧바로 몸을 날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퍽.
쿠당탕탕.
내가 그를 밀쳐 쓰러뜨리고 대신 수룡검을 향해 움직였다.
당시의 나는 공수공권이었다.
사문의 검법이 나의 성명절기라 할 수 있었지만, 도사가 검을 차고 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 어떤 무기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빈손으로 수룡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완연한 절정의 고수 수룡검.
나는 고수의 끝자락.
수백이 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와 그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쾅!
콰콰콰쾅!
허공에서 부딪힌 나와 수룡검의 충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늠할 수 없었지만, 수룡검이 절정의 고수일 것이라 들었고 실제 그러할 것이라 예측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장(掌)과 그의 검이 부딪히는 순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무려 뒤로 다섯 장이나 나가떨어져 땅을 구른 건 내가 아닌 그였기 때문이었다.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의 위력이었다.
바닥을 세 번 구른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멋진 자세로 착지한 수룡검.
놈의 눈빛이 순간 돌변하였다.
오직 분노로 가득했던 그의 눈에 일부지만 냉철함이 살아났고, 다시 평생의 적수를 만난 것과 같은 승부욕이 보였다.
그때 알았다.
놈이 타고난 천재고, 타고난 무인이며, 타고난 승부사라는 것을.
내 한 수로 인해, 그는 여동생의 일마저 잊어버리고 오직 나를 이기고 꺾겠다는 것에만 집중한 듯하였다.
곧바로 두 번째 부딪힘이 있었다.
콰콰콰쾅!
쾅쾅쾅!
쾅콰콰콰쾅!
검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간간이 검강까지 사용하는 수룡검.
난 호신강기를 온몸 가득 두르고, 손에 수강(手剛)과 장강(掌剛)을 가득하여 대적하였다.
수룡검은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다.
그의 선조 중 한 명이 화산파의 속가제자 출신이었고, 그때 배운 무공으로 무가를 이루어 후손에 전한 것이다.
몇 대에 걸쳐 이어진 가문의 무공은, 수룡검이 그랬듯 그 가문의 천재적 선조들 덕분에 상승의 검법으로 탈바꿈하였다.
작금에 이르러 가족이라고는 수룡검 천무휘 본인과 여동생 천예휘 둘뿐이지만, 화산파에서까지 그들을 본산의 제자 못지않게 돌보고 지원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천무휘는 진짜 천재 중의 천재가 맞았다.
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콰콰콰콰쾅!
연이어 엄청난 폭발이 수백 번이나 일어났다.
이미 주변에 있던 우각당과 칠검문 등의 사람들은 수십 장 밖으로까지 몸을 피했다.
나와 수룡검이 싸우고 있던 자리는 초토화가 된 지 오래였다.
난 그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아니, 싸움이 이어질수록 그와 뭔가 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음을 느꼈고, 그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드리우고 있음도 분명 보았다.
그와의 싸움이 끝났을 때,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 사건을 차근차근 처음부터 다시 되짚으며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파다! 저 검은색 수강과 장강! 사악하기 그지없잖아요!"
빌어먹을 계집.
오로지 나와 수룡검의 싸움이었던 곳에 그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람들의 술렁임이 느껴졌다.
내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마교의 끄나풀일지도 몰라요! 봐요! 보세요! 정도 무림의 그 누가 저렇게 사악한 무공을 쓴단 말이에요? 마교의 간자라고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계집.
이때는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내 집중력은 더더욱 흐트러졌고, 압도적인 내공으로 수룡검의 무공 경지를 만회하던 것이 점차 어려워졌다.
몸 곳곳에 상처를 입으며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계집은 더더욱 신이 나 소리쳤다.
"저 사람이에요! 기억났어요. 저 악적이 어제 저를 겁탈하려다가 도망간 색마가 맞아요! 배교의 사술까지 익힌 자에요. 위험하고 간악한 색마, 죽어라!"
