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구산사괴를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냐 하며 반발했다.
구산사괴의 정체와 그 사악한 음모까지 사부에게 다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사부는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뭐, 사부가 까라면 까야 하지 않겠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스승이신 내 사부님이신데.
그래서 나도 사부를 도와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모두 마무리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네 개의 봉분을 마무리하는 작업은 역시나 계효보에게 맡겼다.
무덤을 파고 흙으로 메우고, 다 계효보가 했다.
한 마디 투덜거림이나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고 열심이다.
이 녀석 진짜 괜찮은 놈이다.
잠깐 짬이나 광마일기에 계효보 녀석에 대한 칭찬을 가득 기록해 두었다.
어쨌거나 계효보만 그렇게 무덤에 남겨 두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물론, 우석혜는 여전히 혼자 봄바람을 맞는 새색시 얼굴이다.
초향도 계속 ‘꺄르르’ 웃으며 날 졸졸 따라다니고.
사부와 나만 분위기가 무거웠다.
"사부님."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는 사부를 불렀다.
조금까지 깊은 고민과 수심에 빠졌던 사부였는데, 내가 부르자 또 감동적이기까지 한 인자한 미소로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오늘 우 여협이 계시지 않았다면, 사부님과 저는 죽었을 겁니다."
"……."
사부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감동적이었던 그 인자한 미소도 순간 얼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본 문에 봉인되어 있는 비급들. 꼭 구산사괴만 알고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악치야……."
사부가 입을 떼었다가 곧바로 닫았다.
사부의 얼굴에 있는 수심이 더 짙어졌다.
꼭 죄를 짓는 것 같아 죄송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지금 아니면, 영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사부님. 지킬 힘도 없이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그 결과를 알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고요. 제게 그리 가르침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그런 말까지 했었더냐?"
모른다.
역시 기억나지 않으니.
"사부님. 최소한…… 저는 최소한 제 제자에게 이런 위험한 순간을 겪게 하지 않을 겁니다. 본 문의 비급을 탐하여 찾아오는 자들한테서 제 제자만큼은 지켜 주고 싶습니다."
"악치야…… 미안하구나."
사부가 매우 아파한다.
괴로워한다.
자책하고 있다.
본인 때문에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고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리라.
아닌데.
결코 사부의 잘못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난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사부가 조금은 바뀌길 바랐다.
최소한.
내가 아니어도 본인 스스로를 지킬 힘 정도는 갖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사부님. 무공…… 익히세요. 저도 익힐 겁니다."
"악치야, 하지만 그건……."
"저는 둘째치고, 먼 훗날 제 제자도 오늘과 같은 위험에 처하게 만드실 겁니까? 사부님의 사손입니다. 그때도 우 여협이 도움을 줄 거라 생각하세요? 아니, 어쩌면 저는 제자를 거두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현화문은 명맥이 끊기게 될 테고요."
"악치야, 하지만…… 휴우."
"본 문의 비급, 봉인을 푸셔야 합니다."
난 눈에 힘을 잔뜩 주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사부를 향해 말했다.
내 말에 사부가 미세하게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사부의 눈동자가 크게 떨리고 있음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해 봐야겠다."
사부는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내게 등을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는 사부의 고민은 정말 오랜 시간 이어졌다.
어느새 무덤의 뒷마무리를 마친 계효보까지 올라왔고.
우석혜와 초향, 그리고 나와 계효보 모두 마당 한쪽에서 사부의 고민이 끝나길 숨죽여 기다렸다.
사부가 다시 등을 돌린 것은 한나절이나 지난 후였다.
* * *
"악치야."
"네, 사부님."
사부의 부름에 난 좁은 마당을 뜀박질로 달려 그 앞에 섰다.
결심한 모양이다.
가득했던 수심이 얼굴에서 말끔히 사라진 상태다.
