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이상한 동굴에서 깨어났다.
아무 기억이 없다.
알몸의 상태로 광마일기를 읽었다.
그것을 다 읽은 후, 난 내 고환을 들추어 보았다.
네 글자가 아니다.
총 여덟 글자의 문신이 있다.
계불가신(鷄不可信, 닭을 믿어서는 안 된다).
계인저회(鷄因詛回, 저주받은 회귀의 원인은 닭이다).
네 글자가 추가되었다.
광마일기에, 계효보에 대한 칭찬과 신뢰의 글은 열 장이 넘는다.
문신이 진짜인지, 아니면 광마일기의 내용이 진짜인지.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많다.
아니, 난 이미 놈을 믿지 않는다.
이젠 확신이다.
* * *
"오, 효보! 여기야, 여기!"
큰 바위 위에 앉자, 환하게 웃고 두 팔을 흔들었다.
저 멀리서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닭대가리를 향해서다.
"주군, 여기 계셨군요."
"응, 그래. 어서 줘."
"네?"
"옷, 검이랑."
"아, 넵."
"효보야."
"넵!"
"너 혹시……."
"네?"
"나를 주군으로 모신다는 게…….
"……?"
"내 뽀얀 속살을 탐내서냐?"
"허걱! 그, 그럴 리가요?"
"그럼 뒤돌아."
"앗! 죄송합니다."
녀석이 뒤돌았고, 난 그제야 천천히 큰 바위 위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앞장서라, 효보야! 집으로 간다."
"존명."
경쾌한 발걸음.
나와 놈은 기분 좋게 발걸음을 떼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사냥감이 눈치채서 도망가면 안 된다.
비수는, 놈이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때 찌른다.
* * *
사부에게 삼재검법을 알려 줬다.
사부는 삼재검법만으로 하루아침에 무적 할배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사부와 나는 명상과 수양을 쌓았고, 효보는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며칠이 지난 후부터 나와 사부는 갑돌산, 병막산, 을수산, 정정산 등을 돌며 도를 닦았다.
전생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였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났을 때, 내가 은밀히 효보를 불렀다.
"지난번 말했던 약초꾼."
"넵."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분명 악의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해."
"제거……할까요?"
"고수일 가능성이 높다. 네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내 정신이 온전치 않아. 의지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몰래 살펴보고, 제 선에서 가능하겠다 싶으면 처리하겠습니다. 만약 어려울 것 같으면 포기하고 즉시 되돌아오겠습니다."
난 고심하는 척했다.
"그래도 걱정인데…….
"주군, 한번 믿어 주십시오."
"그래. 대신…… 아니다 싶으면 객기 부리지 말고 곧장 돌아와라. 이건 명령이다."
"존명."
효보가 구산사괴를 제거했다.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도 하나 알게 되었다.
구산사괴는 순번을 돌며 먼 곳에서 우리 모옥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했다.
전생에서 낭인을 고용하고, 독을 뿌리는 등의 계책이 모두 실패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놀랍지도 않은 사실.
계효보는 구산사괴를 모두 제거하면서 작은 상처 하나도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놈의 무공이 또 늘었다는 뜻이다.
심토만력근을 복용해 그랬겠지.
난 그렇게 돌아온 놈을 꽉 끌어안고 크게 감동한 목소리로 치하해 주었다.
* * *
사부와 십간산을 돌며 도를 닦은 지 한 달이 되었다.
오늘은 멋들어진 폭포 아래에서 사부와 함께 도를 닦는 중이다.
"사부님, 물어볼 게 있습니다."
"그래, 허허. 도를 닦다 보면 궁금한 게 많이 떠오르지, 허허허."
"계효보에 대해서입니다."
사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곧바로 원래의 상태가 되었다.
사부도 뭔가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효보가 열심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온전히 편한 얼굴만은 아니다.
"사부도 뭔가 느끼고 계셨군요."
"아!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도 고민을 좀 했었다."
"말씀하세요, 사부님."
사부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향해 물었다.
"효보가 무림에 뜻을 두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맞습니다."
"무공을 익힌 게 맞더냐?"
"네."
"내가 무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효보의 나이에 일 갑자가 넘는 내공을 보유하고 있다는 무인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내가 물으려던 것을 사부가 먼저 말해 줬다.
