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24화 (24/245)

24화

"사부님, 우리 유람(遊覽) 한번 떠나 보는 건 어때요?"

"갑자기 웬 유람이냐?"

"올해 제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음. 네가 벌써 약관(弱冠, 스무 살)이구나."

"네, 맞아요. 그리고 곧 스물한 살이 돼요. 그런데 저는 아랫마을 빼고는 세상 구경 한번 해 본 적 없어요."

짐짓 기운이 쭉 빠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나도 네 나이 때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더랬지. 어허. 미안하구나, 악치야."

"에이, 그런 말 들으려고 한 이야기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지. 다 안다. 그러자꾸나. 세상을 보는 것도 참된 도를 닦는 하나의 훌륭한 방법일 테다. 그런데 혹시 생각해 둔 곳은 있느냐? 어디를 가 보고 싶은지 말이다."

"절강 항주 어때요? 아랫마을 왕 아저씨가 항주에 비단 팔러 간 적이 있는데, 거기 앞바다가 그렇게 경관이 훌륭하다고 하네요. 저는 바다도 한번 본 적 없잖아요."

"허허. 그렇지. 무릇 자연의 장엄함을 깨달으려면 바다를 보고 느끼는 것보다 좋은 게 없을 것이다. 그래, 가자. 항주로. 어허허허."

"정말요?"

"정말이지. 항주는 미녀로도 유명한 지역이니, 어쩌면 네 배필을 그곳에서 만날지도 모르겠구나."

"배필이요? 저 혼인 같은 거 안 해요. 도사가 무슨 사랑을 해요?"

"본 문의 제자가 혼인하지 말라는 규율은 없느니라. 역대 선조 중에서도 분명 혼인하여 가정을 꾸린 분들도 여럿 계시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건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럴 생각 없어요. 당장은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요. 꼭 절강 항주의 바다로요."

"그래, 그러면 가야지. 가자, 절강 항주로."

내 나이 스무 살이 되고도 몇 달이 훨씬 더 지났다.

구산사괴 사건 이후 이 년이란 시간이 지난 것이다.

난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

계속되는 회귀라 할지라도, 새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도를 닦는 척, 사부 몰래 현화승천신공과 봉인된 사문의 무공을 계속 수련하였다.

내 깨달음의 경지는 어느덧 고수의 끝자락에 닿아 있다.

하지만 역시 내공은 쥐뿔이다.

쥐에게 뿔은 없다.

내 내공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되찾지 않겠는가?

아무튼 나는 이 년간 열심히 수련하였고, 그 무학과 깨달음을 광마일기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아마 다시 회귀하게 된다면, 역시 이를 읽는 것만으로도 모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가지 또 의아하고 공교로운 것은.

광천마제 시절의 나도, 딱 이맘때 고수의 끝자락 경지였다는 것이다.

우연일까?

아니면 이 또한 회귀의 어떤 힘이 미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원래 내 삶의 필연일까?

회귀 후 고작 이 년을 살았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섣불리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계효보에 대한 의심도 아직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삼백 년 치의 요공.

전생과 다른 무공 경지.

그리고 ‘계불가신’이라는 네 글자 문신.

이것이 끝내 계효보에 대한 나의 의심을 깨끗이 지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와!

와아아아아아아!

계효보 이 녀석.

차원이 다르다.

충성!

헌신!

복종!

딱 세 단어로 이 녀석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

지난 이 년간의 삶이 그랬다.

만에 하나, 정말로 계효보가 엄청난 간계를 꾸몄다고 해도, 무려 이 년이다.

이 년!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의중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을 인간이 있을까?

내 생각에는 없다.

효보도 그렇다.

이 년이란 세월 동안, 그는 오로지 충성, 헌신, 복종이란 딱 세 단어만을 내게 보여 줬다.

이건 달리 말하면, 이게 녀석의 진심이란 뜻이다.

아직도 녀석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는 내가 다 나쁜 놈이 된 것 같다.

녀석에게 큰 죄를 짓는 느낌이다.

계효보는 나에게 있어서,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얻은 게 아니라 우주를 구해 얻은 인연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계효보에 대한 칭찬이 광마일기에 한가득 기록되고 있다.

딱 한 번이다.

딱 한 번만 더 녀석을 시험해 볼 것이다.

그것만 통과하면, 난 녀석을 영원히 신뢰할 것이다.

내 몸의 피부를 벗겨 문신까지 지울 생각이다.

곧 그 시험이 찾아올 것이다.

그전에, 우선 사부부터 물 좋고 공기 좋고 경치마저 좋은 곳에 모시고 가야겠다.

위기와 고난, 피와 살육, 사악한 간계가 난무할 것이 뻔한 내 미래를 우리 착한 사부와 함께 걸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가자, 절강 항주로.

사부를 보자마자 환장하며 환영해 줄 그녀가 있는 곳으로.

