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호북 신가산.
심토만력근이 묻혀 있는 그 산이다.
나와 계효보는 지금 매복 중이다.
착하고 순박한 촌부 넷을 기다리고 있다.
혹시 몰라, 정말 만에 하나 광마일기에 내가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을 열어 두어 이렇게 몰래 관찰하려는 것이다.
계효보와 함께 있는 이유는, 그렇다.
이것이 계효보에 대한 나의 이 차 시험이자, 마지막 시험이기 때문이다.
계효보가 이 시험만 통과한다면, 난 다시는 절대 계효보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미 계효보를 구 할 구 푼 구 리 신뢰하고 있다.
이렇게 다시 녀석을 시험하는 것만으로도 지금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도, 나와 녀석 둘 모두를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
사부님?
사부님은 당연히 항주에 있다.
아! 다시 생각해도 돌 것 같다.
누가 그랬던가?
패완면(覇完面)이라고.
으뜸의 완성은 얼굴이란다.
환갑을 훌쩍 넘은 우리 사부가 옥면공자 소리까지 들었다.
검은색 강기는 깊은 수련을 통해 나온 신비하고 현묘한 도가의 기운이란다.
하하하하!
젠장할!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속, 살짝 상기한 우리 사부에게로 무적 할매가 천천히 또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다가갔다.
이미 무적 할매의 눈에서는 밤하늘의 별이 쏟아지고, 봄날의 꽃잎이 사정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대협."
"아, 여협. 동료분들께서 많이 다치셨습니까?"
"어쩜. 이 상황에서도 다른 이를 먼저 걱정해 주시나요? 대협 몸부터 살피셔야죠."
"전 괜찮습니다."
"대…… 협."
"여협?"
뭐, 그렇게 됐다.
항주의 번화가는 다시 평화를 찾았고, 평화가 찾아온 항주에서는 사랑이 싹텄다.
나는 초향이 좋아하는 말타기(말 역할을 했다)와 술래잡기(잘 잡히는 도둑이 나다), 그림 그리기(내 얼굴을 그려 줬는데, 초향은 그림에 소질이 없다), 소꿉장난(남편과 아들 그리고 딸까지, 일인삼역을 했다) 등등 석 달 동안 실컷 놀아 주었다.
그런 후 이곳 호북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내 나이 이제 스물한 살이다.
-주군, 놈들…… 아니, 말씀하셨던 순박하고 착한 촌부들이 오는 것 같습니다.
난 고개만 끄덕였다.
계효보의 조언 덕분이다.
만에 하나 촌부들 중에 무공을 익힌 이가 있으면 내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전음을 못 한다.
그것도 내공이 필요하다.
계효보의 전음이 있은 후, 조금 지나 순박하고 착한 촌부 넷이 모습을 드러…… 아! 조금도 착해 보이지 않는데?
"형님, 여기 신가산만 넘으면 곧 호북을 벗어나 사천으로 접어듭니다."
"그래, 힘내자."
"사천에는 암점과 암상이 꽤 있다고 하셨죠?"
"쉽게 찾지는 못할 거다. 그래도 호북보다는 좀 낫지."
"전 그게 이해가 안 되네요. 호북도 무당과 제갈세가가 있지만, 사천은 사천 당가에 아미파, 청성파 그리고 꽤 힘 있는 문파들이 널리고 널렸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호북보다 암점과 암상이 더 많을 수 있죠?"
"큭큭큭.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산 하나에 호랑이가 여럿이어 봐라. 지들끼리 싸우느라 여우가 왕 노릇을 해도 모르는 거거든."
"아! 그런 이치군요. 그래서 소림이 있는 하남에는 암점과 암상이 하나도 없고, 호북도 몇 개 없는데, 사천이 제일 활발한 이유가요. 하하."
"그래, 아무튼 이번엔 열다섯 살 계집과 갓난아기의 장기로 만든 마단까지 있으니, 꽤 두둑이 돈을 챙길 수 있을 거다. 다들 힘내서 빨리 사천으로 가자."
"넵!"
뭐지?
착하고 순박한 촌부들이어야 하는데?
-주군. 저들은 사람을 죽여 그 오장육부로 마단을 만드는 악인들인 것 같습니다. 암점과 암상을 통해 마단을 금기 마공을 익히는 마인들에게 팔아 수익을…… 제거할까요?
