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나는 밀떡을 좋아하거든. 그래서 항상 밀떡만 먹었지. 지금이야 다 잘 먹지만, 당시에는 입이 좀 까탈스러웠어, 하하하. 그런데 그날은 그 녀석이 밀떡이 아닌 쌀떡을 가지고 온 거야."
"그, 그래서요?"
"반나절 동안 마구 두들겨 팼다. 눈물 콧물 마구 흘려대며 무릎 꿇고 비는데, 허허허. 참, 나도 못된 짓을 많이도 했었지."
세상천지, 천수신권을 반나절 동안 마구 두들겨 팬 인간이 있다면 누가 믿겠는가?
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
진짜 우리 아빠 아니야?
또 한 번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보았다.
내가 엉뚱한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 진공 스님의 시선은 먼 산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그의 눈빛이 깊은 회상에 잠겨 있었다.
"요즘도 무림의 후기지수 중 뛰어난 몇몇을 가리켜 팔룡오봉이니, 칠룡사봉이니 이렇게 부르기도 하느냐?"
"예.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아요."
"허허, 무림은 여전하구나."
"……."
"내가 열아홉 살 때 딱 그랬다. 칠룡사봉 중 수좌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있었지."
역시 천재였어.
"당시 소림은 나를 포함, 원욱. 그러니까 천수신권 그 친구 말이다. 그 친구까지 포함해 무려 두 명의 칠룡사봉을 보유하게 됐지.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소림사 내부에서도 크게 기뻐하며 흥분하는 분위기였단다. 참고로, 나는 수좌였고, 천수신권은 칠룡사봉 중 끝자리에 간신히 턱걸이를 했단다, 허허."
이 양반, 자기 자랑하는 뻔뻔함마저 나와 닮은…… 에휴, 됐다.
"소림사에서 나에 대한 기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지원도 아낌없이 해 주었지. 소환단을 매년 네 알씩 복용하고, 그밖에 내공에 좋다는 영약을 간식처럼 먹었다. 거기에 더해 방장 스님은 물론, 이미 현역에서 은퇴하여 은거 중인 노스님들까지 은거를 깨고 나와 나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단다."
"와! 엄청나네요."
"허허. 엄청났지. 그럴수록 나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소림사 내부에서는 조심했지만, 윗 항렬의 스님이 없을 때 천수신권은 물론이고 다른 사제들이나 사형들에게까지 나는 왕 노릇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
딱 나잖아.
사부 앞에서 착한 척하고, 없을 땐 나쁜 짓 하는.
"천수신권이 내 사제였고, 나한테 많이도 혼났지. 음…….
그때를 많이 후회하는 얼굴이다.
"소림사 밖에서 나의 횡포는 더욱 심했다. 천하의 소림사 스님들도 애지중지하는 나인데, 밖의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대했겠느냐? 머리가 허연 노고수들도 허리를 굽혀 내게 인사를 했을 정도였다. 난 그들을 무시하고, 욕하고, 때리기도 했다."
좀 심한데?
아니지.
광천마제 시절의 나는 더했지.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소림사에 이를 알리지 못했다. 미래 무림의 주인이 누가 될지 뻔히 아는데, 자신들의 제자와 혈육들에게 나의 마수가 뻗을까 미리 두려워했겠지."
"……."
"아무것도 모르는, 어쩌면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지만 나란 기재를 쉬이 포기할 수 없었던 소림사에서는 나에 대한 지원을 더욱 늘렸다. 결국 대환단까지 나에게 복용하게 해 준다고 하더구나. 그때는 나도 많이 떨렸단다."
"대환단이라면 떨리는 정도가 아니죠."
"허허, 그렇지. 그렇게 귀한 것이지. 그리고 그날이 왔다. 소림사의 노승들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대환단을 받아 폐관을 시작하기로 한 날. 그렇게 소림사의 대불전으로 갔는데…… 허허허! 있으라는 대환단은 온데간데없고, 계율장(戒律場)이 열렸더구나."
"계율장이요? 그건 뭔가요?"
"소림사의 중한 계율을 어긴 스님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일이란다."
"갑자기 왜?"
"그때는 나도 몰랐지. 그냥 억울하기만 하고, 화만 나고 그랬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간 내가 행했던 악행을 모두 다 알고 있더구나.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참회동 십 년이란 벌을 받았다."
"십 년이요?"
"그래. 그랬지, 허허. 결국 난 참회동에 갇혔고, 반성은커녕 억울함과 분노만 계속 키웠단다. 그리고 그날 그 녀석이 왔어."
"설마…… 천수신권이 온 거예요?"
"그래. 참회동에 갇힌 지 딱 닷샌가 됐을 무렵, 그 녀석이 찾아와 말해 주더구나. 계율원에 내 행적을 고한 게 자신이라고. 나를 따라다니며 그간의 행적을 모두 몰래 기록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다 내가 대환단을 얻게 되자, 더는 참을 수 없어 터뜨렸던 것이지, 허허허."
