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사부!"
"또 ‘님’ 자가 빠지는구나, 허허허."
"사부님! 그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해 주시는 거예요?"
내가 목소리를 조금 높이자, 사부가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화가 난 것이냐?"
"아니,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중요한 일이라…….
"음, 그렇구나. 중요한 일이지."
사부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실은…… 예전의 내가 세상을 떠도는 것을 멈추고 사문으로 돌아와 정착한 이유와 같다."
내가 기억이란 걸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사부는 갑돌산을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오는 손님도 없었다.
광마일기에 그리 적혀 있다.
그것도 나와 연관이 있었던 거였나?
나 때문에?
아니, 귀정사의 진공 스님과도 얽혀 있는 거였어?
설마……?
"내 수양이 진공보다 조금 더 깊다."
엥?
우리 사부, 갑자기 왜 자기 자랑을 하실까?
"허허허, 진공 그 친구가 그리 말했다."
"아, 네. 그런데요?"
"너를 잘 키워 달라고 하더구나. 참도사로 말이다. 그래서 사문으로 데려와 본격적으로 너와 함께 도를 닦은 것 아니겠느냐? 네가 다른 생각 없이 도 닦는 데 전념하라고 미룬다는 것이 이제야 알려 주게 됐구나. 미안하다, 악치야. 허허허."
"그게 전부에요?"
"그게 전부다, 허허. 그게 전부지, 허허허허."
다시 말하지만, 우리 사부 거짓말 못 한다.
웃는 게 평소와 다르다.
분명 뭔가 있다.
귀정사의 진공 스님이 자신보다 수양이 깊은 사부에게 나를 맡겼다.
사부는 떠돌이 생활까지 접은 것은 물론 사문에 틀어박혀 이십 년이나 오로지 도를 닦는 일에만 전념했다.
우연일까?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물론, 사부가 탁발하는 것은 호락호락하지만, 다른 건 절대 그렇지 않다.
원인이 없는 결과도 없다.
그렇다면?
설마…… ‘광기(狂氣)’ 때문인가?
지난 회귀 때 사부가 나에게 말했던 그 광기?
내가 가지고 태어난 광기가 그토록 대단한 것이었어?
내 천재적 무재도 그 때문이었고, 사부가 죽은 후 광천마제가 된 것도 그냥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내가 원래 광인(狂人)이어서?
아! 돌겠네.
설마 전설에나 나온다는 천살성(天殺星) 뭐 그런 건가?
아니다.
내가 미친 짓은 많이 했고, 나 때문에 많이 죽긴 했지만, 내가 직접 죽인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아니, 나로 인해 죽은 사람을 다 합쳐도 천살성까지는 아니다.
그냥 광기를 태어난 광인이었나 보다.
그것도 천하를 집어삼킬 만한 엄청난 광기를 가지고 태어난 광인.
이를 막으려고 귀정사 진공 스님이 노력했고, 사부에게까지 맡겼으며, 다시 사부는 이십 년 가까이 도를 닦는 데에만 전념한 것이리라.
"깊이 생각할 필요 없다, 악치야. 너는 아주 잘하고 있다, 허허허."
사부가 또 감동적인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한, 천하에서 너보다 착하고 올바른 아이는 없단다. 네가 최고로 착한 제자고 최고의 도사니라. 잘 커 줘 고맙구나, 허허허."
눈물이 찔끔 나온다.
어쩌면 내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만약 내 추론이 맞다면, 사부는 내 광기를 억제하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했을 터였다.
자신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우리 사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다.
마음이 더 잘생겼다.
앞서 도를 얼굴로만 닦았다는 말 취소다.
사부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다.
오늘따라 사부의 미소가 더 감동적이다.
"사부님, 혹시 제가 귀정사에 가면 진공 스님께서 절 알아보실까요?"
"글쎄다. 내가 너를 품에 안고 귀정사를 떠나기 전날, 그 친구가 땅에 주저앉아 펑펑 울다가 나에게 걸리긴 했지, 허허허. 네가 다 커서 얼굴을 알아볼지는 모르겠지만, 네 이름을 말한다면 곧바로 알아차릴 거다."
이내 사부가 고개를 잠깐 갸우뚱한 후 말을 이었다.
"아니다. 네가 단전을 잃어 내공이 사라졌다지만, 그래도 이십 년 가까이 도를 닦은 기운이 있기에, 너를 보자마자 우리 현화문의 기운을 감지하고 너를 알아볼지도 모르겠구나. 그 친구 고수거든, 허허허."
"고수요? 얼마나 고수인데요?"
"음, 내가 무공 쪽은 잘 알지도 못하고 약하지 않겠느냐?"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마교주가 들으면 땅을 치면서 억울해하겠지만요.
"그 친구가 본래는 소림사에서도 알아주던 신동이었다."
"소림사요?"
이건 또 뭔 소리야?
갑자기 소림사가 왜 여기서 나와?
"허허, 너도 들어보았느냐? 소림사라고 스님들이 하늘을 날고 바위를 쪼갠다고 하더라, 허허허."
