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계불가신(鷄不可信).
닭을 믿으면 안 된다고?
뭐지?
회귀한 후의 내 몸은 깨끗하다고 광마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다.
사타구니.
거기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알 두 쪽.
허벅지 안쪽에 네 글자의 문신이 새겨 있다.
민감한 부분인데.
이거 새기려면 무지하게 아팠을 거 같다.
교묘하게 알 두 쪽에 가려 새겼다.
회귀 후 거의 본능에 가깝게 내 거시기도 함께 회귀가 잘 됐나 확인하는 버릇이 아니라면, 나조차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교묘한 위치에 문신이 새겨 있는 거다.
근데 이거 내가 새긴 게 맞긴 맞아?
음, 계불가신이라.
광마일기에 닭이랑 연관된 거는 계효보밖에 없는데.
결국 계효보를 믿지 말라는 소린데.
정말 이거 누가 새긴 거지?
남이 새겼다면 열라게 부끄럽네.
내 알을 살짝 들추고 큭큭큭.
아놔, 여자가 한 건 아니겠지?
회귀했으니 지금의 나는 순결한 몸인데.
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다시 집중.
내가 새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광마일기가 아닌 내 몸의 은밀한 곳에 새겼다면, 분명 위급한 상황이었을 테다.
각혼필이군.
각혼필의 바늘이 문신을 새길 때 쓰라고 있던 거였어.
그걸 내가 급박한 순간 떠올려 문신을 했던 거고.
내가 가끔 이렇게 뜬금없이 똑똑해질 때도 있긴 하다.
각혼필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새겼다면, 회귀 후 사라졌겠지.
역시 각혼필이고, 그렇다면 내가 했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왜!
난 다시 광마일기를 들추어 보았다.
무려 열 쪽이 넘는 내용에 하나같이 계효보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아니, 이 정도면 칭찬이 아니라 거의 찬양 수준이다.
그런데 왜 계효보를 믿지 말라고 급박한 순간 문신까지 새긴 것일까?
돌겠네.
또 회귀하여 깨어나자마자 혼란스럽다.
혹시 심토만력근 때문인가?
우연히 그것에 대해 알았고, 욕심이 났던 건가?
아니다.
가능성이 적다.
무려 천하제일인이었던 태사조의 현화도상검법마저 사절한 계효보다.
심토만력근이 아무리 대단한 영약이라고 해도 어찌 천하제일인의 무공보다 그 가치가 더 크겠는가?
그럼 나는 왜 이런 문신을 새긴 것이지?
난 이 문제를 고심하기 위해 무려 한나절을 넘게 홀로 광천동의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 고심해야 했다.
녀석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계효보를 시험해 봐야겠다.
* * *
"옷."
"여기 준비해 두었습니다."
"뒤돌아."
"네?"
"너 변태냐?"
"그, 그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내 말에 계효보가 당황한 얼굴로 얼른 몸을 돌렸다.
난 그제야 큰 바위에서 일어나 녀석이 건넨 옷을 입고 검을 허리에 찼다.
"가자."
"넵!"
나는 앞장선 계효보를 따라 사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 *
다시 보는 우리 사부.
여전히 감동적이다.
이제 무적 할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다.
나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다른 방법까지 알고 있으니 굳이 무적 할매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도 없다.
이것도 다 무적 할매 덕분이군.
무적 할매와 초향 그리고 위화궁에 대한 나의 빚은 정말 끝도 없구나.
한없이 미안하고 고맙다.
더불어 나는 진정한 최악의 쓰레기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고.
됐다.
빚은 나중에 두고두고 갚으면 된다.
그리할 것이다.
그나저나 심토만력근은 어쩌다 실패한 것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제 될 것이 없는데?
광마일기의 마지막 기록은 내가 심토만력근을 캐기 위해 신가산에 올라가 순박하고 착한 촌부 넷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어떤 변수가 발생했다는 것인데.
설마 촌부 넷…… 아! 내가 별생각을 다 한다.
광마일기에 분명 순박하고 착한 촌부라고 적혀 있는데.
