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광마일기>>
(상략)
천주천하.
사패천의 천주, 그야말로 나 광천마제의 천하였다.
무림오대고수 중 셋을 죽이고 마교주까지 무릎을 꿇린 마당에, 그 누가 감히 나에게 대적하겠는가?
사패천을 통해 뿔뿔이 흩어졌던 사파의 힘까지 모두 하나로 뭉치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왕 노릇을 하자, 내 수하들의 패악질도 나날이 늘어 갔다.
오죽하면 우리 사패천의 정문을 지키던 문지기 놈이 화산파의 매화검수를 두들겨 팼다는 소리까지 듣지 않았었던가.
간신히 이류 무사나 되는 것이, 고수요 절정에 이른 화산파의 중년 도사를 술에 취해 마구 두들겨 팬 것이다.
그런 사건이 천하 곳곳에서 비일비재했다.
그렇다고 반기를 드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구파일방도 침묵했고, 오대세가는 잠잠했으며, 무림맹은 모른 척했다.
모두 내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또 그래야 했다.
왜?
살려면 알아서 기어야 하지 않겠는가.
덕분에 내 수하 놈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호랑이를 믿고 깝치는 여우 꼴이랄까?
너무 설쳐 댄다 싶긴 했다.
결국 내가 우려한 대로 그날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무려 흑풍무적대의 대주와 부대주, 그리고 고비사막 마적단 출신의 적건삼혈마 등.
우리 사패천에서도 제법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간부급 여덟 명이 어디서 실컷 두들겨 맞고 온 사건이었다.
귀정사(歸正寺)라 하였다.
귀정사는 사필귀정에서 따온 이름이라고도 했다.
주제도 모르고 깝치다가 두들겨 맞은 수하들의 복수 따위를 내가 해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사패천의 위신이 떨어져선 안 됐다.
그건 곧 내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다.
또 한 놈이 반기를 들면,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우매한 것들이 덩달아 반기를 들기 마련이다.
일벌백계가 필요했다.
절의 이름도 마음에 안 들었고.
그래서 사패천의 고수 이천을 이끌고 귀정사로 출정했다.
이건 그냥 보여 주려는 것이다.
우리 사패천에 반항하면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일부러 천하가 보라고 엄청난 고수들을 이천 명이나 끌고 움직였다.
그곳으로 가면서 알았다.
제법 칼 좀 쓰고 주먹 좀 휘두른다는 간부급 수하 여덟 명이 늙은 중 한 명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괜히 이천 명이나 끌고 왔나 싶어 후회됐다.
그래서 가는 길에 놈들 여덟을 반 죽여 놨다.
놈들은 들것에 실려 다시 사패천으로 돌아갔고, 나와 이천의 고수들이 귀정사를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귀정사.
그냥 작은 사찰이다.
평화롭기 그지없고, 늙은 중 몇 명이 꾸벅꾸벅 졸고 있고, 동자승 몇 명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뭐, 그런 곳이다.
우리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으며 그곳에 도착하자, 꾸벅꾸벅 졸던 노승들도 잠에서 깨었고, 마당을 뛰놀던 아이들도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때,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던 그가 허겁지겁 무리의 선두에 있던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귀정사의 주지인 진공 스님이었다.
흑풍무적대 대주와 적건삼혈마 등을 두들겨 팼다고 해서, 절정급 끝자락이나 초절정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를 본 순간, 난 그의 경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그땐 솔직히 조금 많이 놀랐다.
무서운 건 아니었다.
다만, 잘못하면 수하들 앞에서 살짝 망신 좀 당할 수도 있다는,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늙은 중에게서 보았다.
나 혼자 두고 저 멀리 하늘나라로 먼저 가 버린 우리 사부.
왜인지, 그냥 순간 울컥했다.
은둔 고수임이 확실하고, 내가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 상대일지 모른다고 머리로 판단하였음에도, 나는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진공 스님을 보자마자 그 모든 경계심 등이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나에게 굽실거리며 용서를 구했다.
소림사의 방장도 그랬으니, 그가 나에게 굽실거린다고 욕할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난 묵묵히 그의 변명과 사과를 듣고만 있었다.
그가 내오는 차가 맛있었다.
그는 차와 더불어 은자도 전낭에 조금 담아 나에게 건넸다.
