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순박하고 착한 촌부 네 명.
그들은 조금도 착해 보이지 않았다.
* * *
광천마제 시절의 나.
당시의 나는 사부가 죽은 후 몇 달이나 괴로워하다가,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사문의 무공을 익혔다.
구산사괴와 세상을 향한 증오와 복수심도 당연히 한몫했다.
미친 듯 익혔다.
일 년 반 만에 사십 년 치였던 내공이 일 갑자를 넘기게 됐다.
그리고 사조가 남긴 비전 중 호북 신가산의 심토만력근이라는 영약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를 복용하면 추가로 일 갑자의 내공을 얻게 된다.
물론 이는 광천마제 시절의 내가 그런 것이고, 회귀 후에는 이걸 복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왜?
당연히 일 갑자의 영약을 복용하게 되면 내 몸이 버텨 주지 못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소림사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단, 화산의 자하신단같이 정제된 영약이면 괜찮다.
하지만 자연 상태 그대로의 영초, 영근, 영과, 내단 같은 영약은, 그걸 흡수할 능력이 없는 자가 먹으면 그냥 죽는다.
천년산삼 정도야 무인이 먹으면 내공이 증가하고 일반인이 복용해도 무병장수할 수 있다.
하지만 만년산삼은 다르다.
소화할 수 있으면 기연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극독 중에서도 최악의 극독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일 갑자의 내공을 품은 영약이고, 심토만력근 역시 같은 부류다.
우석혜 할매에게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그래서 내가 심토만력근을 복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듣지 않았겠는가?
내 몸, 내 혈맥, 이 모든 것이 당장 수십 갑자의 내공을 운용해도 무리가 없다고.
그래서 결심해 이곳으로 왔다.
일 갑자의 내공을 흡수해, 내 혈맥과 몸에 자극을 가해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는 충격요법을 실험해 보고자.
그런데…… 좆됐다.
아! 이 새끼들.
내가 광마일기에 왜 이렇게 무섭게 생긴 놈들을 순박하고 착한 촌부라고 적어 놓은 거지?
돌겠다.
* * *
"형님, 여기 떠나기 전에 한탕만 더하고 가시죠?"
"무당파하고 제갈세가에서 우리 잡겠다고 사람 보냈다고 하지 않았냐?"
"에이. 지들이 무슨 귀신도 아니고, 그렇게 우릴 쉽게 잡겠어요? 이 새끼 보세요.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게, 이놈 장기(臟器)로 마단(魔丹)을 만들면 분명 최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요. 그게 얼마에 거래되는지 잘 아시잖아요."
"음. 하긴 그렇긴 해. 첩첩산중에서 우릴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산신(山神)이 우릴 위해 준비해 준 것 같기도 하고. 큭큭큭."
"암요. 그렇고 말고요. 산신의 선물을 마다하는 건 또 예의가 아니죠."
"큭큭큭. 그래. 이곳에서는 이 녀석이 마지막이다. 배를 갈라 장기를 뽑고, 다시 그걸 마단으로 만들어 암점에 팔려면 시간이 촉박할 거야. 서둘러."
"넵!"
아! 순박하고 착한 촌부 넷.
사람의 장기를 적출해 그것으로 마단을 만들어 금기 마공을 익히는 마인들에게 파는 극악무도한 놈들이다.
수장으로 보이는 녀석의 명령에, 나머지 셋 중 둘이 동시에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 * *
나는 천재다.
천하제일심법인 현화승천신공도 익혔다.
거기에 더해 하나하나 천하제일신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 현화문의 무공을 수십 개나 익혔다.
허리에는 계효보가 사다 준 비싼 보검도 차고 있다.
이 정도면 악당 서너 명 정도는 상대해 줘야 하지 않을까?
내 경지는 내가 정확히 안다.
광천마제 시절 이 시점의 나와 회귀한 지금 시점의 나는 무공 경지가 거의 같다.
고수 급이다.
사문의 모든 무공을 익히고 깨달았는데 고작 고수 급이라고?
익히고 깨닫는 것과 대성한 것의 개념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심지어 하나의 무공을 대성한 후에도 끝없는 발전이 이어진다.