지금 내가 믿을 건 광마일기밖에 없다.
촌부들이 아닌 건 확실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야겠다.
그래, 그건 우선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보고.
일단 사부부터 다시 구해야겠다.
"효보."
"충!"
넓적한 대나무 바구니에 사부와 내 옷가지 등을 담아 개울로 빨래를 하러 가려던 효보를 불렀다.
녀석이 곧장 나에게 달려왔다.
"따라와."
"존명."
어디 멀리 간 건 아니다.
앞마당에서 사부가 명상 수양을 하고 있어서 뒷마당으로 왔다.
"삼재검법 알아?"
"네? 삼재검법이요? 갑자기 그건 왜……?"
"알아, 몰라?"
"압니다. ‘기초 중의 기초. 무공은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 제게 처음으로 무공을 가르쳐 준 청룡무관 관장이 그리 말했습니다. 그래서 삼재검법만 십 년 넘게 익혔습니다."
"돈, 그러니까 관비 많이 냈어?"
"넵."
"얼마나?"
"매달 은자 한 냥 반씩 지불했습니다."
아! 이 녀석 제갈공명 아니다.
호구다.
사기당했네.
"어험. 뭐, 그럼 제대로 할 줄 알겠네."
"열심히 익히긴 했습니다."
"그럼 한번 펼쳐 봐."
"네? 주군 앞에서 선보일 정도의 실력은 되지 않는데……."
"해 봐.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네가 아는 삼재검법의 묘리와 정수를 영혼에서까지 끌어 담아 펼쳐 봐."
"아, 네. 넵! 존명!"
계효보가 뒷마당에서 삼재검법을 펼쳤다.
마치 무림 영웅전의 최종 악당을 상대하기라도 하듯, 혼신의 힘을 다하는 녀석이다.
내가 왜 이걸 계효보에게 시키냐 하면.
맞다.
내가 삼재검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계효보가 삼재검법을 스무 번가량 반복하여 펼친 후 이를 멈추었다.
"효보."
"충!"
"나는 이제 폐관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내가 폐관을 깨고 출관할 때까지 사부님을 잘 모시도록."
"존, 존명. 그런데 주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물어봐라."
"이곳에 폐관실도 있었습니까?"
"내 방. 내 방에서 수련 좀 하겠다고."
"아! 아, 네. 넵. 그런데 얼마나……?"
"글쎄다. 하루가 걸릴지, 며칠이 걸릴지,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사부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릴 테니, 넌 열과 성을 다해 사부님을 모시도록."
"존명! 주군의 무운을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 * *
현화승천신공을 다시 익혔다.
그리고 광마일기에 필사한 사문의 비급들도 죄다 다시 익혔다.
그런데, 아!
이게 말이 되는가?
무얼 익히고 깨닫고 할 것이 없었다.
그냥 내가 필사한 그 구결과 심득, 주석, 비전을 읽는 것만으로 곧바로 나는 사문의 무공들을 다 익히고 깨달았다.
효보를 통해 익힌 삼재검법 따위야 두말할 것도 없이, 효보가 처음 동작을 펼치는 순간 완벽하게 익혔고.
하지만 사문의 무공은 삼재검법 따위와는 그냥 아예 말이 안 되게 다른 것인데.
이걸 이렇게 쉽고 빠르게 익혀 버리다니.
고작 두 시진 걸렸다.
점심 먹고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갔는데, 저녁 먹을 시간에 방을 나와야 했다.
역시 회귀 때문인가?
회귀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지?
어쩌면, 내가 내 나이로 회귀한 게 아니라, 내 나이의 시간대로 회귀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 가능하다.
기억은 잃었지만, 광천마제 시절의 내 몸, 그러니까 환골탈태에 반로환동한 내 몸으로 회귀했을 가능성이 분명하게 있는 것이다.
열여덟 살 신체가 아니군.
순결한 몸도 아니었어.
확실하진 않지만, 그 가능성을 열어 놓고 더 고심해 보아야겠다.
* * *
"사부님."
"그래, 악치야. 효보가 만들어 준 식사가 참 맛있구나. 물론 네가 해 줬던 밥이 맛이 없었다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라. 허허허."