"그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진공 스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화를 참지 못했다. 죽이려 했다. 그래서 몰래 참회동을 벗어나 천수신권이 늘 혼자 수련하는 곳을 찾아갔지. 그곳에서 놈을 죽일 생각이었다. 참고로 참회동은 지키는 사람이 없단다."
"아! 그렇군요. 아니, 그런데 천수신권은 지금도 살아 있는…… 그래서요?"
"은형술을 극대로 펼쳐 놈이 있는 곳까지 갔다. 놈이 혼자 수련하는 것까지 확인했지. 그래서 막 살수를 뻗으려고 할 때,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렸다. 덫이었다."
"덫이요?"
"그래. 그것까지 천수신권이 다 계획해 놓은 덫이었어. 천수신권의 사부와 다른 노승들까지 매복해 있더구나, 허허."
"그래서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쳤지. 그러다 걸렸다."
"……."
"어떻게 아셨는지, 내 사부님께서 그들을 막으셨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렸고. 뒤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연신 터졌지만, 난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숭산을 벗어나 천하를 떠돌게 된 것이다."
"소림사의 추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이건 내가 겪어 봐서 안다.
스님이란 작자들이 보통 지독한 게 아니다.
물론, 직접 겪은 건 아니고 광마일기에서 읽은 것이지만.
"안 쫓더구나. 몇 달 도망가다 그 이유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나 대신 사부님께서 벌을 받으셨다는구나. 단전이 파괴되고, 근맥이 잘리고, 참회동에 갇히는 벌. 이미 나를 쫓던 스님들을 막느라 큰 내상을 입었던 사부님께서는 단전까지 파괴되어 참회동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며칠이 되지 않아 열반에 드셨다고 하더구나."
"천수신권이라면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요."
"허허, 마치 네가 그 친구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뭐, 그냥 들리는 소문이 꼭 좋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때야 고작 열여섯 어린 스님 아니었겠느냐? 아무리 칠룡사봉이니 해도, 그 친구가 어쩌고 할 규모의 사건이 아니었지. 더군다나 모두에게 존경받던 내 스승님까지 이미 나의 벌을 대신 받은 상황이었으니, 쫓지 않은 것이었겠지."
"어쩌면 소림의 흉을 감추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내 말에 진공 스님은 나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돈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패악질뿐이었던 내가, 은신하며 도망을 쳐야 했기에, 그때는 그냥 딱 거지꼴이었다. 그러다 유현 그 친구를 만난 것이다. 네 사부."
"사부님을요? 어땠어요?"
"미소년 도사가 날 보며 웃더구나."
"아! 그때도 잘생겼겠구나. 그래서요?"
"때렸다."
"네? 사부를 때렸다고요? 왜요? 잘생겨서 때린 거예요?"
"허허허, 녀석도, 참. 아니다. 무서워서 때렸다. 내공까지 죄다 끌어 일 수에 목숨을 끊으려고 권(拳)을 날렸다."
"우리 사부님…… 무공 못하는데."
"보는 순간 두려웠다. 미소년 도사가 날 보며 미소를 짓는데. 그 맑은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 무서웠고, 후기지수 중 내공에 있어서는 압도적이었던 내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내공을 품은 그가 무서웠다."
"……."
"그래서 살수를 날렸다. 그런데 유현 그 친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
"계속 미소만 지으면서요?"
"맞다. 어찌 알았느냐?"
"말했잖아요. 우리 사부 무공에 무 자도 모른다고요. 웃는 것만 잘해요."
"허허허. 그 말도 맞구나. 그 친구 아직도 그렇게 웃는지 모르겠네. 못 본 지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
"잠깐, 그런데 왜 찾아오지 않으셨어요? 우리 사부님이야 갑돌산을 떠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양반이니 그렇다 쳐도, 스님께서는 오실 수 있었잖아요. 저 보고 싶어서라도요."
"허허,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내 심정을 너도 이해해 줄 것이라 믿는다."
여기에도 무슨 사연이 있나 보군.
"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우리 사부님 그때 크게 다치셨어요?"
"열아홉 살의 나이로 이미 초절정의 반열에 올랐던 나다. 작심하고 살수를 뻗었는데 어디 다치는 것으로 끝났겠냐?"
이 양반 진짜 우주 괴물급 천재다.
"우리 사부님…… 아직 살아 있잖아요. 말씀드렸잖아요. 요즘 뜨겁게 사랑도 하고 있다고요."
"허허허, 그렇지. 내 주먹이 막 그 친구의 얼굴에 꽂히려던 그 순간, 급하게 내공을 모두 거두었다. 막을 생각도 안 하고, 엄청난 내공을 움직여 호신강기를 펼칠 생각도 안 하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나는 내상을 입었고, 네 사부는 내 주먹에 맞아 뒤로 구르고 쌍코피를 흘렸단다."
"결국 스님이 더 큰 손해를 보셨네요."
"손해야 내가 봤지만, 어차피 내 잘못 아니겠느냐? 네 사부는 그저 날 보고 웃은 게 전부였는데, 내가 다짜고짜 살수를 뻗었으니 말이다."
"그렇긴 하네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주먹 한 방에 친구 먹은 거예요?"