천하의 광천마제 마악치에게 은자 몇 냥이라니.
우습기도 하고, 왠지 사부가 또 떠올라 마음이 씁쓸했다.
이미 복수할 마음은 완전히 사라진 때였다.
난 서둘러 사패천으로 돌아가, 이 늙은 중에게 두들겨 맞은 간부 놈들을 더 두들겨 패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진공 스님이 나에게 그것들을 건넸다.
사죄의 의미로 꼭 받아 주었으면 한다고 간곡히 말하며, 추혼책(追魂冊)과 각혼필(刻魂筆)을 건넸다.
설명 같은 건 일절 없었다.
난 그곳에 있으면 사부 생각이 계속 나서 우울해질까 봐, 그저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무심결에 추혼책과 각혼필을 받고 그곳을 떠났다.
이상하게도 두 물건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일기를 쓸 생각이었다.
광천동을 만든 이유와 같다.
내 추악한 삶을 조금 포장해 자서전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품에 항상 지니고 다녔는데,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술도 마셔야 하고, 계집도 품어야 하고, 패악질도 계속해야 해 바빴다.
그렇게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빈 공책과 붓을 무려 삼 년 가까이 품에 지니고만 다녔다.
결국, 이렇게 죽을 때가 돼서야 추혼책을 펼치고 각혼필을 손에 쥐게 되었다.
갑자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갑돌산에서 사부와 옹기종기 도도 닦고, 밥도 지어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던 시절이 그립다.
(하략)
* * *
알몸으로 밤새 이 산 저 산을 뛰어다녔다.
결국 해가 떠서야 집을 찾아올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광마일기에 집이 있는 갑돌산과 주변 십간산의 지도 좀 그려 놓을 걸 그랬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광천마제 마악치의 삶이 몸에 배었을 텐데.
기억을 잃어서 그런가?
계효보가 없으면 많이 불편할 거라는 생각도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행복했다.
"나물 좀 뜯어 왔다. 내가 도울 건 없느냐, 악치야?"
"다 했어요. 이 쌀만 씻으면 돼요. 사부님은 밖에서 기다리세요."
"허허, 그래. 알았다."
쌀만 씻어 솥에 안치면 된다.
곧 사부와 단둘이 따끈따끈한 쌀밥에 나물볶음을 먹을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광천마제의 요리 솜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 * *
"사부님! 저들을 어찌 믿고 그냥 보내신다는 말씀이세요!"
사부의 삼재검법 한 방에 바닥을 구른 후 목숨을 구걸하는 구산사괴를 가리키며 내가 한 말이다.
"악치야, 저들이 저리 참회하며 울고 있지 않으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도 있잖아요. 저들이 사부님과 저에게 복수하러 올까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저들이 세상으로 돌아가, 언젠가 무고한 사람을 해할까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어허, 그럼 어쩌면 좋겠느냐?"
"무릇 도사가 쉬이 생명을 해하여서는 안 됨을 압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 않고요. 그래도, 단전을 파괴하고 근맥 정도는 잘라야 혹시 모를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부는 주저하였다.
하지만 나를 막지 않았다.
난 구산사괴의 단전을 부수고 사지의 근맥을 모두 자른 후에야 그들을 돌려보냈다.
잠시 후, 사부 몰래 그들을 따라가 목숨마저 끊어 버렸다.
* * *
계효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몰라 사부에게 이상한 낌새가 없는지 물었다.
사부의 삼재검법은 이미 첫날부터 무지막지한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내기의 운용은 원래부터 천하제일이었고, 삼재검법을 매일 수련하면서 기감의 활용 역시 기겁할 수준에 올라선 사부다.
무적 할매를 처음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 때, 내공은 사부가 많았지만 기감의 활용은 무적 할매를 따라가지 못했다.
구산사괴가 다가오는 걸 무적 할매가 먼저 감지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고작 몇 달이지만, 사부의 기감 활용은 무적 할매를 넘어선 수준이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도 갑돌산 넘어까지 기감을 펼쳐 기운을 감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곳 갑돌산과 주변 산들까지, 인적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혹시 요괴 같은 기운도 안 느껴지세요?"
"허허, 녀석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구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요괴를 운운하고 그러느냐, 허허허."
확실히 계효보는 없다.
뭐지?
광마일기에 적혀 있는 내용이 모두 사실이었던 건가?
