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내가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알고 있었느냐?"
"네.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소림사 출신이시라고요."
"어허, 그 친구 별소리를 다 하는군. 허허허."
말 돌리지 마세요.
궁금해 죽겠어요.
"스님 무공 경지가 어떻게 되는지 여쭈어보아도 돼요? 진짜 현경의 벽을 깬 거예요?"
"다 부질없는 일이란다, 허허허."
아니, 이 양반이!
"궁금해요."
내가 고양이 눈을 뜨고 쳐다보니 스님이 또 웃는다.
그냥 내가 마냥 좋은가 보다.
나도 스님이 좋다.
우리 사부님처럼.
은근 나랑 잘 맞는 구석도 있고.
하지만 우선 궁금한 것부터 풀고 싶다.
물론 무적 할매 때처럼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차분하자.
"너도 무공을 익혔느냐?"
"아니요. 그냥 건강 삼아 조금요."
"현화승천신공을 익히지 않았느냐? 어찌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게…… 실은 복잡한 사연이 조금 있어요. 그건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허허, 그래, 거의 이십 년 만에 돌아왔으니, 오래 있다가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네."
슬쩍 내 눈치를 살짝 살핀다.
장난기 섞인 미소와 함께였다.
그런 후 진공 스님이 말을 이었다.
여전히 자신의 무공 경지를 내가 궁금해하고 있음을 알고 일부러 그런 것이다.
"무림인들이 흔히 말하는 화경의 경지에 올라선 지는 꽤 됐구나."
"그래서 현경은요?"
"도만 닦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느냐?"
"네. 마을에 갔다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 들어 보았어요."
"그게 참 말하기 뭐한 구석이 있구나, 허허허."
진짜 현경의 고수인가?
그렇다면 스님이 당대의 천하제일인이다.
"말로 설명이 어려운 상황이다. 내가 현경의 고수라고 단정 짓기 힘든 그런 상태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힘들겠지?"
"네."
"그렇지, 맞다! 사부에게 물어보지 않고? 네 사부는 이미 확실한 현경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았을 텐데."
"네? 우리 사부님이요?"
"그래. 그 친구라면 진즉 그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부님은 무공을 익히지 않으시잖아요. 최근에 제가 조르고 졸라 삼재검법 정도만 건강을 위해 수련 중이세요."
"허허허, 유현 그 친구가 삼재검법이라니. 천하가 어쩌면 삼재검법으로 천하제일인에 오른 도사를 볼지도 모르겠구나, 허허허. 어허허허허!"
와! 우리 스님,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시네.
그나저나 우리 사부 진짜 대단하긴 한 것 같다.
진공 스님마저 저리 말하고 있지 않겠는가.
"스님은 언제 화경의 벽을 깨셨나요?"
"그게 언젠지 까마득하구나. 아마도 네 나이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 나이 아세요?"
"이 녀석, 허허허. 내가 내 나이를 잊어도 어찌 네 나이를 잊겠느냐? 올해 스물한 살이 되지 않았더냐?"
"맞, 맞아요, 휴우. 그럼 스물한 살에 화경의 반열에 오르신 거네요?"
"허허허, 뭐, 그렇지. 허허."
이 양반, 천재다.
그것도 무지막지한 괴물급 천재다.
스물한 살에 화경의 고수라니?
말이 되는가?
정말 많은 무림인이 기연에 기연을 반복해 가까스로 초절정 고수가 됐다고 치자.
그들도 다시 수십 년 죽을 때까지 죽어라 수련해도 못 넘는 게 화경의 벽이다.
그런데 스물한 살이라니.
진짜 돌겠다.
뭐가 이렇게 쉬워?
역시 유유상종(類類相從), 초록동색(草綠同色), 물이유취(物以類聚), 끼리끼리 뭐 그런 건가?
사부와 이 양반이나, 그래서 서로 친구인 거야?
휴우.
난 이제부터 그냥 수재 정도로 하겠다.
사부도 그렇고, 무적 할매도 그렇고, 진공 스님도 그렇고, 내가 아는 또 한 녀석까지.
주변에 왜 이리도 천재가 많은 걸까?
돌겠네.
난 오늘부터 수재다.
"스님, 혹시 우리 사부님하고 연배가 어떻게 되세요?"
"내가 유현 그 친구보다 다섯 살이 더 많단다. 그래도 보기에는 내가 더 젊어 보이지? 허허허허."
그건 아니죠.
사부는 이십 대의 꽃다운 처자들도 오빠라고 부르는데요.
잠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스물한 살에 화경의 벽을 깼으면, 지금은 정확히 칠순이다.
아! 현경의 벽을 깨는 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진공 스님 같은 천재도 사십구 년 동안 그 벽을 깨지 못했던 거야?
아니지.
아까의 말은 좀 애매하다.
현경과 화경, 그 중간쯤 되는 경지란 말인가?
대충 그리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앗! 또 생각났다.
내가 광천마제 시절 스님을 만났을 나이가 서른다섯 살이다.