"처음부터 친구는 아니었다. 그냥 네 사부가 그러더구나. 쌍코피와 함께 묘한 미소를 지으며 ‘같이 가겠소?’라고, 허허허."
"어딜 같이 가요?"
"모르지. 그냥 그 소리만 했으니까."
"그래서요?"
"따라갔다. 정처 없이 떠돌더구나. 나도 그냥 묵묵히 네 사부의 뒤를 따라 천하를 돌아다녔느니라."
"이 집 저 집 돌며 탁발도…… 했죠?"
"허허허, 세상인심이 그렇게 좋은 줄은 나도 그때 처음 알았다."
세상인심이 좋은 게 아니라, 우리 사부님만 가능한 거겠죠.
이 얘긴 길게 해 봤자, 스님이나 저나 상처만 받을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해야겠네요.
"우리 사부님답네요."
"그렇게 몇 달을 네 사부의 뒤를 말없이 따라다녔는데, 어느 날 네 사부가 그러더구나. 이젠 좀 잠잠해졌냐고."
"뭐가 잠잠해져요?"
"분노, 살심, 증오심, 억울함, 욕심…… 이런 것들 말하는 것 같더구나."
"잠잠해졌어요?"
"그렇다. 나도 그제야 깨달았다. 네 사부를 그냥 따라다니며, 네 사부가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는 것을."
"신기하네요."
"신기하지. 고작 열여섯 살 먹은 어린 도사가 그러할 수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허허허."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요?"
"떠돌다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됐단다."
"여기 귀정사요?"
"그래. 왠지 마음에 가더구나. 산중 깊은 곳에 있는 조용하고 작은 사찰이."
"저도 여기가 좋아요.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에요."
"허허, 다행이구나. 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니."
"사부님은요?"
"네 사부는 현화문이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세상을 떠돌며 도를 수행 중이었고."
"그래서 스님만 이곳에 머물게 된 거예요?"
"그렇다. 네 사부가 며칠 함께 있으며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나쁜 기운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떠났단다. 그 후에도 주기적으로 이곳을 들러서 내 상태를 확인해 주었고. 내가 새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게, 모두 네 사부 덕분이었단다."
와! 우리 사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다.
좀 많이 멋있다.
"지금은 그냥 보아도 수양이 깊은 스님 같아요."
"그렇지. 네 사부가 말했던 그 나쁜 기운을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으니 그런 것이니라."
"그런데 그 나쁜 기운이란 게 뭐예요? 설마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그런 천성(天性) 같은 거예요?"
"그렇단다. 오십 년 넘게 수행하며 깨달았는데, 난 나쁜 기운을 꽤 많이 품고 태어났었더구나, 허허허. 그래서 그 기운을 봉인하기 위해 많이 노력해야 했고. 널 보러 가지 못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난 오십 년 전 이곳 귀정사에 발을 들인 후, 한 번도 이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단다."
진공 스님 같은 천재가 오십 년 동안 싸워야 할 정도의 나쁜 기운이란 게 과연 뭘까?
궁금하다.
무지막지하게 어마어마한 것일 테다.
어쩌면 진짜 천살성에 버금가는 기운일 수도 있다.
"스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기운이기에 스님께서 오십 년 동안 귀정사 밖을 한 번도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나요?"
"그게 말이다…….
엥?
왜 말하길 주저하지?
내 눈치까지 본다.
"그냥 나쁜 기운 정도로 알고 있으면 될 테다, 허허허."
뭔가 있다.
분명 있다.
"알고 싶어요. 진지하게요."
"그게…… 굳이 알 필요가 없는데."
"더 궁금해졌어요. 스님도 사부님처럼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시는 건 아니겠죠? 말로만 훌륭한 도사니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죠?"
"물론이지."
"그럼, 알려 주세요. 그 나쁜 기운이 뭔지."
"어험, 어험."
진공 스님은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다시 내 눈치를 슬쩍 살핀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광기(狂氣)다."
"……?"
아!
젠장!
빌어먹을!
여기서 광기가 왜 나와?
또 혼란스럽다.
광기라니!
설마…… 이 양반하고 나하고 뭔가 맞는 구석이 있다고 느낀 게, 다 그것 때문이었어?
아빠가 아니라, 그냥 같은 광기에 대한 동질감이었던 거야?
돌겠네.
"악치야."
사부만큼은 아니지만, 진공 스님이 한없이 자비롭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불렀다.
"네가 광기를 품고 태어났다는 사실, 유현 그 친구가 네게도 말을 해 준 모양이구나."
난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생은 아니고, 전생에 말해 줬기에 그냥 그랬다.
"넌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내가 괜히 한 말이 아니니라. 넌 정말 착한 아이고, 이미 훌륭한 도사니라. 광기에 휩싸여 악인이 되거나 대마두가 될 일은 없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거라, 허허허."
진공 스님.
저 악인이예요.
그리고 저요.
대마두 맞아요.
천하제일 악인이 저고, 천하제일대마두가 바로 저라고요.
난, 그렇게 마음으로만 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