익히고 깨닫는 것이 대성이 아니고, 대성을 했다 하여 또 그게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광천마제 시절의 나는 천재적 무재, 천하제일의 무공들, 그리고 엄청난 내공의 도움으로 고작 일 년 반 만에 고수의 경지에 올랐다.
지금의 나는 천재적 무재와 무공들은 그대로지만 내공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정신도 오락가락, 기억 상실 상태다.
그런데 광천마제 시절보다 훨씬 더 쉽게 고수의 경지에 올랐다.
회귀와 연관된 듯하다.
광천마제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경지인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이 또한 회귀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고수의 경지인데, 머리만 그렇다는 거다.
내공이 없다.
내공이 없어도 천하제일신공을 몇 개나 익혔는데, 어중이떠중이 몇몇은 상대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예를 들어 보자.
다섯 살 때부터 육합권(六合拳)과 칠각법(七脚法)을 꾸준히 수련한 스무 살 처자가 있다고 치자.
무려 십오 년 동안 권법과 각법을 열심히 익혔다.
대신 내공이 없고, 그녀의 체중은 팔십 근(40Kg)이다.
그녀와 싸울 상대.
태어나 한 번도 무공이란 걸 익혀 본 적 없다.
대신 그는 타고난 장사(壯士)다.
터질 듯한 근육질 몸에, 그 체중이 무려 삼백 근(150Kg)에 달한다.
미곡점(未谷店, 쌀가게)에서 일하는 그는, 하루 다섯 시진 매일같이 수십 근의 쌀을 쉴 틈도 없이 날라, 그 힘은 더더욱 장사가 됐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모른다.
그런 사람 둘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유추할 수 있다.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무공에 있어서 내공이란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혈도니 사혈을 공격하느니 하지만, 아니다.
내공을 잃은 무인은 미각을 잃은 미식가다.
시력을 잃은 매가 드넓은 벌판의 하늘을 날아 쥐를 잡는 게 가능하겠는가?
호랑이가 제아무리 산 중 왕이라고 하나, 갓 태어난 호랑이 새끼는 들개의 한 끼 식사 거리도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분명하게 내공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승천하는 용과 바닥을 기는 지렁이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내 상황이 그렇다.
상대가 삼류 무사 수준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당연히 몇 놈은 충분히 제압 가능하다.
하지만 상대가 이류 무사 급이라면?
단전이 있고 없고, 또 콩알 크기의 내공을 운용하고 하지 못하고의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어차피 무림에서의 싸움은 한 끗 차이로 목숨이 오가는 게 현실 아니겠는가?
지금 내 상태로 이류 무사라면 한 명?
만약 상대가 방심하고 있고 내가 그 틈을 잘 노려 기습을 가하고 거기에 운까지 따라 준다면 최대 세 명?
기억은 없지만, 어쩌면 몸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를 광천마제의 경험까지 더해진다면?
지금의 내 상태가 그렇다.
* * *
"제압해!"
"얍!"
두 놈이 동시에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상대의 정확한 경지.
파악할 수 없다.
내공을 운용할 수 없기에 기감을 이용해 놈들의 기도나 내공을 파악할 수 없다.
오직 호흡과 발걸음 그리고 움직임을 통해 놈들의 실력을 유추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짧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누가 뭐래도 난 천하제일인 광천마제 마악치니까.
퍽퍽퍽!
퍽퍽!
퍼퍼퍼퍽!
"형님, 이 새끼 좆밥인데요?"
"야! 살살 다뤄. 괜히 죽으면 약값 떨어지고, 기절이라도 하면 끌고 가기 힘들다."
"넵!"
퍽퍽퍽!
퍼퍼퍼퍼퍽!
* * *
"약 먹어. 그렇지, 그래. 잘 먹네. 하하. 이제 한숨 푹 자고 나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거야. 하하하."
허름한 산중의 오두막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침상에 누워야 했고, 놈들이 내 입에 이상한 약물을 쑤셔 넣었다.
사람을 잠재우는 미혼산이리라.
약이 내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진…… 혼미해지긴 개뿔.
