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19화 (19/245)

19화

"사부님!"

난 모처럼 눈에 힘까지 주고, 강한 어조로 사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릇 진정한 도를 깨친다면 우화등선을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사가 도를 닦는 이유와 목적이 우화등선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도를 닦기 위해 호흡을 하고 명상을 하며 얻는 내공과 별다를 게 없는 그저 부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니라."

"도사가 도를 닦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표는 분명 만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역시 맞는 말이니라."

"태사조께서도 그러한 이유로 대마두가 출몰했을 때, 모든 수양을 뒤로하고 세상에 나가셨겠지요."

"그렇다. 흑성대마왕으로 인해 울부짖는 백성들을 돕고자 하셨느니라."

"사부님. 우리도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돕는 것 또한 사부님과 제가 해야 할 참 수양이 아닐까요?"

"악치야. 어허. 그게……."

사부가 난감해한다.

깊은 고심과 갈등에 빠진 모습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사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제 우 여협도 비슷한 말을 했단다."

"우 여협이요?"

난 깜짝 놀란 연기를 하며 되물었다.

"그래. 사조께서 그런 유언을 남기셨던 이유는 나의 사부님이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 현화문의 후손들이 사조님과 똑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시려던 뜻이었을지 모른다고 하더구나."

"그래서요?"

"사조께서 이미 한 번 그러한 경험을 하셨으니,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봉인된 무공을 해제해 나와 네가 익혀 세상에 나간다면, 악인들로부터 핍박받고 울부짖는 많은 백성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하였다."

"아! 그랬군요. 어쩌면 그게 도사가 해야 할 참된 도리가 아닐지……."

"그렇구나. 어허허. 내 어찌 그 간단한 진리를 밤새 고민하고 결단 내리지 못하였을까? 네가 우연히 우 여협을 만난 것도 그렇고, 또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된 것까지, 모두 천지신명의 안배가 아닐까 싶다."

"사, 사부님…… 그러시면 혹……?"

"악치야."

"네, 사부님."

"내 잠시 사문을 비워도 되겠느냐?"

나도 모르게 ‘야호!’라고 외치며 펄쩍 뛸 뻔했다.

"우 여협과 함께 가시게요?"

"그걸 네가 어찌 알았느냐?"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였지만, 내심 바라고 있었습니다. 사부님과 우 여협이 서로의 배움과 깨달음을 공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행을 베푼다면, 그야말로 이 땅의 백성들에게 큰 홍복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어허허. 네가 아주 이 사부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사부와 나의 화기애애한 대화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 * *

바로 다음 날.

사부와 나는 사문의 예법에 따라 엄숙하게 제사를 지낸 후 뒷마당에 봉해진 비급의 봉인을 풀었다.

당연히 그 자리에는 우석혜와 계효보는 물론, 초향마저도 참석할 수 없었다.

나는 봉인을 해제하는 방법을 기억해 두었다가 광마일기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드디어 우리 현화문의 비급들,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현화검존 태사조의 신공들이 한꺼번에 내 손으로 들어오게 됐다.

다시 하루가 지나, 초향이 나와 떨어지지 않겠다며 울고불고 떼를 썼지만, 결국 사부와 우석혜 그리고 초향은 절강 항주의 위화궁으로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나는 장서실의 신공 비급들을 모두 꺼내 빠르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 * *

"효보."

"충!"

"받아라."

계효보에게 봉인되었던 수백 권의 비급 중 한 권의 검법을 건넸다.

"이, 이건……?"

"그간 수고 많았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단전마저 사라졌다. 거기에 일부 기억까지 상실한 상태다. 그럼에도 너는 나를 믿고 충심으로 따라 주었다. 또한 나의 사부님을 모심에 지극정성이었음을 내가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주, 주군……."

짜식.

엄청 감동했나 보군.

눈물까지 글썽인다.

"현화도상검법(玄化道翔劍法)이다. 태사조이신 현화검존께서 딱 이십 대 후반, 지금 네 나이 때 익히셨던 검법이라 기록되어 있다. 너에게 내리는 상이다."

털썩.

"주군!"

오체투지를 하고는 부르르 떨며 땅바닥으로 눈물을 툭툭 떨구는 계효보.

감동해도 정말 엄청나게 감동한 모양이다.

내가 다 울컥하네.