충격이다.
머리를 큰 망치로 한 대 두들겨 맞은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놈들이 시야에서 벗어나려 한다.
-주군? 어떻게 할까요?
계효보의 전음이 이어졌고, 난 그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충분합니다. 구산사괴보다 약합니다. 저 큰형이라는 자가 일류고 둘은 이류, 나머지 한 명은 아예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듯합니다.
난 계효보에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곧 계효보가 몸을 날렸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으아아아악!"
"아악!"
짧은 비명이 울린 후 곧 숲속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몸 두세 군데 피를 살짝 묻힌 계효보가 돌아왔다.
숨도 고르게 쉬는 것이, 제대로 힘도 쓰지 않고 다 죽인 것 같다.
"가자."
"존명."
나는 계효보를 대동하여 심토만력근이 묻힌 곳을 향해 움직였다.
여전히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 * *
"효보! 힘들면 교대해 주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더 열심히 파."
"존명!"
심토만력근이 묻힌 땅으로 왔다.
효보가 땅을 팠다.
아까 입은 정신적 충격?
이젠 없다.
곧 심토만력근을 얻고, 그걸 복용해 내 무공을 되찾을 생각을 하니, 아까의 정신적 충격 따위는 금세 잊고 말았다.
난 간식을 기다리는 개새끼인 양,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헥헥거리며 고개까지 쭉 내밀어 효보가 땅 파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다.
심토만력근의 심토(深土), 깊은 땅속이라는 뜻이다.
사조의 비전에 기록된 것처럼 정말 깊게도 묻혀 있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효보의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지도 않을 깊이에까지 묻혀 있다.
사조의 기록에 따르면 그 깊이가 무려 석 장에 달한다고 했다.
진짜 깊긴 깊다.
효보가 홀로 두 장을 넘게 팠다.
그래도 나름 고수라고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열심히 파고 있다.
이제 한 장도 남지 않았다.
심토만력근, 곧 보게 될 테다.
* * *
둥글둥글, 자색의 감자라 해도 믿을 것이다.
하지만 외양만 그럴 뿐, 심토만력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실로 엄청났다.
그 엄청난 기운을 감추기 위해 심토만력근은 땅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는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영약의 이름에 만력(萬力)이란 글자가 들어가 있겠는가?
보는 것만으로도 심토만력근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품고 있는 영근(靈根)인지 알 것 같았다.
예상했던 것 이상이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곧바로 먹고 싶다.
하지만 아니다.
계획한 대로 움직여야 한다.
계효보에게 하는 마지막 시험이다.
"효보."
"충! 제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마음 놓으시고 복용하십시오, 주군."
아! 이 새끼.
이 사랑스런 닭대가리.
감동해서 그냥 꽉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쏟아붓고 싶다.
하지만 아직이다.
"네 것이다."
"주, 주군!"
"네가 복용해라."
"하지만 주군! 분명 이것으로 주군의 잃어버린 내공과 무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만약 실패할 경우, 이 귀한 영약을 헛되이 버리게 될 뿐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하셔야죠!"
"아니다. 내 몇 번이고 고심한 끝에 결정 내린 것이다. 네가 복용해라. 네 충정에 대한 나의 상이니라."
"주…… 주군……."
계효보의 목소리가 떨린다.
눈동자는 그보다 더 크게 요동치고 있다.
감동이 아닌 그 어떤 결연한 각오를 한 모습이다.
그래, 효보야!
난 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
어서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면서 ‘나의 것을 뺏을 수 없다고’, ‘내 것을 빼앗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그렇게 외쳐!
어서, 효보야!
난 너를 믿는다.
계속 믿어 왔고, 지금도 믿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털썩.
"주…… 주군."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까지 짚으며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 이런 충신을 내가 의심했었다니.
난 역시 쓰레기다.
"신이 감히 어떻게 주군의 것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신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주군의 것을 가로채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을 것입니다! 죽여 주십시오, 주군!"
아! 목 놓아 외치는 효보의 간청에 내 눈시울도 어느새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효보는 충신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충신.
정말 이렇게 충성스런 녀석을 의심했다니.
내 자신이 미치도록 미웠다.
그리고 다시는, 절대, 결코!
효보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냐?"
응?
뭐, 뭐지?
조금 전까지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며 간청하던 효보가……?
퍽!
"으악!"