그럼 당시 스님은 여든넷, 팔십사 세였다는 뜻이다.
그럼 어쩜, 그 당시 내가 만났던 스님은 진짜 현경의 반열에 오른 무지막지한 고수였을 수도 있다는 거다.
아니, 당시의 느낌을 적은 광마일기로 추론해 봤을 때, 거의 확실하다.
당시의 나는 현경의 고수가 실제할 거라고는, 더군다나 이렇게 작은 사찰에 현경의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같은 화경의 고수일 거라 예단했던 거다.
하하하!
스님 말마따나, 내가 지금 웃겨서 웃는 게 아니다.
진짜 돌아 버리겠군.
참, 세상 한번 재밌다.
"아까 했던 말 이어서 물어볼게요."
"허허, 그래. 추혼책과 각혼필의 힘에 틈이나 균열을 줄 수 있는지 물었지?"
"네."
"말했듯 확신할 수는 없구나. 내가 내 힘을 전력으로 쏟아부었을 때 추혼책과 각혼필의 힘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말이다."
"만약 삼 갑자 요괴의 요공과 스님의 힘, 그리고 추혼책과 각혼필의 힘이 섞여 버리면요?"
"허허허,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다시 말하지만, 나는 추혼책과 각혼필을 본 적도 없단다. 그리고 이건 또 다른 비밀인데…….
"비밀요?"
"그래. 이건 진짜 중요한 비밀이란다."
"네, 스님."
얼마나 중요한 비밀이기에 목소리까지 죽이고 말하는 것일까?
나까지 얼떨결에 긴장이 된다.
"사실 전대의 주지 스님께서 추혼책과 각혼필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말이다."
"네."
"난 안 믿었다, 큭큭큭. 사실 요즘도 가끔은 그게 진짜 저 자불팔층석탑 안에 있는지도 의심이 든단다, 큭큭. 이 얘기 진짜 어디 가서 하면 안 된다, 허허허."
"아, 네. 넵."
난 진공 스님과 그날 늦은 밤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에도 그랬고, 또 다음 날에도 그랬다.
사찰의 밥도 맛있게 먹고, 다른 스님들과 인사도 하고 그랬다.
어린 빡빡이들과 놀아 주는 시간도 있었다.
보름 넘게 사찰에 머물렀다.
궁금한 건 거의 다 물어봤다.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는 건 돌려서 물어보기도 했고.
사실 추혼책과 각혼필을 내가 가지고 있고, 현재 무한 회귀 중이라고 말할까 고민도 해봤다.
하지만 금세 포기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고, 내 고통의 업보를 진공 스님과 나누는 것 같아 싫었다.
내 죄는 내가 씻고, 내가 할 일은 내가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래도 진공 스님께 많은 것을 물었고, 많은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정말 많이.
진공 스님은 나를 두고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모두 알려 주었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왜 기억을 잃고 회귀하는지.
왜 광천동에서 깨어나는지.
단전은 왜 사라졌는지.
현경의 고수는 어떻게 자연의 기운을 사용하는지.
중요한 몇 가지는 끝내 그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엄청난, 아니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내 무한 회귀는 계효보의 ‘억겁의 굴레’가 아닌 추혼책과 각혼필의 힘으로 시작됐다는 것.
둘째, 무한 회귀의 주된 힘이 추혼책과 각혼필의 발동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 광천마제 마악치의 힘과 계효보의 ‘억겁의 굴레’가 섞여 무언가 비틀어졌을 수도 있다는 것.
셋째, 이 무한 회귀를 끝내려면 내가 광마일기에 적은 모든 업보를 씻어야 한다는 것.
더불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도 유추해 깨달았다.
감정.
기억이 없는데 감정이 격렬했던 이유.
글로만 읽었던 사부를 보고도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초향을 보았을 때는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이 슬프고 미안했다.
무적 할매에게는 많은 것을 받으면서도 온전히 정을 주기 힘들었다.
그리고 진공 스님을 보았을 때도 감정이 폭발했다.
처음 보았는데 그를 알아보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두 광천마제 시절의 내가 크고 깊게 감정의 교류를 나눈 사람들이다.
아마 그런 인물들은 앞으로도 몇, 더 있을 것이다.
역시 기억을 잃었는데도 감정이 생겼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어.
만약 이것이 계효보의 ‘억겁의 굴레’였다면, 이런 현상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내 무한 회귀는 ‘억겁의 굴레’가 아닌 추혼책과 각혼필이 발동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즉, 내가 원래의 내 상태로 회귀한 것이다.
광천마제 시절의 내 몸이 열여덟 살의 신체로 바뀐 게 아니다.
그냥 그 상태 그대로의 몸으로 회귀하게 됐다.
그랬기에 기억은 잃었지만, 마음이 그들을 기억해 감정이 절로 일었던 것이다.
기억을 잃은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감정과 회귀한 내 신체에 대해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와 관련돼 한 가지 더.