아! 너무 두들겨 맞아 온몸이 아파 죽겠다.
아파서 못 움직이는 거다.
얼굴도 무진장 맞아 퉁퉁 부어 눈과 입도 뻥끗 못 한다.
하지만 정신은 멀쩡하다.
놈들이 움직이고 말하는 소리가 다 들린다.
왜지?
미혼산을 복용한 것 같은데, 현경 급 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잠들지 않는 건가?
그나저나 그냥 죽으면 좋을 텐데, 장기 적출이라니?
차라리 잠든 상태라면 더 낫겠는데.
아! 젠장할!
빌어먹을!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현경의 신체.
"옷 벗기고 배부터 갈라."
"넵."
"엇! 형님. 이 새끼 무슨 책도 가지고 있는데요? 붓도 있고요."
"배운 놈인가 보지. 까막눈인 우리한테는 쓸모없지만, 혹시 내다 팔 수 있을지 모르니 옆에 두고 하던 일 계속하자."
"넵."
들린다.
느껴진다.
내 옷이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벗겨지고, 차갑고 날카로운 쇠가 내 피부에 닿는 느낌.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야 하는가?
정말 눈물만 난다.
"형님, 이 새끼 우는데요?"
막 내 배를 가르려던 예리한 칼이 멈추었고, 그 움직임의 주인이 어디선가 한 번 들었을 법한 대사를 쳤다.
"어? 울어? 이럴 때 보통은 웃지 않냐?"
"그러게 말이에요. 보통 이럴 때는 다들 웃는데. 막 회귀하고 빙의하고 그래서 자기가 천하제일인처럼 무림도 구하고, 그런 꿈을 꾸면서 웃으며 죽잖아요."
"별 특이한 놈을 다 보겠네. 됐고, 어서 작업이나 시작하자. 속도가 생명. 그래야 최상품의 마단을 만들 수 있으니까."
"넵."
아! 이렇게 죽는구나.
이것이 나의 여덟 번째 죽음이었…… 엇?
쉬이이이이익.
"누구냐!"
"적이다!"
파파파파파팟!
"으아아악!"
쿠당탕탕.
툭.
툭.
뭐지?
눈을 뜰 수 없어 볼 수가 없다.
몸도 말을 안 듣고.
설마 계효보가 날 구하러 와 준 건가?
역시!
내가 천하에 믿을 놈은 계효보밖에 없다니까.
퍽!
쿠당탕탕.
퍽퍽퍽!
무지하게 아프다.
왜?
왜지?
계효보가 아닌가?
왜 나까지 때려?
나무 침상에서 떨어진 나를 상대는 계속 발로 짓밟아 때렸다.
"버선(양말)! 버선! 버선!"
퍽퍽퍽!
퍽퍽!
"내가 버선 벗을 때 뒤집어 놓지 말라고 말을 했냐! 안 했냐!"
퍽퍽퍽!
"사부나 제자나! 꼭 일을 두 번 시켜요!"
퍽퍽퍽!
"지난 회귀 때도 그러고, 지지난번에도 그러고! 계속 버선을 뒤집어 놓으니까, 내가 빨래할 때 일일이 그걸 다시, 개새꺄!"
퍽퍽퍽!
아! 계효보 이 새끼 지금 왜 이러는 거야?
설마 사부랑 내가 빨래 내놓을 때 버선을 뒤집어 벗어 놔서 이러는 거야?
아! 돌겠네.
그게 뭐라고.
"버선! 뒤집어! 벗지! 말라고!"
퍽퍽퍽!
그러다 갑자기 발길질이 멈추었다.
이내 놈의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진다.
쓰러진 나에게 바싹 다가와 앉기까지 한 모양이다.
"근데 광마야. 너 도대체 광마 시절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한 거냐? 우리한테 네가 직접 네놈 사부를 죽였다고 했는데 아니었고. 이번에는 또 뭐야? 저 새끼들 원래 착한 촌부들이라며? 그래서 네가 땅 파게 하고, 그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했잖아. 심토만력근을 네가 얻은 걸 입막음하려고 말이야."
혼란스럽다.