이건 나보다 그녀가 더 좋아하는 것이니, 당연히 신세 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보답하는 일환이리라.

우리는 다음 날 무적 할매와 나의 어린 부인 초향이 있는 절강 항주로 떠났다.

* * *

"소주라도 가 보지 않겠느냐? 소주도 항주 못지않게 멋진 도읍이란다. 아니면 합비나 황산을 가도 좋고."

"하루만, 딱 하루만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정말 여기가 너무 좋아서 그래요. 네, 사부님?"

"허허. 그래. 네가 그리 좋다면야 하루 정도 더 머무는 게 무엇이 그리 어렵겠느냐?"

사부가 허허 웃은 후 슬며시 한마디를 보탰다.

"내일이면 벌써 보름째구나. 허허."

젠장.

빌어먹을.

난 왜 이렇게 운도 따르지 않는 것일까?

항주에 도착해 가장 먼저 그 해변을 찾았다.

무적 할매와 초향이 시찰을 나올 때 머무는 그 초가가 있는 해변 말이다.

그런데 없다.

그 해변 풍경이 너무 좋다는 핑계로 사부를 이끌고 매일 찾아갔지만, 역시나 그녀들은 없었다.

사부 말마따나 내일이면 이곳에 도착한 지 벌써 십오 일이 된다.

더는 이곳에 머물 핑곗거리도 없다.

이곳 항주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어쩌지?

머리가 복잡하다.

시간도 없고.

내일은 꼭 있어야 하는데.

없을 가능성이 구 할 구 푼이다.

젠장할!

효보가 부자인 덕분에 보름 동안 몸은 편히 지낼 수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초조함과 조급함에 찌들어 있어야 했다.

안 되겠다.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바닷가에 한번 다시 가 보자고 해야겠다.

"사부님, 이제 배도 부른데 바닷바람이나 쐬러……."

쾅!

"끄아아아아악!"

"살려 주세요!"

"으아악!"

콰콰콰콰쾅!

쾅쾅쾅!

조금 먼 곳에서 엄청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폭발이 인 지점으로부터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담과 지붕, 어두운 골목 사이사이에 은밀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사고의 중심을 향해 가는 고수들이 있었다.

모두 여자다.

위화궁의 여고수들이 문제가 발생한 걸 인지하자마자 곧바로 움직인 것이다.

최소 사십여 명이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검까지 뽑아 들고는 문제의 기루로 향했다.

쾅!

콰콰콰콰콰콰쾅!

다시 연이은 폭발.

엄청난 고수인가 보다.

나와 사부 그리고 계효보가 현재 식사를 하고 있는 객잔 이 층에서는 다른 전각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폭발의 소리와 진동 그리고 비명…….

다시 한 떼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도주하고 있다.

피를 뒤집어쓴 위화궁의 여고수들이 팔다리가 잘리고 크게 부상당한 동료들을 부축하여 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쾅!

스무 명가량이 다시 스무 명가량을 업고 부축하여 도주하던 길목.

그곳에 검붉은 기운을 마구 뿜는 핏빛 눈깔의 괴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길을 막아섰다.

"크하하하하하! 기녀들이 죄다 도망갔으니, 오늘 밤은 네년들이 이 어르신의 운우지락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산 년도 좋고 뒈진 년도 좋으니, 큭큭큭. 내 곁을 떠날 생각은 미리 버려야 할 것이다."

그냥 봐도 정상이 아니다.

더 심각한 건, 괴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다.

우리가 식사를 하고 있는 객잔 앞 큰길에서 대치 중인데, 괴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지막지한 기운으로 인해 식탁 위 그릇들이 다 흔들릴 정도다.

초절정인가?

아무래도 주화입마에 빠져 괴인이 된 듯하다.

"위화궁의 자매들은 들어라!"

선두에 선 여고수의 외침.

"위화궁의 제자는 꺾일지언정 더럽혀지지 않는다. 다친 자매들을 내려놓고 항마도룡진을 펼쳐라."

"넵!"

죽음을 각오한 비장함이다.

선두에 선 여고수의 외침에 나머지 여고수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크게 다친 여고수들까지 칼에 의지하여 일어나 필사 항전의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괴인은 오히려 웃었다.

"크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 그래, 오너라! 모두 내 품에 안기거라! 나와 밤새도록 즐겁게 놀아 보자꾸나!"

그렇지 않아도 무지막지했던 괴인에게서 이루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의 기운이 폭발하였다.

이내 곧바로 위화궁 여고수들을 향해 몸을 날리…… 아!

왔다.

온다.

저 멀리, 엄청난 속도.

하늘을 가르며 한 줄기 빛으로 그녀가 온다.

무적 할매.

괴인은 곧 피떡이 될…… 어?

"멈추시오!"

사부다.

우리 사부가 이 층 창문을 통해 몸을 날렸다.