놈을 믿어?
* * *
곧 스물한 살이 된다.
이젠 떠날 시간이다.
사부를 설득해 유람을 떠날 수 있었다.
첫 목적지는 절강 항주다.
그리고 나와 사부는 곧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아니, 사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만 걱정이 한가득하다.
돈이 없다.
당장 내일부터 굶어야 하고 노숙을 해야 한다.
"저…… 사부님."
"그래, 악치야, 허허허."
"잠시 쉬고 계십시오."
"어딜 가려고?"
"그게…… 이곳에 일할 거리가 좀 있나 보려고요."
"돈이 떨어졌느냐?"
"네."
사부가 웃는다.
아! 우리 사부.
돈이 얼마나 중요하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너무 순진하다.
큰일이다.
"도사가 돈이 떨어졌는데 어찌 일할 생각을 하느냐?"
그럼, 누가 밥 먹여 줘요?
목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우리 사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
"허허허, 악치야, 도사는 도를 닦고 수양을 하는 사람이니라. 돈이 떨어지면 당연히 수행할 생각을 해야지."
"사부…….
"요즘 들어 자꾸 ‘님’ 자를 빼먹는구나."
"사부님, 도사도 먹고는 살아야죠. 그리고 하루 이틀은 몰라도 매일 이슬을 맞으며 잘 수는 없잖아요. 사부님이야 내공이 십사 갑자나 돼서 상관없을지 몰라도. 전 감기 걸려요."
"허허허, 녀석. 따라오너라. 탁발(托鉢)도 도를 닦는 수양의 일환이니라."
요즘 세상에 탁발이라니?
사부는 세상이 얼마나 혹독한지 모른다.
그냥 사는 게 즐겁나 보다.
아! 내일부턴 진짜 쫄쫄 굶으며 노숙을 해야 할 모양이다.
저 밖에서 자면 감기 걸린다고요.
난 축 처진 어깨로 탁발하러 가는 사부의 뒤를 따라야 했다.
* * *
"무량수불. 무량수불."
사부는 그냥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렸다.
이내 중년의 여인이 문을 빼꼼히 열고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사부를 쳐다본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수양을 쌓으며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부족한 도사입니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 우리 사부, 우리 사부.
정말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저렇게 한다고 누가 찬밥 한 덩이라도 주겠냔 말이다.
창피하기도 하고, 사부의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머, 도사님이셨군요. 들어오세요."
어?
뭐지?
이게 아닌데?
이내 대문까지 활짝 열고 사부를 안내하는 중년 여인이다.
그렇게 막 그 집으로 사부가 들어가려고 할 때.
"도사님! 도사님!"
갑자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누군가 사부를 불렀다.
조금 전 여인보다 다섯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역시나 여인이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다.
어느새 열다섯 명이나 되는 여인들이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뭔가 신기한 거라도 발견한 듯 그렇게 사부를 보고 있다.
도사 처음 보나?
아니, 그보다 느낌이 어째 쎄하다.
"도사님! 오늘 밤 묵으실 곳이 없으면 누추하지만 저희 집에 묵으셔도 됩니다. 먼저 떠나간 남편이 서재로 쓰던 방을 항시 깨끗하게 치워 놨답니다."
"도사님! 오늘 밤 식사는 저희 집에서 하시죠. 씨암탉을 한 마리 잡아 놨는데, 도저히 혼자 사는 제가 먹기는 힘들고…… 아잉."
아잉?
이거 어디서 들어 봤는데?
"이 과부 여편네가 미쳤나? 도사님께 고기가 웬 말이야? 도사님! 저는 햅쌀에 몸에 좋다는 약초를 가득 넣은 밥을 항시 해 먹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남자한테 좋다는…… 호호호."
안 된다!
혹독하고 매정한 세상이어야 한다.
왜!
어찌!
사부만 나타나면 지옥 같던 세상이 이토록 따뜻해지냔 말이다!
젠장.
빌어먹을.
나와 사부는 그렇게 매일 뜨신 밥을 먹고, 따스한 침상에서 잤다.
그 집을 떠날 때 사람들은 항시 은자며 철전이며 사부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여인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가끔 사부가 어느 집에서 제사라도 지내 주면, 그때는 아예 묵직한 전낭을 통으로 건네는 경우도 있었다.