더불어 내 심장도 쿵쾅쿵쾅 요동쳤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사문의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문의 무공을 익힌다는 것만으로 내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토록 팔팔 뛸 정도로 기쁘고 흥분한 건, 이제 더 이상 사부가 위험에 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쁜가 보구나?"
아! 너무 티가 났나?
"입이 귀에 걸렸다, 녀석아. 허허허."
"그, 그런가요?"
"그동안 무공을 무척이나 익히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사부님. 하지만 제가 무공을 익히려는 이유는 사부님을……."
"안다. 알아. 내 어찌 네 생각을 모르겠느냐? 모두 이 늙은 사부를 위하는 마음 아니겠느냐?"
"사부님……."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렸다.
사부의 따스한 눈빛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그 음성이, 순간 나를 울컥하게 만든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고작 글로만 읽은 사부인데 왜 이렇게 볼 때마다 나는 사부에게 감격하고 감사해하는지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초향에게도 그랬군.
분명 초향도 그때 처음 보는 것이었다.
광마일기에 적힌 내용이 매우 슬픈 내용이긴 했지만, 초향을 다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오열하고 영혼으로 통곡했다.
확실히 기억은 완전히 잃었지만, 일부 감정은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다.
지금 이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건 나중에 다시 생각하고.
"악치야. 하지만 봉인을 해제하는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니라. 아마 태사조님께서는 무공이 고강하셔서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했을 터이고, 어쩌면 이런 상황 자체를 예상치 못했기에 그런 유언을 남기셨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일백 년간 지켜 온 태사조님의 유언을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쉽게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나."
"하지만 사부님! 만약 당장 내일이라도……."
"허허. 우선은 우 여협도 계시고 너무 그리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을 것이다. 내 육십 년을 더 살았지만, 이런 경우는 오늘이 처음 아니겠느냐? 너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그, 그렇습니다만…… 전 혹시라도……."
"됐다. 무공은 익힐 것이다."
"정, 정말이십니까?"
기쁜 마음으로 화들짝 놀라 물었다.
하지만 곧바로 의문이 들었다.
봉인된 비급을 해제하지 않겠다면서 무슨 무공을 익히겠단 말인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부는 여느 때처럼 허허거리며 시선을 내게서 떼어 우석혜 쪽으로 돌렸다.
"우 여협."
"아, 네. 오라버니…… 앗! 죄송해요. 네, 유 도사님."
와! 진심 적응 안 되네.
심각한 분위기 속, 사부의 부름 한 마디에 초승달 미소와 함께 엉덩이까지 마구 흔들며 쪼르르 달려오는 우석혜다.
"네, 유 도사님. 저 왔어요. 호호."
"신세를 졌습니다."
"아잉, 별말씀을 계속하시네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 호호호."
"그런데 신세를 한 번 더 졌으면 합니다."
"말씀만 하세요, 유 도사님. 호호호."
부탁은 사부가 하는데,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한 것은 오히려 우석혜였다.
아주 별빛이 쏟아지는 눈망울로 사부의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였다.
"무공. 제가 무공에 무 자도 모르는 촌부라. 무공을 익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무, 무공이요? 정말로요?"
"네. 다 들으셨다시피, 아무래도 제자 녀석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부의 입에서 무공이란 말이 나오자, 우석혜도 순간 진지한…… 은 개뿔.
찰나 진지해지나 싶었지만 역시나 사부를 향해 교태스러운 초승달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 무도(武道)를 가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죠."
"좀 어렵습니다, 우 여협."
"음…… 그러면 일단!"
우석혜가 갑자기 몸을 돌려 뒤에 있던 초향을 바라봤다.
"향아. 이리 온."
"네, 사부님."
우석혜의 부름에 이번에는 초향이 해맑게 웃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유 도사님. 어떤 무도를 가고, 또 어떤 마음으로 무공을 익히고, 다시 어떤 종류의 무공을 익히느냐를 다 떠나서……."
"네."
"첫 시작은 무조건 삼재검법(三才劍法)이에요."
"아! 그렇군요.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주시다니. 허허허."