"사부님,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이제 날도 저물어 가는데."
"보시지요."
난 사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마당 중앙으로 움직였다.
심호흡을 짧게 한 후, 효보에게서 받은 새 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그리고 이내, 고도의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곧, 조금 전 방에서 폐관 수련을 하며 깨친 내 모든 무학과 깨달음을 검에 담아 휘둘렀다.
삼재검법이다.
천천히, 또 천천히.
내공은 없지만, 그 누구도 비웃을 수 없게 진지하게 휘둘렀다.
난 그렇게 연이어 세 번의 삼재검법을 펼친 후에야 검을 되돌려 검집에 착검하였다.
몸을 돌려 사부를 보았다.
사부의 얼굴에 늘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이다.
초향이 삼재검법을 펼친 후, 사부가 깨달음을 얻어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졌을 때와 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부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허, 악치야. 네가 언제 이런 상승의 검법을 익힌 것이더냐?"
사부! 이거 그냥 삼재검법이에요.
뭐, 내가 펼친 것이니 그냥 삼재검법은 아니지만요.
"사부님, 혹시 방금 제가 펼친 검법. 사부님도 펼칠 수 있나요?"
사부가 주저한다.
고심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내 대답할 듯 입을 움직였다.
얼굴에 이미 그 답이 나와 있었다.
부정이다.
사문의 문규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부의 입이 완전 떨어지기도 전, 내가 먼저 나섰다.
"사부님, 매일 묵상만 하고 수양만 한다고 하여 도를 깨닫는 게 다가 아닙니다. 참된 도는 태사조께서 그러하셨듯,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 한 몸 희생해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의 태사조님께서는 유언으로……."
"이미 태사조께서 겪으신 일입니다. 사부님이나 저나 그에 대해 수백 번 읽어 잘 알고 있고요. 같은 실수만 반복하지 않으면 됩니다. 봉인된 사문의 비급을 해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우연히 산적들에게 목숨을 잃게 될 양민들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우리가 희생해 그들을 살릴 힘 정도는 가지고 있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네가 방금 펼친 검법이 삼재검법이더냐?"
"네."
"나도 들어 보았다."
"산 아래 세상에서는 동네에 사는 평범한 아이들도 건강 삼아 익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허허. 그래, 그래. 내가 생각이 너무 깊었나 보구나. 삼재검법이라면야. 허허허."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지금?"
"네. 보고 싶어요. 사부님의 삼재검법을요."
"그래, 뭐 세 가지 동작인데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게 있겠느냐?"
사부가 허허 웃으며 마당의 한가운데로 나왔다.
난 즉시 걸음을 옮겨 사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내 사부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아! 사부님! 사부님!"
막 삼재검법을 펼치려다가 동작을 멈추고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는 사부.
"을수산! 을수산 말고요."
"응?"
"을수산 말고, 하늘을 향해 펼쳐 보세요."
"아, 뭐. 그러지. 허허허."
다시 사부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해 쭈욱 뻗기 시작했다.
"사부! 사부님! 아, 정말 죄송해요."
"또 왜 그러느냐?"
"내공. 내공도 다 죽이시고. 그냥 동작만. 네? 하하하. 괜히 처음부터 무리하시면 나이도 있으신데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 내공은 쓰지 마시고, 그냥 동작만 펼쳐 보세요. 네?"
"허허허.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알았다. 내 그러하마."
사부가 삼재검법을 펼쳤다.
엄청난 강기도, 천지를 뒤덮을 그런 강맹함도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엔 보였다.
그리고 느껴졌다.
사부가 방금 펼친 삼재검법은 내가 펼친 삼재검법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미 지극히 높은 깨달음에 이른 무(武)와 도(道)가 사부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대단하다, 우리 사부.
구산사괴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었다.
한 달 뒤 그들이 찾아온다 해도, 사부는 놈들에 의해 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부가 한 달 정도만 수련을 더 하면, 그때는 그냥 사부 손잡고 천마신교나 접수하러 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사부.
무적 할배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