그것도 엄청난 사자후를 터뜨리며 뛰어내린 것이다.

아! 우리 사부 전음도 할 줄 모르는데, 사자후는 또 언제 깨친 거래?

아니, 그보다!

젠장.

안 된다.

사부가 나서면 일이 틀어진다.

말려야 하는데.

이미 무적 할매는 도착했는데.

무적 할매의 걸음이 멈추었다.

무적 할매가 막 장내에 도착했을 때 사부가 사자후를 터뜨리며 몸을 날린 것이다.

딱 눈 한 번 깜짝할 사이만 참았으면 되는데.

아! 어쩌지?

무적 할매는 나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새 다른 위화궁 여고수들 틈에 섞여 그저 사부와 괴인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한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

사부와 괴인의 충돌.

괴인은 마공이다.

그것도 마교에서조차 금기하는 마공인 듯하다.

반면 사부는 삼재검법이다.

아! 쪽팔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사부가 압도적으로 괴인을 몰아붙이고 있긴 한데.

문제는.

사부의 손에서 뿜어지는 강기.

검강(劍剛)이다.

손에서 나오면 수강(手剛)아니냐고 하겠지만, 아니다.

검강 맞다.

손으로 검을 만들고, 그것으로 검법을 펼치면 검강인 것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부의 검강.

괴인의 장강(掌剛).

사부는 검고, 괴인은 검붉고.

젠장!

누가 괴인인지, 누가 금기 마공을 익힌 마인인지 모르겠다.

아!

내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광천마제 시절, 저 검은색 강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고 억울한 삶을 살아야 했냔 말이다.

그런데 그걸 우리 사부가 똑같이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마구 쏟아질 것 같았다.

쾅!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주변의 전각 일부와 땅이 군데군데 터져 나갔다.

삼십여 합 만에 사부가 괴인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괴인은 죽기 직전인지 아니면 혼절한 것인지, 땅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못했다.

아마 사부가 평생 이런 싸움을 해 본 적은 없었으리라.

기운을 과하게 쓴 것 때문인지, 아니면 첫 싸움으로 인한 흥분 때문인지, 사부의 숨이 마치 사냥을 마친 맹수의 그것처럼 매우 거칠다.

거기에 괴인의 피까지 한 대야를 뒤집어쓴 몰골이다.

그 상태로 사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위화궁 여고수들을 향해서다.

정적.

괴인이 쓰러진 시점부터, 시끌벅적했던 이곳 항주의 번화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정적과 어색한 침묵만이 장내를 휘감고 있다.

사부는 분명, 위화궁 여고수들이 많이 다치지 않았나 걱정되어 그녀들을 바라봤을 테다.

하지만 사부의 그 단순한 움직임에, 위화궁 여고수들은 움찔하며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무적 할매까지 크게 놀란 얼굴이다.

이내 대문과 창문을 꽁꽁 닫고 숨었던 기루와 객잔 그리고 상점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수백, 수천이 그렇게 잔뜩 긴장한 얼굴과 경계의 눈으로 사부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안다.

이제 곧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부, 다 내 잘못이에요. 미안해요. 우리 이제 여기 떠나요.’

난 속으로 그리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부가, 겪게 될 첫 억울함에 내가 먼저 울컥해 버린 것이다.

이제 곧 사람들은 떼로 몰려, 극악무도한 마인이고 사악한 사파인이라며 욕설과 함께 사부에게 모진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광천마제 시절의 내가 수십 번이고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뻔히…… 어?

짝짝.

짝짝짝!

짜자자자자자자자작!

짝짝짝짝짝!

누군가 손뼉을 쳤다.

그리고 다시 다른 곳 어디에서 박수 소리가 났다.

이내 그 박수는 전염병이라도 된 듯, 사방에서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멋있어요, 대협!"

"살인 악귀를 제압한 정의의 사도님이시다!"

"와아아아아아!"

"은둔 고수가 대마두를 물리쳤다! 와아아아!"

"처음 봤을 때부터 멋지셨어요!"

"그냥 딱 봐도 깊은 수양을 쌓으신 도사님이시다!"

"옥면대협이시다!"

"꺄아아악!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뭐야?

왜 나랑 반응이 달라?

사부도 나도 똑같은 검은색 검강이라고, 이 미친 것들아!

왜?

도대체 왜!

결국,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떨구어진 내 얼굴에서 투명한 액체가 툭, 툭 한 방울씩 떨어진다.

이 빌어먹을 세상.

그래, 처음부터 그랬던 거야.

애초에 현화승천신공이고 검강이 검은색이고가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씨팔.

진짜 열받네.

기승전, 잘생긴 얼굴이었던 거야?

그게 문제였던 거냐고!

왜?

뭐?

내 얼굴이 어때서?

빌어먹을!

세상 한번 참 좆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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