계효보가 심토만력근을 복용한 게 확실하다.
나를 죽이고 먹었을 테다.
한 가지 더 확실한 것도 있다.
계효보는 나와 함께 회귀한다.
아니, 이 저주받은 회귀의 원인은 계효보다.
여덟 글자의 문신은 모두 사실이었다.
"정확히 몇 년 치의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지 아세요?"
"글쎄다. 내가 느끼기에 일 갑자 십오 년 치의 내공 정도로 보이는구나."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게 있다.
심토만력근이 아무리 대단한 영약이라고 해도, 보통의 무인이 그걸 복용했을 때에 그 힘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일 갑자의 기운을 모두 내공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통은 이 할에서 삼 할이고 잘 쳐줘야 절반이다.
그러니까 이삼십 년 치의 기운 정도만 내공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광천마제 시절 심토만력근의 일 갑자 기운을 모두 내공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문의 현화승천신공 덕분이었다.
그런데 놈은 어떻게 그걸 모두 내공으로 전환한 것이지?
내가 막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좋은 기연을 만나 그런 내공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은, 효보에게서 본 문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네? 본 문의 기운이요? 혹시 현화승천신공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사부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매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주된 기운은 현화승천신공이 맞다. 한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외에도 봉인된 사문의 비급들에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까지 섞여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새끼!
이 찢어 죽일 새끼가 도대체 어떻게 그걸 익힌 거지?
또 한 번 커다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심토만력근만 빼돌린 줄 알았는데, 그동안 몰래 장서실로 들어가 사문의 비급들을 익혔던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계효보의 무재는 최악이다.
지금까지 모든 회귀의 시간을 합쳐도, 그 무재로는 장서실에 봉인된 사문의 무공 중 하나조차 제대로 익히기 힘들다.
그럼 뭐지?
돌겠네.
혹시, 나에게 무슨 사술이라도 건 것일까?
내가 익힌 걸 놈이 빼앗아 익힌다?
너무 말이 안 되는데?
"혹시 효보가 널 만나기 전, 다른 도문에서 무공을 익혔던 것이더냐?"
"네? 아, 아닙니다. 무슨 무관들을 돌며 무공을 익혔다고 했습니다."
"어허, 그것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나."
"요기도 느끼셨죠?"
사부가 놀란 눈을 떠 나를 보았다.
"너도 느꼈느냐?"
"얼핏 느꼈는데 그게 요기인지 다른 것인지 정확하지 않아 사부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허허, 네 수양이 깊고 또 깊어졌구나. 효보의 몸속 아주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는 그 기운까지 느끼는 것을 보니 말이다. 네가 진정한 도사의 길에 접어든 것 같아, 이 늙은 사부는 무척이나 기쁘구나, 허허허."
제가 뭘 느끼고, 무슨 도사고 그러겠습니까?
전생에 사부가 말해 준 거 광마일기에 적어 둬서 아는 거죠.
그나저나 계효보.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무공마저 빼앗았다.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사문의 봉인된 비급을 익히고 깨달은 것은 내가 유일하다.
사부도 익히지 않았다.
계효보의 무재로는 일천 년이 걸려도 그걸 다 깨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나에게서 무공까지 빼앗아 갔다는 것인데.
심토만력근도 빼앗았고.
회귀.
저주받은 회귀.
그 원인은 계효보가 확실해졌다.
그리고 그 목적마저 거의 확실하다.
나를 통해, 그리고 회귀를 이용해, 천하제일인 나 광천마제 마악치의 무공을 빼앗으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계효보.
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천수신권이나 창궁검제를 택하지 그랬냐?
네 속셈을 내가 깨달은 이상, 넌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을 겪게 될 것이다.
난, 이제 악마다.
"사부님, 효보는…… 조금 더 지켜보시죠."
* * *
계효보의 무공 경지가 고수 끝자락에 닿아 있다.
정확히 내 경지와 일치한다.
내공은 일 갑자 십오 년 치.
전생의 내공에 정확히 일 갑자가 추가됐다.
현화승천신공으로 심토만력근의 기운을 모두 내공으로 전환한 것이다.
황노를 포함한 구산사괴를 제거하며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고 돌아온 것이, 놈의 경지가 상승했음을 재차 입증해 줬다.