"부족한 신을 그리 생각해 주셨다니…… 흑흑.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할 일이 많다. 지금 죽으면 안 되지. 하하하."

어느새 내 눈시울도 빨개졌고, 더 울컥하지 않으려 일부러 농까지 했다.

"하지만 주군!"

녀석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며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는 주군의 이 큰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찌…… 어찌 그러한 것이냐? 혹 현화도상검법이 부족한 검법이라 생각해 그러는 것이냐?"

"신이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왜?"

"미천한 신이 주군을 모시는 수하는 맞으나, 현화문의 제자는 아닙니다."

"음. 그렇긴 하지."

"만약 현화문의 제자가 아닌 제가 현화도상검법을 익히게 된다면, 이는 주군의 사부님이신 문주님의 허락 없이 사문의 비급을 외인에게 전수하는 것으로, 주군께서 사문에 죄를 짓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신 계효보. 죽으면 죽었지, 신 때문에 주군께서 사문에 죄를 짓는 일을 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사실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닌…… 어험."

내가 전생에, 그러니까 광천마제 시절 패악질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라를 구했나?

어디서 이렇게 충직하고 믿음직한 수하가 굴러 들어왔나 모르겠다.

이 녀석이 어쩌다 나를 주군으로 여기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나저나 태사조님의 검법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무인이라면 목숨을 걸고 빼앗을 터인데, 감동이다.

계효보 이 녀석은 진짜다.

이따가 광마일기에 이것도 상세히 적어 놔야지.

이 녀석 진짜 너무 마음에 든다.

얼굴 빼고 다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이제는 저 닭대가리마저 예뻐 보인다.

"효보는 일어나라."

"존명."

짧은 사이 눈물범벅이 된 계효보.

난 녀석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꾹 눌러 잡았다.

"네 충심과 충언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먼 훗날, 내가 나의 힘을 되찾아 천하를 발아래 두었을 때, 그때 내 권좌의 좌편은 분명 너에게 줄 것이다. 그때도 오늘과 같이 거절한다면, 그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존…… 흑흑흑. 존명!"

또 한 번 감격해 오열을 토해 내는 사랑스런 나의 충신 계효보였다.

* * *

사부가 떠나고 일 년 반이 지났다.

내 나이 어느덧 스물한 살이다.

수십 종에 달하고, 수백 권에 달하는 사문의 무공 비급은 모두 익혔다.

머리로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확실히 그 깨달음까지 모두 얻었다.

내가 천재는 맞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분명 모두 처음 보는 무공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한 번 읽음과 동시에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오랜 시간 이미 익히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확실히 이 또한 회귀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하다.

문제는, 역시나 축기를 할 수도 없고 단전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솔직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를 건 부분은, 수많은 비급 중 그 주석이나 심득에 현경에 관련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과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한 것이다.

없다.

전혀 없다.

태사조가 비급에 남긴 주석들과 따로 남긴 심득은 세 번도 더 읽었다.

전혀 없다.

심지어 만약 사조가 사부에게 태사조가 현경의 반열에 올랐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면, 이 엄청난 사실은 영영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그 어떤 역대 선조도 자신의 무공에 관해서는 단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당연히 주석이나 심득도 죄다 도의 수양에 관한 것들이었고.

결국 무공은 모두 익히고 깨달았으나, 현 내 상태를 고치거나 개선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도 유추할 수 있었다.

우리 사부를 포함하여 우리 현화문의 역대 스물세 명의 문주.

그들이 남긴 심득의 내용과 수준이 거의 비슷비슷했다.

현경의 반열에 올랐다는 태사조와 다들 비슷한 깨달음을 얻고 비슷한 경지에 올라 그걸 심득에 남겼다는 말이다.

이게 무얼 유추하게 하냐 하면.

아! 믿기 힘들군.

우리 현화문의 역대 문주 모두가 무공으로 따지면 현경이요, 도로 따지면 최소 반선 이상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이건 그냥 사기다.

세상천지에 나가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죄다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거짓말쟁이라고 욕할 거다.

나만 알고 있자.

이건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니 말이다.

"두정구환!"

쉬이익.

샥샥.

"필유감역!"

쉬이익.

파파팟.

"환유변천!"

파파팟!

쉬이이익!

내가 평상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오늘도 여느 때처럼 계효보는 열심이다.