효보가 날 때렸다.
쿠당탕탕.
뒤로 댓 걸음걸이나 날아가 땅을 굴렀다.
아프다.
"새끼, 순진하긴. 아니지, 광마 네가 원래 단순 무식했지. 큭큭큭."
왜?
뭐야?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계불가신, 그 문신이 진짜였단 말인가?
퍽퍽퍽!
퍼퍼퍼퍼퍽!
아프다.
"당연히 이 영약은 내가 먹어야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큭큭큭. 아! 심토만력근. 진짜 대단한 영약이야.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일 갑자 내공이 몸에서 솟구치는 것 같단 말이야. 푸하하하!"
퍽!
퍼퍼퍽!
"광마야. 지난번에 너 죽고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 줄 아냐? 현화승천신공 때도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는데, 와아! 현화문의 그 많은 무공을 죄다 익히고 깨달았더라? 진짜 놀랐다. 네가 아무리 천재여도 그중 일 할이라도 익히면 대단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것도 억겁의 굴레가 비틀어져서 그런 건가?"
퍽!
퍽퍽!
이 새끼, 습관적으로 날 때린다.
벌써 왼쪽 어깨뼈와 갈비뼈, 그리고 척추까지 몇 군데가 부러졌다.
숨을 쉬기 힘들다.
말도 할 수 없고.
"아무튼 잘했다."
퍽!
퍽!
난 엎드린 상태로 그렇게 놈의 발길질에 계속 맞았다.
"일 갑자다! 일 갑자! 하하! 네가 나에게 일 갑자를 주는구나! 잘했다, 광마야! 크하하하!"
퍽퍽!
"현화승천신공도 있으니 이놈의 기운을 버리는 거 없이 죄다 흡수해 줄 테다!"
퍽퍽퍽!
손에 잡혔다.
엎드린 상태로 놈에게 두들겨 맞으며 난 그걸 손에 쥐었다.
놈에 대한 시험을 시작하기 전, 이미 소매에 각혼필을 숨겨 두고 있었다.
퍽퍽!
퍽퍽퍽!
"광마야! 광마야! 네가 나의 진정한 복덩어리구나! 푸하하하!"
퍽퍽퍽!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로 피를 계속 쏟아 내면서 나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죽어라! 죽어! 계속 죽어서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다오! 크하하하!"
뼈가 살을 뚫고 나왔고, 그곳으로도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버선! 버선! 버선, 새꺄! 버선은 뒤집어 놓지 말라고!"
퍽퍽퍽!
퍼퍼퍼퍼퍼퍼퍼퍼퍽!
한 글자를 새겼다.
"사부도 그렇고, 제자도 그렇고! 새꺄, 쫌! 일을 두 번 하게 만들고 지랄들이야!"
퍽퍽퍽!
퍼퍼퍼퍼퍼퍼퍼퍽!
한 글자를 더 새겼다.
손에…… 힘이 없다.
의식도 점점 사라져 간다.
"그래도, 광마야! 푸하하하하! 잘했어. 아주 잘했다고. 나도 이제 남 부럽지 않은 내공을 갖게 됐다고, 하하하!"
퍽!
퍽!
한 글자.
더 새겼다.
하지만 이게 한계다.
마지막 한 글자를 새겨야 하는데.
힘이 없다.
기억은 이제 아득…… 아! 죽을 때가 되긴 됐나 보다.
광천마제 시절부터 아홉 번의 회귀, 그 모든 삶이 주마등처럼 내 눈과 기억을 스치고 지나간다.
진짜 죽는구나.
끝이다.
딱 한 글자.
한 글자만 더 적으면 되는데.
힘이 남아 있질 않다.
이것이 나의 아홉 번째 죽음이었…… 떠올랐다!
주마등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삶의 기억.
그 기억의 마지막 편린은 계효보에 관한 것들이다.
나에게 저주를 걸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는 놈.
그런 놈에 대한 나의 터질듯한 증오와 분노.
그 모든 것들이 생생히 떠오르고 느껴졌다.
없던 힘이 솟구쳤다.
마지막 한 글자를 적을 수 있는 힘이다.
그렇게 나는 네 글자의 문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아홉 번째 죽음이었다.
계인저회(鷄因詛回, 저주받은 회귀의 원인은 닭이다).
이제 반격이다, 닭대가리 새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