확실히 내가 현경의 반열에 올랐다.
지금도 그 신체를 가지고 있다.
열여덟 마악치가 아닌, 서른여덟 살의 광천마제 마악치가 현경의 벽을 깨고, 환골탈태해 반로환동까지 하여 회귀한 것이다.
이젠 구 할 이상 확신한다.
기억을 잃은 것과 무공을 잃었고, 광마일기에 적힌 구결과 주석만 보고도 금세 고수의 경지가 되는 것, 또 아무리 깨닫고 발전해도 절정의 벽을 깰 수 없는 이유.
또 교묘하게 광천마제 시절과 현재 내가 살아가는 나이의 무공 경지가 동일한 것까지.
모두 회귀와 연관되어 있다.
아마도, 내가 무공을 되찾는 길은 그것뿐인 듯하다.
절정의 벽을 깨고, 초절정에 오르고, 다시 화경의 반열에 들려면 그들을 만나야 한다.
의제, 수룡검, 만검존, 마교주에 더 많은 이들까지.
또 그들을 만나 엇나간 인연을 바로 잡아야 무한 회귀를 멈출 수 있다.
사부를 구산사괴로부터 살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더.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젠 죽일 수 있다.
계효보, 닭대가리 새끼!
뭐? 자신을 죽이면 나도 죽어?
열 번째 죽음에서 내가 그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계효보가 그런 약속이나 진실을 나에게 토로했기에 내가 그걸 광마일기에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국, 놈은 이 무한 회귀가 자신의 ‘억겁의 굴레’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는 줄 안다는 것이다.
닭대가리 새끼.
감히 인간을 상대로 수작질을 부리려 하다니, 큭큭큭.
팔팔 끓는 기름에 튀겨 버릴까 보다.
나의 무한 회귀는 억겁의 굴레가 아니다.
최소한 주(主)가 추혼책과 각혼필인 게 확실하다.
억겁의 굴레는 조(助)일 뿐이다.
고로, 나는 이제부터 놈을 죽일 수 있다.
* * *
다시 보름이 더 지났다.
난 이제 절반은 귀정사의 식구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한 달이나 됐음에도 진공 스님은 나를 볼 때마다 눈에서 그냥 꿀이 콸콸 흘러넘친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도 알았다.
귀정사의 다른 스님들은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심지어 진공 스님이 무공을 익힌 것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몇몇 노스님만이 진공 스님이 소림사 출신이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정도지만, 그것을 또 무공과 연관하지는 못했다.
소림사에도 분명 무공을 익히는 무승이 있지만,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은 스님들도 많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무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덕분에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내 몸 상태도 봐주었다.
매우 놀라워하며 무적 할매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역시 단전이나 내공을 되찾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현경의 고수가 자연의 기운을 끌어다 쓰는 방법은 알았다.
현경의 고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뭐, 맞는 말이다.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 자세히는 묻지 못했다.
내가 어쩌면 지금 현경의 고수일지 모른다고 말하면, 날 미친놈이라 생각할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난 귀정사에서 진공 스님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며, 사부와 단둘이 살 때만큼이나 마음 편히 지내고 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다 같이 마치면, 늘 그렇듯 진공 스님과 나만의 차 마시는 시간을 따로 갖는다.
배움의 시간이다.
오늘은 조심스럽게 물어봐야겠다.
소림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연배로 보아 천수신권 그 땡중과 진공 스님이 같은 항렬이었을 텐데 말이다.
정확히 진공 스님이 천수신권 그 땡중보다 네 살이 많다.
"스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허허, 오늘도 궁금한 게 있더냐?"
"제가 좀 많이 물어보죠?"
"아니다. 네가 묻는 건 모두 재밌구나. 그래, 오늘은 무엇이 궁금하더냐?"
"그런데 이건 좀 조심스럽긴 한데. 혹시 말씀하시기 싫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허허. 우선 들어나 보자. 궁금한 게 뭔지."
난 스님의 눈치를 살짝 살핀 후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소림사에서는 어쩌다가 나오시게 된 거예요?"
"음, 사고가 조금 있었지. 내가 어렸을 적에는 꽤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거든. 나쁜 짓도 많이 했고."
이 양반, 진짜 나랑 같은 과였네.
뭐, 나는 어렸을 적이 아니라, 나이 먹고 나서 사고도 치고 나쁜 짓을 했지만.
"혹시 소림사에 원욱 대사도 아세요? 연배가 비슷한 걸로 아는데."
"허허, 원욱? 알다마다. 요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사람들이 죄다 천수신권이라고 부르더구나."
"맞아요! 천수신권 원욱 대사. 가까운 사이였어요?"
"가깝기보다는…… 그래, 내가 네게 숨길 게 뭐가 있겠느냐? 솔직히 말하마."
무슨 관계였지?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진공 스님의 입에 귀를 기울였다.
"떡돌이였다. 그것도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떡을 가져다 바치는 전용 떡돌이, 큭큭큭."
이 양반, 갑자기 조금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