씨ㅍ……
아! 아무리 화가 나도 광마일기에까지 욕은 적지 말자.
아무튼 나는 무지막지하게 화가 났고, 내 정신은 내 정신이 아니었다.
사부의 삼년상도 아직 다 마치지 못했다.
내가 크게 억누르고 있었지만, 실제 당시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에 그 계집이 불을 질러 버린 것이었다.
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내공의 조절에 실패했다.
내상까지 입었고 실전 경험이 부족한데다, 계집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입으로 검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고, 수룡검은 열 장 밖으로 튕겨 나가 땅을 스무 번이나 구른 후에야 쓰러졌다.
"극악무도한 마교의 악적! 네가 정녕 무림의 미래인 우리 오라버니를 죽이고, 마교천하를 만들려 작정했구나! 죽어라, 색마!"
쓰러진 오빠를 보고 분노한 계집이 검을 뽑아 들고 나를 향해 오려 했다.
난, 처음으로 내 신조를 버리고 계집의 아구창을 사정없이 갈겨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
쓰러졌던 수룡검이 일어났다.
그냥 기절해 있지.
그런데 일어났다.
입으로 검은 피를 주르르 흘렸지만, 빌어먹게도 그 모습마저 잘생겼다.
처음의 분노도, 나중의 미소도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의 수룡검.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여동생을 제지하고 날 빤히 쳐다보았다.
안돼!
조금만 더 기절해 있어!
우선 계집년 아구창 좀 몇 대 후려갈긴 후 일어서란 말이야!
나도 정말 머리끝까지 열통이 터졌다.
하지만 이도 잠시.
수룡검의 상태가 범상치 않음을 곧 깨달았다.
그가 검을 쥔 상태로 나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처음 보았다.
신검합일(身劍合一).
그게 고스란히 수룡검을 통해 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곧 검이고, 검이 곧 나라는 것을.
이번 싸움, 둘 중 한 명은 죽을 것이다.
죽지 않으려, 나는 내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순식간에 오십여 합의 공방이 오갔다.
난 그 짧지만 강렬했던 싸움을 통해 신검합일의 경지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절정의 벽을 깨는 순간이었고, 신검합일의 깨달음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수룡검은 나에게 절정이란 선물을 주고 죽었다.
정도 무림의 미래라 불리던 수룡검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우리 우각당에 모함을 씌운 저들을 용서하지 마라. 모두 죽여라!"
의제의 외침.
의제가 가장 먼저 몸을 날렸고, 나와 수룡검의 싸움으로 사기충천한 우각당 왈패들이 박도를 휘두르며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고작 왈패와 무림 문파들의 싸움이었음에도, 그들 사이에서 의제의 활약은 대단했다.
거기에 수룡검의 죽음으로 이미 두려움에 덜덜 떨던 적들은 제대로 항거할 생각도 하지 못하며 도주하기 바빴다.
일백 명이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적들의 숫자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때까지 난 멍한 눈으로 수룡검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슬펐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역설적으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싸움이 한창 진행되어 비명과 절규가 난무하던 때가 아닌, 싸움이 끝나 조용해질 무렵이었다.
수룡검의 죽음.
그 계집년 때문이었다.
난 서둘러 그 계집년을 찾았다.
아구창 한두 대 날려버리는 것으로 끝낼 순 없었다.
눈물과 콧물을 마구 흘려대며 무릎 꿇고 싹싹 빌 때까지 계속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머리털과 이를 죄다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없다.
없었다.
이미 도망가버렸다.
아!
난 정말 극대로 분노하고 분통하였다.
훗날, 계집을 만나면 꼭 아구창을 마구 후려까버릴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그 계집이 화산검후가 되고, 천라지망을 펼쳐 나를 쫓고, 내 몸에 칼빵을 아흔여덟 방이라 새겨버릴 줄은.
그때까지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늘이 내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준다면, 그래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꼭!
꼭!
그 계집의 아구창을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