이런 미친!
저 할망탱구가 우리 현화문을 통으로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나!
뒷마당에 천하제일신공이 가득 쌓여 있는데, 무슨 빌어먹을 삼재검법이야!
내가 막 사부를 말리려 했으나, 우석혜가 더 빨랐다.
어느새 손에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그것을 초향에게 건넸다.
"향아. 지금까지 열심히 익힌 검법. 시사부님께 보여 드려라."
"네, 사부님. 헤헤."
난 즉시 초향을 제지하고 사부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뭇가지를 마치 무슨 신검이라도 되는 양 진지한 눈빛으로 쥐어 잡은 초향.
그리고 그 모습을 또 너무나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부.
둘이 그렇게 너무 진지했기에, 차마가 아니라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얍!"
가로 베기.
"얍!"
세로 베기.
"얍!"
찌르기.
그 단순한 세 개의 초식이 초향이 쥔 나뭇가지를 통해 표출되었다.
다섯 살임을 감안한다면 초향의 삼재검법은 훌륭함을 넘어 거의 천재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섯 살이고 삼재검법일 뿐이다.
이것으로는 우리 현화문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난 절로 한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 후, 사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사부와 다시 대화를 시도하려고 할 때였다.
"마 도사. 자중하시게."
우석혜가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얼굴로 날 가로막으며 그리 말했다.
뭔가 싶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사부를 봤는데…… 와!
뭐지?
사부가 도라도 깨달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 선풍도골이고 현묘함이 마구 풍기는 사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 사부가 진짜 신선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게…… 이게 말로만 듣던 무아지경(無我之境), 몰아(沒我) 뭐 이런 것인가?
초향의 삼재검법을 통해 무슨 엄청난 깨달음이라도 얻었단 말인가?
잠시 후.
잠깐이란 시간 동안, 거의 석상(石象)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굳어 있던 사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허허. 태사조님께서 어찌 무공을 통해 도를 깨치려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구나. 너도 보았느냐, 악치야?"
"네? 무엇을요?"
"허허허. 보지 못했다면 보도록 하여라."
사부가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항시 명상을 하던 평상 바로 옆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맞은편의 을수산(乙樹山)을 지극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부.
무언가 엄청나게 멋있긴 한데, 도대체 무엇을 보여 주려는 것일까?
또 왜 나는 지금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때.
사부가 오른손을 쭉 뻗어 가슴 위치까지 올렸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아주 천천히, 또 천천히 가로저었다.
조금 전 초향이 보여 줬던 삼재검법의 일 초식, 가로 베기를 손으로 펼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젠장!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수백 장이나 떨어진 을수산의 산 중턱이 통으로 가로 베여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부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향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삼재검법 이 초식, 세로 베기였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미친!
미쳤다!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을수산이 정확히 반으로 갈려 쪼개지며 무너진다.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빠진 턱이 흙바닥까지 떨어져 있었고, 사부의 삼재검법은 끝나지 않았다.
삼재검법 삼 초식, 찌르기.
이미 쪼개지고 무너져 내린 을수산을 향해서가 아닌, 하늘 위 태양을 향해서였다.
사부가 서 있는 자리로 바람이 쏠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은 검은빛의 돌풍이 되어 사부를 휘감았다.
그 자체만으로 사부에게 지금 얼마나 많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부는 지금, 십사 갑자의 내공으로 삼재검법의 찌르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
대지의 떨림.
마치 이 일대를 모두 뒤엎어 버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하다.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대기의 폭발.
천하를 모두 집어삼킬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십사 갑자에 달하는 현강(玄剛, 검은 강기)의 발사.
사부가 태양을 향해 쏘아 보낸 검은 강기의 줄기는, 마치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땅을 덮어 버릴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부의 삼재검법이었다.
아!
내가 이걸 광마일기에 기록하면서도 현실감이 없군.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사실은 사실인데.
우리 사부.
이제부터는 무적 할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