웃지 마세요.
사부는 산도 한 방에 날려 버리잖아요.
"아무튼 소림사에서 촉망받던 기재였는데, 어떠한 사고로 소림사에서 나오게 됐고, 그 후로 귀정사에 귀의하여 계속 불도를 닦았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얼마나 고수인데요?"
"모른대도. 어느 정도가 고수고 또 그 고수가 얼마나 고수인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 허허허."
"지금의 사부님하고 비교하면요?"
"나? 허허허. 나야 그냥 건강 삼아 삼재검법을 익히는 건데, 어찌 나와 비교한다는 말이냐? 녀석도, 허허허."
저도 사부님만큼만 건강해지면 좋겠네요.
그럼 당장 내일 화산파부터 박살 내 버릴 텐데요.
"진짜 궁금한 거냐?"
"네."
"음, 최소한 내공 면에서는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대략 이십 년 전에는 그랬다."
미친!
"이십 년 전 사부님 내공이 얼마였는데요?"
"칠 갑자."
미친!
미친!
"혹시 환골탈태도 했대요?"
"했다고 하더구나."
최소 화경이다.
그것도 이십 년 전이다.
아!
나, 광천마제 시절 무적 할매 말고 한 번 더 죽을 뻔했었군.
서른다섯 살에 진공 스님을 만났으니, 그는 최소한 삼십사 년 이상 화경의 고수였던 거다.
화경의 반열에 오른 지 십 년이 됐던 나하고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어.
어쩌면 당시 천하제일인은 무적 할매가 아니라 진공 스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천하에 은둔 고수가 왜 이리도 많은 걸까?
그리고 나는, 하하하하하하!
눈깔이 썩었었나 보다.
목숨을 걸고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를 고수를 눈앞에 두고 그리 방심을 했으니 말이다.
아니, 아니다.
광마일기에는 그리 적혀 있다.
진공 스님을 통해 사부를 보았다고.
아! 그랬던 거였어.
사부와 진공 스님이 유일한 벗이었기에 내가 그를 통해 사부를 보고 느꼈던 거다.
역시,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나 보다.
그리고.
이제 거의 확실해졌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그랬던 거였어.
사패천의 고수들을 두들겨 패 나를 끌어들였고, 사과하는 척하며 추혼책과 각혼필을 고의로 건넨 게 맞다.
내가 광마가 된 것이 마음 아파 그랬을까?
아마 그랬을 것 같다.
추혼책과 각혼필을 건넨 이유는 뭐지?
두 기물의 힘은 무엇일까?
그건 곧 알게 되겠지.
휴우, 마음이 무겁군.
사부도 그렇고 진공 스님도 그렇고, 초향까지.
나를 이토록 사랑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나는 대마두가 됐을까?
대마두가 된 이유.
어쩌면 그것이 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의 곡해가 날 그리 만들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이 또한 분명한 어떤 원인과 결과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알겠지.
"사부님, 저 이만 가 볼게요. 귀정사에도 꼭 들러 인사드릴 거고요."
"악치야…….
사부가 잠시 입을 닫고 살짝 주저하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이런 말 해서 네가 혼란스러울까 봐 두렵구나."
"편히 말씀하세요. 그럴 나이 아니잖아요."
"그래, 허허. 음, 그러니까…… 그 친구는 아버지요 어머니의 마음으로 널 아끼고 사랑했단다."
"사부님."
"……?"
"제 아버지는 사부님이시고, 제 어머니도 사부님이세요."
사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 * *
말을 한 마리 샀다.
사부 덕분에 말을 사고도 전낭이 묵직하다.
초향이 챙겨 준 당과도 한 주머니 가득 있고.
호북 신가산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 장소로 향했다.
심토만력근이 묻혀 있어야 할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없다.
빌어먹을 닭대가리 새끼가 선수를 쳤다.
땅이 삼 장 깊이로 파여 있고, 심토만력근은 없다.
대신, 다른 게 있다.
좀 놀랐군.
순박한 촌부 네 명.
내 배를 갈라 장기를 적출해 마단을 만들려 했던 그놈들.
갈기갈기 찢기고 피투성이가 된 놈들의 시체가 깊은 구덩이 안에 처박혀 있다.
그렇지 않아도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닭대가리가 내 수고를 덜어 주었군.
그나저나 젠장!
단전까지 파괴된 놈이 심토만력근을 복용해서 어디에 쓴다고.
멍청한 닭대가리 같으니라고.
잠깐.
설마…… 회복한 건가?
요괴는 그것도 가능한가?
어쩌면 놈도 나와 같이 멀쩡한 몸으로 회귀할 수도 있겠지.
설마 놈은 내공까지 함께 회귀하는 것인가?
거기에 기억도 회귀가 되는 거고?
진짜 돌겠네.
나만 너무 불리하잖아.
빌어먹을.
됐다.
아직 놈에 대해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순 없다.
또, 우리 인간의 상식으로 놈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진짜 큰 문제는.