또 놈은 우리 현화문의 현화승천신공을 포함하여 봉인된 사문의 무공까지 모두 익혔다.
사부의 말은 틀림없다.
확실해졌다.
더는 헷갈릴 필요 없다.
저주받은 회귀의 원인은 계효보고, 놈은 회귀를 통해 나에게서 무공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광마일기의 혼란했던 부분이 모두 해소되었다.
이제부터 반격이다.
"효보."
"충!"
빈 봇짐을 챙기던 계효보가 내 부름에 얼른 동작을 멈추고 대답했다.
"어디 가게?"
"아, 넵. 생필품이 떨어져 이것저것 사려고 아랫마을에 좀 다녀올 생각입니다."
"너 혹시…….
"네?"
난 놈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덩달아 잔뜩 긴장한 모습이 된 계효보다.
미세하게 떨며 한 줄기 식은땀까지 이마 위로 흐른다.
"너, 이 녀석…….
"제…… 제가…… 왜?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주군. 무섭습니다."
"너…… 혼자 먹을 생각이지?"
"네? 그, 그게 무슨……?"
"마을에 내려가서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실 거잖아."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됐어. 나도 같이 가."
"네?"
"어허, 거참. 말을 두 번 하게 만드는군, 큭큭큭."
"……?"
의아한 얼굴만 하는 계효보.
난 그런 놈에게 얼굴까지 바싹 들이밀며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나만 비밀로 하면 되잖아. 그러면 사부님도 모르실 거고. 고기랑 술이 먹고 싶어 미치겠다."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주군. 앞으로 마을에 내려갈 때는 항시 주군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하하, 암, 그래야지. 역시 네가 나의 왼팔이다."
"감사합니다, 주군. 충!"
"돈은? 넉넉하냐?"
"헤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모아 둔 돈이 꽤 됩니다. 주군을 모심에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크하하하! 역시 나의 왼팔, 계효보다. 가자! 오랜만에 광천마제 시절의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누려 봐야겠다."
"네? 광천마제는 누굽니까?"
"아!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가자, 효보야!"
"존명!"
나는 계효보와 어깨동무까지 하고 그렇게 아랫마을로 향했다.
* * *
독한 화주를 다섯 병이나 비웠다.
식탁 위로 먹다 만 음식의 접시들이 겹겹으로 쌓였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과 술이 배 속으로 들어가니, 극락에라도 온 듯했다.
더불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은 반쯤 풀렸으며, 혀는 절로 꼬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모두 반격을 위한 밑밥에 불과하다.
"먹어."
내가 계효보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내 시선은 열댓 개의 접시 중 계효보가 유일하게 손도 대지 않은 랄자계(辣子鷄, 매운 닭요리)를 가리켰다.
"주, 주군."
"먹으라고."
"주군, 제가 닭은 먹지 않는다고 말씀을…….
"먹어."
조금 전까지 하하호호 신나게 떠들다가, 내가 갑자기 무거운 분위기를 잡으며 계효보에게 명령했다.
아니, 계효보가 보기엔 술에 취한 내가 술주정을 부리는 것으로 보이리라.
"먹어."
"주, 주군."
안절부절못한다.
"내 말, 거부하는 거냐?"
"주군, 취하셨습니다. 얼른 사문으로 돌아가야 문주님께서 걱정을…….
"먹어."
"주군."
이제는 울려고 한다.
"먹으라고 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먹, 어."
이제는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넘어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기까지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더 크다.
이내.
털썩.
객잔 바닥에 무릎까지 꿇는다.
"살려 주십시오."
"이거 먹으면 죽어?"
"그…… 그게…….
"죽는 거 아니면 먹어. 아니면 본좌가 친히 죽여 주랴?"
"……."
놈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대꾸하지 못했다.
무릎 꿇은 녀석의 어깨가 극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먹으라고 했다."
"흑흑흑."
결국 놈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놈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놈이 천천히 젓가락을 잡아 움직였다.
이내, 놈은 랄자계 한 점을 젓가락으로 잡았다.
닭고기 한 점이 정확히 놈의 젓가락에 잡힌 것이다.
놈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한참을 어깨까지 들썩이고 눈물을 쏟아 내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먹어라, 계효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