하기야, 진짜 도사 중의 진짜 도사가 지내 주는 제사인데 저 정도 금액은 싼 거지.
하지만 사부는 매번 철전만 조금씩 받았다.
그래도 전낭이 계속 무거워져, 결국 철전을 전장에서 은자로 바꿔야 했다.
절강 항주로 도착할 무렵, 내 전낭은 은자로 한가득하였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욕이 나오는 걸까?
눈물도 종종 흐른다.
나도 안다.
탁발은, 우리 사부만 할 수 있는 거다.
우리 사부, 도를 얼굴로만 닦았나 보다.
아! 나도 진짜 도사가 되고 싶다.
* * *
절강 항주에 도착했다.
사부는 다시 한번 주화입마에 걸린 괴인을 물리쳤다.
사부와 무적 할매가 다시금 낭만적인 만남을 가졌고, 나는 몇 달이나 초향을 즐겁게 해 줬다.
그렇게 떠날 때가 되었다.
말이 없어 걸어가야 했기에, 이전보다는 조금 일찍 출발해야 했다.
"어디로 갈지는 정한 것이더냐?"
"도인이 도를 닦으러 천하를 주유하는데, 꼭 목표를 잡고 움직여야 하나요? 구름 따라 바람 따라 가는 것이지요."
"허허허. 녀석, 진짜 도사가 다 됐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구름 따라 바람 따라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도가 너를 따라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네, 사부님. 헤헤."
"그런데, 악치야. 혹시라도 산서에 들르게 되면, 귀정사라는 곳을 한번 들르도록 하여라."
내 목적지다.
사부에게 말한 적 없다.
그런데 사부의 입에서 귀정사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이건 또 뭐지?
사부가 어떻게 귀정사를 알아?
"허허허, 뭘 그렇게 놀란 얼굴까지 하고 그러느냐? 일부러 산서까지 갈 필요는 없고, 혹시라도 그 길을 지나게 되면 한번 들러 보라는 것뿐이다."
"사, 사부님이 귀정사를 어떻게……?"
"어떻게 알긴, 내 오랜 친우이자 유일한 친우가 그곳의 주지로 있으니 알지. 못 본 지 참 오래도 됐구나, 허허허."
"사부님, 지금까지 사부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사부님께서는 효보를 신뢰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내 수양이 많이 부족한가 보다. 생존해 있는 사람 중, 지금껏 내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명뿐이구나. 내 오랜 친우가 한 명 있고, 네가 있다."
-광마일기 아홉 번째 회귀 기록 中
내가 계효보를 막 의심하기 시작했을 무렵, 그러니까 아홉 번째 회귀 때 사부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었다.
그 친우가 귀정사의 주지인 진공 스님이었어?
이건 또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또 머리가 복잡해지려 한다.
"악치야."
사부가 오랜만에 정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그 감동적이고 인자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네? 아, 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서둘러 대답하자, 사부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란 축복을 처음 발견한 것은 내가 아니니라."
"네? 그게…… 그게 무슨?"
"귀정사의 주지 스님인 진공이 추운 겨울 어느 거리에서 널 발견하여 사찰로 데려왔다고 하더라."
뭐야!
도대체 뭔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갓난아이였던 너를 업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젖동냥도 하고 그렇게 잘 키웠더구나."
갓난아이였던 나를 키운 게 그 스님이었다고?
사부님이 아니라?
"도를 닦겠다며 세상을 떠돌던 내가 오랜만에 친우 얼굴 좀 볼까 하여 귀정사에 들렀고, 사부님을 떠나보내고 제자 한 명 없이 혼자였던 내가 불쌍해서였는지, 허허허. 그 친구가 너를 데려가 제자로 삼으라고 하였단다. 그게 너와 나의 첫 만남이었단다."
설마…… 그 스님은 광천마제였던 내가 그 갓난아이와 같은 인물이란 걸 알고 있었을까?
"네 이름도 진공 그 친구가 지어 준 것이란다. 속세를 떠나기 전 자신의 성인 마(麻) 씨를 네게 주었고, 세상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큰 산(岳)이고 큰 언덕(峙)이 되라는 이유에서 악치란 이름을 지은 것이란다."
귀정사의 진공 스님.
느낌이 온다.
내 손에 추혼책과 각혼필이 쥐어지게 된 것.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두 그가 계획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