만약 내 가설이 맞다면, 내가 죽을 때마다 놈도 계속 회귀한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놈은 일 갑자의 내공을 얻을 것이다.
종국에는 우리 사부의 내공마저 넘어설 거고.
아! 이거 심각하네.
죽지 말자.
죽으면 안 된다, 마악치.
이제부터는 계속 산다.
그래야 한다.
* * *
산서 진중 덕라산.
귀정사가 있는 곳이다.
드디어 도착했다.
광천마제 시절 한 번 와 봤던 곳이다.
그것도 이천 명가량의 사패천 고수들을 이끌고.
하지만 기억은 당연히 없다.
덕라산 어디에 귀정사가 있고, 진공 스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말을 덕라산 아래 객잔에 맡겨 놓고 산을 올랐다.
객잔 주인에게 묻긴 했는데,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하는…… 아! 저기다.
뜨문뜨문하지만 앞서가는 사람과 내 뒤를 따라 산을 오르는 참배객들 있다.
길도 한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제법 숫자가 되는 사람들이 귀정사를 방문하기 위해 덕라산을 오르고 있다.
* * *
알까?
모를까?
진공 스님이 정말 나를 기억할까?
귀정사에 도착했다.
평화로운 작은 사찰이다.
참배객들도 조용하고, 스님들도 평범하다.
쬐깐한 빡빡이 동자승들만 여기저기를 뛰놀다 늙은 중들에게 걸려 혼나는 게 전부다.
누가 진공 스님이지?
죄다 빡빡이들이라 도대체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내공이 하나도 없으니 기감으로 알아볼 수도 없고.
아! 내 무공.
이번 회귀도 마찬가지다.
아니, 이전보다 더 빠르다.
광마일기를 펼쳐 무공에 관한 구절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돌아왔다.
고수의 끝자락 경지다.
물론 내공은 없다.
단전도 여전히 없고.
하지만 내 무공은 계속해서 늘고 있다.
이건 나조차 놀랄 정도다.
내가 무공에 있어선 천재가 맞긴 맞나 보다.
확실히 엄청난 속도로 무공이 늘고 있다.
이번 항주에 갔을 때도 무적 할매에게 슬쩍 몇 수 배웠다.
그녀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니, 위화궁 비전의 정수만 아니면 아낌없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덕분에 또 엄청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문제는, 전생에도 이미 고수의 끝자락 경지였는데, 엄청난 속도로 무공이 계속 늘고 있음에도 절정의 벽을 깨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지?
이것도 회귀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
너무 억측인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 새 삶의 모든 것이 회귀와 연관 지어 있다.
억측이 아니다.
분명, 이 또한 회귀와 어떤 연관이 있을 터다.
물론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일단 진공 스님을 만나 봐야 한다.
추혼책과 각혼필의 비밀만 파헤친다면,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했던 엄청난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난 다시 눈에 불을 켜고 발걸음을 놀렸다.
그나저나 왜 이토록 마음이 무겁지?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설마 내 이름마저 기억 못 하지는 않겠지?
사부도 내 이름을 말하면 알아볼 것이라 했는데.
아니, 아버지요 어머니라는 말까지 했는데.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또 심장은 요동을 친다.
무슨 첫사랑을 만나러 온 것도 아닌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만약 진공 스님이 나를 알아본다면, 추혼책과 각혼필은 필시 그가 일부러 나에게 준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럼, 일이 좀 꼬일 텐데.
지금까지의 상황을 추론해 봤을 때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냥 우연이었던 거다.
어쩌면 추혼책과 각혼필이 기물이 아닌, 그냥 평범한 책이고 붓이었을 수도 있다.
휴우, 그러면 더 복잡해질 텐데.
빨리 진공 스님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제발, 그가 날 기억하길 바라야 한다.
이름이라도 기억해 줬으면 진짜 좋겠다.
"악치냐?"
어?
누구지?
누가 뒤에서 나를 부른다.
이곳 귀정사에 날 아는 사람이 있나?
아니, 있지.
한 사람.
그런데 내 뒷모습만 보고 날 알아봐?
"악치 맞느냐?"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
두렵다.
몸을 돌려 그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악치구나. 악치가 돌아왔구나."
그의 목소리가 울먹인다.
덩달아 내 몸까지 크게 떨려온다.
"악치야, 악치야! 우리 악치가 돌아왔구나! 흑흑흑."
결국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왜 눈물이 흐르는 걸까?
고작 광마일기에 적힌 몇 줄을 읽은 게 전부고, 사부에게 들은 몇 마디가 전부인 그인데.
내가 왜 이러지?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 주체하기 힘들다.
힘들어도 간신히 몸을 돌렸다.
그가 그곳에 있었다.
진공 스님.
광마일기에 그의 외모에 관한 기록은 없다.
사부도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진공 스님이다.
한겨울 버려진 나를 길거리에서 주워 젖동냥까지 다니며 애지중지 키워준 그분이다.
"악치야!"
그가 나를 향해 눈물을 뿌리며 달려왔다.
어느새 내 얼굴도 눈물과 콧물이 마구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스님! 엉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