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추운 겨울이었지. 이곳 귀정사가 있는 덕라산 아래에 몇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이 있단다."
"오다가 봤어요."
"그렇구나. 다른 스님들과 떨어져 홀로 가가호호를 돌며 탁발을 하다가 너를 발견하였단다. 그때도 참 예뻤다. 지금도 예쁘고, 허허허."
"……."
"너를 귀정사로 데리고 왔단다. 그렇게 너를 키우는데, 어느 날 한 노스님이 그러시더구나. 네 눈이 나를 닮았다고."
"광기군요."
"허허, 그랬다. 나도 그제야 네 눈에서 그것을 보았단다."
"어땠나요? 많이 놀라셨겠어요?"
"무서웠단다."
"……."
"일단 보이기 시작하니 자세히 보게 되었고, 네가 품은 광기가 내가 평생 봉인하려 싸웠던 내 것보다 훨씬 크고 강력하다는 걸 알고야 말았다."
아! 돌겠네.
우주 괴물급 천재 진공 스님도 평생 싸웠는데, 난 어쩌지?
가만, 그러고 보니 나도 그냥 수재는 아니군.
내가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게 스물다섯 살이다.
현화승천신공을 제외하면 무공을 처음 익힌 게 열여덟 살.
그것도 사부 없이 혼자 익혔다.
와! 나도 우주급 괴물, 아니 난 그냥 천외천외천 괴물급 천잰가?
"악치야?"
"앗! 죄송해요. 잠시 잡생각이 들어서요."
"괜찮다. 심란할 만하지. 하지만 말했듯, 넌 이미 광기를 매우 훌륭히 제어하고 있단다. 이미 착한 아이고 훌륭한 도사니라."
"제 눈에서…… 지금은 그게 보이지 않아요?"
"내가 방금 어디까지 얘기했더냐?"
아! 이 양반이 또 말 돌리려고 하네.
하여간 사부나 이 양반이나 거짓말에는 영 재주가 없다.
그건 내가 아니라 사부를 닮았어.
"제 눈에서 지금 광기가 사라졌냐고 물었습니다, 스님."
"어허, 차가 식었구나."
"스님."
"알았다. 조금 보인다. 하지만 괜찮다. 혈기 왕성한 질풍노도의 시기엔 누구나 너 정도의 광기는 다 가지고 있고 보이기 마련이란다."
"휴우, 됐습니다.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잘 헤쳐나가야겠지요. 사부님도 그래서 저 혼자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을 테고요."
"암, 그렇지. 그 친구가 그런 것에는 다 깊은 뜻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저를 사부님께 맡기신 거군요. 스님께서 제 광기를 억제하지 못하실 것 같아서요."
"맞다. 네 사부는 일 년에 몇 번씩 이곳을 들러서 내 상태를 확인하고 또 많은 가르침을 주었단다. 때마침 네 사부가 왔고, 난 즉시 너를 네 사부에게 보여 줬느니라."
"그렇게 저와 사부가 사제지간의 연을 맺은 거네요."
"그렇지. 네게는 너무 미안하구나. 결과가 이렇게 좋지만, 그때는 내가 너를 떠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한겨울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뻔한 거 구해 주셨고, 아랫마을 돌며 젖동냥까지 해서 저 키워 주셨다는 이야기, 사부님께 다 들었어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구나."
진공 스님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스님. 복수 안 하세요?"
"복수?"
"천수신권 그 땡중한테요. 소림사한테도 해야 하고요."
"허허허, 다 잊었느니라."
"뭘 잊어요? 조금 전까지 아주 상세하게 저한테 이야기 다 해 주시고는요."
"풉, 녀석, 허허허."
"안 할 거예요? 제가 대신해 드려요?"
"악치야."
"네, 스님."
"내 사부님도 네가 네 사부에게 느끼는 것만큼 훌륭하고 좋으신 분이셨단다."
"……."
"그분께서 바라지 않으실 거다."
"그게 전부에요? 복수를 포기하는 이유가요?"
"힘겹게 봉인한 광기가 되살아나지 않을까 걱정도 되는구나."
"저도 복수 같은 거 하면 안 돼요? 그럼 제 광기가 막 발작하고 그럴까요?"
스님이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인자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장난기가 섞인 그런 미소였다.
"너와 나는 다르다. 난 광기를 품고 태어나 그것을 괴물로 키운 후에야 봉인하려 힘썼다. 하지만 너는 유현이 품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같은 광기라 하나, 내가 키웠던 광기와 네가 지금 품고 있는 광기는 다르다. 어쩌면 네 광기는 내 괴물이 아닌 용으로 진화하고 있지 않을까 싶구나, 허허허."
그럼 광룡(狂龍)인데?
복수를 해도 된다는 소리야?
하지 말라는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만 갸우뚱했다.
