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광마일기>>
(중략)
심토만력근을 복용한 후 그 기운을 모두 내공으로 전환했다.
고작 스물한 살의 나이로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을 보유하게 됐다.
이때까지 난, 내가 보유하고 있는 내공이 무림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사부를 잃었다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구산사괴에 대한 분노가 불타오를 때였다.
사부가 없는 사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라도 구산사괴를 만나 사부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았다.
구름 따라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강서 남창의 어느 산이었다.
그곳에서 한 남자를 보았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정성스레 하나의 봉분을 다듬던 사내였다.
우직하게 꾹 다문 입매가 마음에 들었다.
봉분을 다듬는 세심함과 정성은 그 우직한 입 모양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의 눈에서.
내가 가끔 상상해 오던 무림인들의 의(義)와 협(俠)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왔다.
기뻤다.
세상으로 나와 처음으로 간절히 사귀고 싶은 사람이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일부러 인기척을 냈음에도 그는 여전히 봉분을 다듬는 일에 집중하였다.
"반갑소, 마악치라 하오."
"……?"
내가 선뜻 건넨 인사에 그는 나를 이상한 놈 쳐다보듯 쳐다봤다.
그래도 기쁘고 설레었다.
내 수양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나와 깊은 인연이 될 것 같은 느낌인지 착각인지가 들었다.
아니, 그냥 그가 마음에 들었다.
"하남 허창 갑돌산이란 곳에서 도를 닦다가 하산을 했소. 귀하를 보니 친구가 되고 싶어 염치 불고하고 인사를 건네게 됐소."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도사님. 저는 사파인입니다. 그것도 한 방파의 우두머리라오. 내 한마디에 수하들은 민초들에게 몽둥이질을 하고 간혹 칼까지 서슴지 않고 휘두르기도 합니다. 그들의 피와 땀이 묻은 돈을 갈취하는 것이 내 목표고 인생이외다."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땐 좀 많이 놀랐다.
당장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바보같이 머뭇거렸으니 말이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파인을 정파의 대협객으로 여겼으니 어찌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놀람과 실망, 그리고 알지 못할 감정이 교차하고 있을 때.
문득 사부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가르침.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하고 또 무슨 일을 하는지를 두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
마(魔)에 협(俠)이 있고, 악(惡)에 선(善)이 있으며, 정(正)에도 언제나 사(邪)가 암약하고 있다는 가르침.
사부의 가르침이 떠오르자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졌다.
실망이 가득했던 내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가득 담겼다.
목소리에는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우리 의형제 합시다."
다시 허리를 숙이고 봉분을 다듬던 그가, 내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제안에 허리를 쭈욱 하고 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아니면 자신도 내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그냥 그렇게 미소를 짓다가 나중에는 큰 소리까지 내며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이내.
"누가 형이 되고 누가 아우가 될지는 무림의 관례대로 정합시다. 괜찮겠소?"
당시의 난 무림의 관례를 몰랐다.
하지만 그냥 좋았다.
"좋소."
내 대답에 그는 봉분 옆에 세워두었던 커다란 대도를 집어 들고 내 앞에 섰다.
아! 무림의 관례라는 게 이런 거였군.
힘센 놈이 형이다.
"남창 우각당의 곽우적이라 하오."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겠소. 허창 갑돌산 현화문의 마악치오."
그가, 아니 녀석이 씨익 웃었다.
살짝 섬뜩했다.
처음으로 치르는 대결 아니겠는가?
그런데 곽우적, 이 녀석이 당시에는 정말 대단해 보였다.
마치 갑돌산에서 늘 바라보던 굳건한 정정산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기왕 의형제가 되기로 한 거, 내가 형 소리 좀 들어야겠소. 야아아압!"
곧바로 대도를 휘두르며 나에게 돌격해 왔다.
그 기세가 사뭇 웅장하고 대단했다.
그리고.
퍽!
쿠당탕탕.
내 주먹 한 방에 다섯 바퀴나 뒤로 구른 후 고개를 드는 녀석이었다.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어이가 없을 수 있냐는 그런 눈을 뜨고는 쌍코피를 주르르 흘리는 게 아니겠는가.
이내 녀석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대뜸.
"형님!"
"그래, 아우. 일어나시게."
그와 나는 그렇게 의형제가 되었다.
(중략)
의형제를 맺고 산을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봉분은 어느 분의 것이었나?"
"아버지요."
"아버지?"
"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건가?"
"……?"
"다시 올라가세."
(중략)
그때까지 난 도사의 신분을 버리지 않았다.
난 녀석과 함께 다시 봉분으로 돌아가 정성스레 제사를 지냈다.
봇짐에는 경면 주사며, 부적지며, 향과 향로며,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휴대용 물품을 제대로 갖추고 다닐 때였다.
"의제 곽우적의 의형 마악치가 아버지께 예를 올립니다."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고, 절을 했다.
전지를 태우고, 부적을 날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부님 없이 홀로 제사를 지냈다.
의제의 아버지를 위한 제사였고,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정성을 쏟은 제사였다.
곽우적은 그런 내 뒤에서 공수시립한 상태로 하염없이 눈물만 계속 흘렸다.
(중략)
"형님, 고맙소."
우각당으로 왔다.
여든 명이 넘는 우각당 수하를 죄다 불러 큰 잔치를 벌였다.
우리가 의형제가 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였다.
나와 곽우적은 상석에서 황제의 수라상과 같은 상을 받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뭐가? 내가 더 고맙지. 자네같이 멋진 녀석을 동생으로 삼게 됐으니 말이야."
"아니, 그거 말고요."
"그럼?"