내가 준 현화도상검법을 사절한 계효보는, 자신이 원래 익히고 있던 구전백환검(九轉百幻劍)을 매일 저렇게 열심히 수련한다.

몸이 따라 주지 않아 그렇지, 이미 머리로는 내가 계효보보다 한 수 위다.

그래서 녀석의 무공도 틈이 날 때면 봐주곤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광마일기에 낭인 노검랑 도공우의 말을 기록해 놨다.

계효보에 관한 내용으로, 그의 무공 경지가 완연한 일류 무사 급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나는 사문의 무공을 모두 익혀서 보는 눈 또한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현재 계효보는 일류는 맞지만, 끝자락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수의 경지를 바로 벽 하나 남겨 둔 일류 끝자락의 경지.

완연한 일류와 일류 끝자락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왜?

노검랑 도공우가 계효보의 경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일 년 반 동안 수련을 하면서 계효보도 무공이 는 것일까?

그건 더더욱 아니다.

계효보가 다 좋은데, 무재는 진짜 최악이다.

살다 살다 저렇게 무재가 없는 놈은 진짜 처음 아닐까 싶다.

나의 가장 충직한 수하기에 실망할까 봐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진짜 최악이다.

몇 번 가르치면서 이게 인간을 가르치는 건지, 닭 새끼를 가르치는 건지 헷갈렸을 정도로 계효보는 무재가 없다.

지금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것 만해도 아마 엄청난 기연에 기연을 얻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하는 저 고생이, 다 헛수고라는 뜻이다.

이미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그릇의 양을 넘어선 무공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휴우, 어쩌지?

사실을 말해 주면 저 녀석 엄청나게 실망할 텐데.

뭐, 저렇게 오십 년이나 백 년 정도 수련하면 언젠간 진짜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니 놔두자.

우선 시간이 다 됐다.

내가 사문의 무공을 이미 두 달 전에 다 익히고도 이곳에 머물렀던 이유.

심토만력근(深土萬力根)을 얻을 때를 기다린 것이다.

무려 일 갑자의 내공을 머금고 있는 영약이다.

단전과 내공을 되찾을 수 있을지 시도해 보는 거다.

충격요법 비슷하다.

일 갑자의 힘으로 내 몸에 충격을 가해 볼 요량이다.

"효보!"

"충!"

땀을 뻘뻘 흘리며 구전백환검을 수련하던 계효보가 차렷 자세를 했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한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 테니 채비하도록."

"존명!"

어디로, 왜 떠나는지 묻지 않는다.

역시 무재 빼고는 다 최고라 할 만큼 사랑스런 녀석이다.

* * *

나는 심토만력근으로 일 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고작 스물한 살의 나이로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을 소유하게 되었다.

심토만력근은 신가산(新架山)의 동쪽 봉우리에서 개울을 따라 아래로 쉰 장……

(중략)

그때 나는 운이 좋게도 착한 사람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심토만력근은 말 그대로 심토(深土), 아주 깊은 땅속에 묻혀 있는 뿌리 영약이다.

그 땅을 파기 위해서 엄청난 고생을 할 뻔했는데, 우연히 만난 촌부 넷이 도와줘 그 수고를 면할 수 있었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광마일기 中

효보는 혹시 몰라 산 아래에 대기하라고 했다.

견물생심이라고, 내가 효보를 완벽하게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려 일 갑자의 내공을 품고 있는 영초다.

어차피 내가 먹을 건데, 보여 줘서 마음만 혼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의심이 아니라 배려다.

그리고 어차피 땅을 파는 건 착한 촌부 넷이서 곧 나타나 도와줄 테니 걱정도 없고.

엇!

저기 온다.

역시 광마일기에 적힌 그대로군.

"어이! 어서들 오시오. 여기요, 여기. 하하하."

난 손까지 흔들며 그들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런 나를 향해 올라오는 착한 촌부 넷이다.

어서 이들과 함께 심토만력근이 묻힌 곳으로 가야겠다.

땅은 이들이 파 줄 테니, 하하하.

"형님, 이 새끼 미친놈인 것 같은데요?"

"그러게. 우릴 보고 웃네? 큭큭큭."

"야! 너 이 근처에서 오장육부가 탈탈 털린 시체들이 발견됐다는 소문 못 들었냐?"

아! 씨파.

뭔가 좆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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