"네 뜻대로 하라는 말이니라. 대신, 사부의 가르침을 항시 마음에 품어야 하고, 내가 이곳에서도 널 언제나 그리워하며 응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스님."
"그래, 악치야."
"꼭 이곳에서만 응원하셔야 해요?"
"응? 그건 갑자기 무슨 말이냐?"
"아니, 막말로."
"막말?"
"앗, 죄송해요. 헤헤. 그러니까 제 말은요. 천하를 돌며 도를 닦다 보면 나쁜 상황에 직면하고 그럴 수도 있잖아요. 악당들에게 납치되어 장기가 적출되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그렇지. 네 사부와 함께 다닐 때는 세상이 그냥 극락인 줄 알았는데, 그 전의 삶을 되돌아보면 흉흉하고 무서웠을 때도 많았지."
"그래서 말인데요…….
매우, 아주, 너무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 * *
"내일?"
"네."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떠난다는 말이냐?"
"석 달하고 열흘이 됐죠."
"벌써 그렇게 됐나?"
"네."
"그럼 기왕 머무는 거 딱 넉 달 채워라. 아직 네게 가르쳐 주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스님, 정말 떠나야 할 때가 돼서 떠나는 거예요. 저도 너무 아쉬워요."
진공 스님의 눈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곧 주저앉아 땅을 치며 펑펑 울기라도 할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처음 사부 품에 안겨 귀정사를 떠날 때처럼 말이다.
"사부님."
내가 사부라 부르자 곧 울음을 터뜨리려던 진공 스님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말았다.
"감사해요. 절 살려 주시고, 키워 주시고, 무공이며 지식이며 많은 가르침 또한 아낌없이 주셔서요. 무엇보다…… 십구 년 만에 찾아왔는데…… 제 뒷모습만 보고도 절 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
결국 진공 스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말았다.
내 눈도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당장 진짜 사부님으로 모실 수는 없어요. 사부님께 허락받고, 그때 정식으로 구배지례도 하고 작은 사부님으로 모실게요. 괜찮죠?"
진공 스님이 터벅터벅 힘겹게 두 걸음을 걸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슬픔과 감동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흐르는 눈물을 좀처럼 주체하지 못해 내 어깨를 순식간에 흥건히 적시고 말았다.
곧이어 스님은 마지막 진심을 담아 나에게 말했다.
"흑흑흑, 악치야. 흑흑. 그런데 내가 왜 작은 사부냐? 흑흑흑. 유현 그 친구보다 내가 네 살이 더 많은데? 키도 더 크고, 흑흑."
아무튼 난 그렇게 귀정사를 떠났다.
이제 의제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사부에게 진공 스님이 절대무쌍의 친구라면, 나에겐 의제가 그러하다.
* * *
석 달 열하루가 지나서 난 귀정사를 떠났다.
많은 것을 알게 됐고, 배웠다.
무공에도 상당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의 진전을 보였다.
아직도 내 무공의 경지는 고수 끝자락이지만, 이미 그 지식과 이해 그리고 깨달음은 넘치고 철철 흐를 정도다.
이 상태라면 모르긴 몰라도 절정을 훌쩍 뛰어넘을 막대한 지식이 쌓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여전히 고수의 끝자락.
내 상태가 무림의 상식과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됐다.
그건 이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고 있으니 문제 될 것 없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보다 더 값진 진실을 알게 됐다.
이미 여러 번 광마일기에 적었기에 다시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진공 스님에게 직접 묻지 못했지만 유추한 부분이 있다.
진공 스님이 날 발견해 젖동냥까지 해서 키웠다.
그러다 나에게서 자신의 것보다 더 크고 강렬한 광기를 발견했다.
이를 본인이 다스릴 수 없다는 생각에, 나를 사부에게 맡겼다.
사부는 내 광기를 다스리기 위해 이십 년 동안 또 갑돌산을 벗어나지 않았고.
진공 스님과 사부 둘 다 내게는 아버지고 어머니며 스승이다.
그리고 귀혼책과 각혼필.
진공 스님은 몇 년이 지나서였더라도 사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다.
그리고 나의 행방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그러다 내가 마두가 되고, 다시 대마두라 불리며, 종국에는 광천마제가 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얼마나 슬펐을까?
석 달 열하루 동안 그가 나에게 보여 준 무한한 애정이, 내가 광천마제가 됐을 때의 그 슬픔을 방증하였다.
그래서 귀정사의 일천 년 신물인 자불팔층석탑을 부수고, 그 전설이 진실이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건넸을 것이다.
고맙고, 또 고맙고, 미안하다.
난 그런 마음을 계속 되새기며 귀정사가 있는 덕라산을 내려왔다.
이젠 앞으로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누가 뭐래도 역시 계효보다.
놈이 알고 있는 게 있고 모르고 있는 게 있다.
첫째!