"아버지요. 제가 흑도의 길을 걷게 된 후…… 항상 죄송했거든요. 그런데 형님같이 참된 도사가 정성스레 제사까지 지내 주고, 저와 의형제까지 맺어 주셨으니, 아버지께서 저세상에서도 흐뭇해하실 것 같아서요."
"싱겁긴. 됐어. 너도 이미 훌륭하고 멋져. 아버지께서도 다 이해하실 거야."
"고마워요, 형님."
녀석과 나는 술잔을 부딪힌 후 단숨에 비웠다.
그런 후 녀석은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 주었다.
날 진짜 형으로 받아들였기에 털어놓는 속마음일 터였다.
"이곳 남창에 대도곽가(大刀郭家)가 있었어요. 삼백 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무가(武家)였죠."
"자네 가문이었군?"
"네."
"무림맹 소속이었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행사에도 여러 번 참여했던 뼛속까지 정파의 무가였죠."
"음…… 아버님께 사연이 있구나."
"네."
이후 녀석은 전음을 통해 나에게 말했다.
다른 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었기에 그러한 것이다.
-제법 이름을 알리고 있는 후기지수 놈들이 이곳 남창을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사람들에게 행패 부리는 것을 아버지께서 제지하고 크게 혼내셨죠.
-누구였지?
-워낙 많았어요. 무림맹에 소속되어 훈련받는 후기지수들이었는데, 그 숫자가 오십이 넘었어요. 덕분에 놈들의 행패를 이곳에서 감히 막을 사람들은 없었고, 그게 도를 넘다 보니 결국 아버지께서 나서서 힘으로 제지하고 야단을 치셨던 것이죠.
-그래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요. 다음 날 일어나 술에 깬 후기지수들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 술에 취해 그랬다며 사죄까지 하고 좋게 끝났어요.
-그런데 왜?
-모르겠어요. 석 달 정도 지난 다음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요. 우리 대도곽가가 사도 무림과 내통을 한다는.
-모략이군. 그것도 조직적인 모략.
-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느 날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에는 칼을 찬 복면인들이 몰려왔어요. 큰 목소리로 사람들을 선동했고, 다시 복면을 한 이들이 계속 몰려들었어요. 나중에 몰려든 사람들이 이곳 남창 사람들이고, 평소 아버지께 굽실거리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당시 어렸던 제 눈에도 보였죠.
-모략과 배신이군.
-네.
-아버지께서 그때……?
-아버지가 제 마혈을 점했고,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가신의 등에 업혀 밤새도록 도망갔던 기억이 나요. 다음 날 돌아왔을 때, 집은 불에 타 버렸고, 아버지와 가신들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邪道)를 걷기로 결심한 건가? 우각당의 당주가 된 것도 그런 일환이었고?
곽우적은 아주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 눈을 직시하며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하지만 이 일로 형님께 짐을 지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형님이 아버지께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 주었고, 또 진짜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하였기에, 숨김없이 다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됐다. 그런 소리 들으려고 물은 거 아니다. 그보다 누구지?
-흉수요?
-짐작 가는 자와 세력이 있을 텐데.
곽우적이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 가장 크게 혼난 후기지수 한 명이 다음 날 사죄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누구지?
-화산파 장문인 자하검군(紫霞劍君) 이백면의 제자 감붕.
-함께한다.
-네? 무엇을요?
-복수.
-형님…… 그럴려고 말씀드린 게 아닙……
-아우.
-네, 형님.
-나에게도 사부님이 계셨다. 아버지이며 어머니셨고, 또 스승님이셨던…….
난 곽우적에게 사부와 복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해 주었다.
그날, 나와 곽우적은 밤새도록 술독에 빠졌다.
(중략)
댕댕댕댕!
술에 깨지도 않은 이른 아침부터 우각당에 경종이 울리고 난리가 났다.
나와 곽우적은 서둘러 침상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미 우각당의 무인 팔십여 명과 이곳을 찾아온 이백여 명이 살벌한 대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편 선두에 그가 있었다.
수룡검(秀龍劍) 천무휘.
천재 중의 천재.
내가 평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인정한 나보다 뛰어난 무재를 가진 사내가 바로 그다.
내 이름은 마악치.
놈은 천무휘.
아!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난 악당, 놈은 정의의 사도.
뭐, 이런 느낌?
마치 이것이 무림 영웅전이라면, 내가 악당이고 놈이 꼭 주인공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생긴 것도 잘생겨서 싫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사의 마음을 품고 있던 나였지만, 그래도 싫었다.
아무튼, 그는 나와 동갑임에도 이미 절정의 반열에 오른 고수였다.
더불어 산간벽촌의 나마저 그 별호와 이름을 들었을 정도로 정도 무림의 의협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 시절 칠룡사봉의 수좌가 바로 이 녀석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계집.
훗날 화산검후가 되어 내 몸 곳곳에 칼빵을 아흔여덟 방이나 먹인 천예휘가 천무휘 바로 옆에 있었다.
지금도 그녀에게 맞은 칼빵의 후유증으로 광마일기를 적는 것조차 힘겹다.
어쨌거나 당시 천예휘가 창백한 얼굴로 오로지 지독하게 차가운 살기만 뿜어 대면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회만 보는 것이다.
오빠가 움직이면, 곧바로 칼을 마구 휘둘러 전부 죽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때는 저 둘이 왜 저런 모습인지 알지 못했다.
술도 덜 깼고, 이른 아침부터 뭔 난린가 싶었다.
아! 젠장.
다시 생각해도 열받고 짜증 난다.
지금 광천동에서 홀로 죽어가며 광마일기를 쓰고 있지만, 진짜 너무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
바로 그날이다.
내 인생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날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다.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마두라 불리게 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