그나저나 이 새끼가 어떻게 심토만력근의 존재를 알지?
그 이름까지 정확히 알고 있잖아?
"큭큭큭. 그래도 이번엔 잘했다. 그래서 네가 저 새끼들한테 끔찍하게 죽는 것에서 구해 줬잖아. 고마운 줄 알아, 새꺄. 나 아니었으면 너 진짜 개고생하다가 죽었어. 클클클."
진짜 돌아 버리겠다.
뭐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번엔 잘해?
이 새끼도 나랑 같이 회귀하는 건가?
그리고 뭘 잘했다는 거지?
"현화문의 무공 비급들, 이번에도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다 익히고 깨달았겠지? 크하하하. 물론 그건 내가 다 흡수하겠지만 말이야. 크하하하하! 이런 보물 같은 녀석이 있나. 하하하!"
내가 익힌 사문의 무공들을 흡수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이 회귀 자체가 놈이 꾸민 거고, 내가 무공을 익히고 놈이 그걸 흡수하려고 그랬다는 말이야?
그게 가능해?
이 닭대가리 새끼,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퍽!
씨팔!
왜 갑자기 또 때려!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해. 내가 내공이 형편없거든. 그래서 네가 심토만력근 캐러 간다고 했을 때 기대가 엄청났는데 말이야."
퍽퍽!
"아! 그리고 그건 생각할수록 아깝네. 네가 아니라 그 우석혜 년이 진짜 천하제일인인 줄 알았으면, 네놈이 아니라 그년한테 내 요술을 거는 거였는데. 빌어먹을 새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퍽퍽퍽!
퍽퍽!
계효보.
놈이 원흉이다.
이 저주받은 회귀, 모두 놈의 수작질이다.
이 회귀는 기연이 아닌 고통의 굴레고 저주의 굴레다.
이걸, 이걸…… 광마일기에 적어야 하는데.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때였다.
계효보의 발길질에 맞아 몸이 이리저리 들썩일 때, 내 손에 무언가 잡히는 게 느껴졌다.
붓이다.
각혼필(刻魂筆).
엎드린 상태에서 잡았기에 계효보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광마일기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쩌지?
방법이 없다.
난 또 죽을 것이고, 다시 놈에게 이용당할 것이다.
최악이군.
"죽어! 죽어! 죽으라고! 계속 회귀하고! 계속 무공을 익혀서 모두 나에게 바쳐라! 내가 너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크하하하하!"
퍽퍽퍽!
퍼퍼퍼퍼퍼퍽!
놈은 나를 너무 자극했다.
그냥 죽으려고 했는데.
포기하고 깨끗이 죽으려고 했는데, 놈의 발길질이 나로 하여금 극도의 더러운 기분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 더러운 기분 속에서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난 죽어 가면서,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속에서.
손에 쥔 각혼필을 움직였다.
아! 기억났다, 순박하고 착한 촌부 넷.
광천마제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원래 그랬던 거였군.
심토만력근을 캐러 왔다가 놈들을 우연히 만났다.
놈들은 아직 어려 보이는 나를 꾀어 죽이고 장기를 적출하려 했다.
난 그런 놈들을 흠씬 두들겨 팬 후 땅까지 파게 하여, 다시 그곳에 묻어 버렸다.
광천마제 시절의 나는 수하들에게 늘 그렇듯 이런 사실을 왜곡해 말해 줬고.
광마일기에는…… 젠장!
귀찮아서 그냥 대충 그렇게 기록했던 거였군.
내 삶의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나는 죽었다.
동시에, 네 글자 문신(文身)을 내 몸에 완성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여덟 번째 죽음이었다.
* * *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동굴에서 깨어났고, 광마일기를 읽었다.
긴 일기를 모두 읽고 나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여덟 번째 죽음인가? 하! 무림사를 통틀어 나보다 많이 죽어 본 인간이 또 있을까?"
정말 어이없고 황당한 기사를 내가 겪고 있다는 사실에, 한참이나 홀로 실없이 웃어야 했다.
어?
근데 내 사타구니 사이에 뭐가 묻었다?
아니, 글자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