난 놈을 죽일 수 있지만, 놈은 그걸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광마일기에 적힌 부분이 가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난 놈을 죽일 수 있다.
그건 확실하다.
닭대가리 새끼.
놈과의 싸움, 내가 유리하다.
둘째!
나와 놈은 함께 회귀한다.
나는 추혼책과 각혼필의 힘으로 회귀하고, 놈은 놈의 억겁의 굴레를 통해 회귀한다.
이미 여러 증거와 진공 스님의 진술로 확실하다.
추혼책과 각혼필, 억겁의 굴레, 거기에 광천마제인 나의 힘까지 섞였다.
하지만 놈은 이 사실을 모른다.
심지어 나는 현경의 고수다.
이젠 이것도 확실하다.
내가 무공을 보자마자 빠르게 익히고 깨달았던 건, 원래의 내 몸이 회귀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새로 익히고 깨닫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내 몸에 익히고 있었기에 이런 게 가능했던 것이다.
놈은 이 사실도 모른다.
물론, 내가 현경의 고수지만 그 무공을 기억하지 못하고 꺼내어 쓰지 못할 뿐이다.
에휴.
뭐, 이 부분은 딱히 유리한 것 같진 않다.
기억을 잃은 건…… 어쩌면 진공 스님처럼 내가 완벽히 현경의 반열에 오르지 못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그걸 마무리할 시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내가 현경의 반열에 오르자마자,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을 겪는 그순간, 추혼책과 각혼필 그리고 억겁의 굴레가 나의 힘과 부딪혔을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광천마제 시절 내 상단전이 다쳤던 것을 완벽히 치료하지 못하고 회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난 빠르게 무공을 습득하고 깨닫는다.
그리고…… 아! 결국 놈이 그걸 다 빼앗아 가겠구나.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내 무공을 빼앗는 것이지?
그걸 모르겠네.
억겁의 굴레와 연관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젠장.
그것도 문제고, 놈은 기억에 내공까지 함께 회귀를 한다.
난 여전히 내공도 기억도 없고.
광마일기가 있지만, 그래도 내가 절대 불리하다.
하지만 방법을 찾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무한 회귀의 핵심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놈은 모른다.
그것을 통해, 지금의 불리함은 언제든 역전할 수 있다.
셋째!
지난 회귀, 더 정확히는 지난 회귀의 마지막 부분.
광마일기에 기록된 마지막 순간에 대해 고심에 고심을 해 보았다.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금으로선 단정 짓기 힘들다.
아니, 섣불리 단정 지었다간 위험하다.
계효보를 죽일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오랜 고심 끝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광마일기를 놈에게 들켰을 가능성.
이건 심각한 문제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유불리.
혹시라도 내가 다시 죽게 된다면, 놈이 광마일기를 펼쳐 보고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정말 심각하다.
아니!
이건 너무 치명적으로 불리하다.
그나마 안도할 수 있는 점은, 문신은 들키지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문신은 너무나 멀쩡히 내 알 두 쪽 뒤에 숨겨져 있다.
내가 만약 놈이었고, 이런 문신을 발견했다면 피부를 통으로 뜯어 없앴을 테다.
아! 회귀하면 피부가 재생되려나?
그렇겠군.
글자도 남아 있고.
결국 이를 지우려면, 각혼필로 새까맣게 칠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겠네.
어쨌거나 광마일기는 들키고, 문신은 들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혹시 들켰더라도 멀쩡한 것을 보니, 이건 광마일기보다는 안심할 수 있다.
문제는 문장의 길이였다.
이전에도 죽어 가는 상황에서 급박히 네 글자씩 문신했을 것이 틀림없다.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분명한 단점이 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우선 손에 잡히기 쉬운 곳으로.
난 앞섶에 휴대하던 각혼필을 오른쪽 소매로 옮겼다.
언제든 재빠르게 꺼내 쓸 수 있게 위치를 바꾼 것이다.
그나저나 결국 광마일기인데.
돌겠네.
지금까지 내용도 여기에 다 적었는데.
지금도 적고 있고.
이거 결국 계효보가 다 볼 거 아냐?
난 걷던 걸음까지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이거 놈과의 싸움이 불리해도 너무 불리한 게 아니겠는가?
이 상태로라면 완패다.
놈에게 끝까지 이용당하다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어쩌지?
난 결국 그 자리에서 서서 해가 질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의미가 없…… 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 * *
야심한 밤, 덕라산 기슭.
그곳에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의 불빛에 의지해 광마일기를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모두 가짜 일기다.
그것을 완성한 후, 난 그 앞부분을 뜯었다.
진짜 일기 부분.
한 장 한 장, 그 내용을 확인하며 뜯었다.
이번 회귀로 깨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록한 부분을 모두 뜯었다.
그리고 난 그걸 한 장 한 장 입으로 쑤셔 넣어 씹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