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나, 낭군 오빠랑 같이 탈래."
계효보가 급히 말 한 필을 구해 왔다.
그 사이 우석혜도 초향과 함께 위화궁에 자신의 행보를 알리고 돌아왔다.
막 말을 타고 출발하려던 그때, 초향이 내 소매를 잡으며 간절한 눈빛과 함께 그리 말한 것이다.
"낭, 낭군 오빠?"
"응, 낭군 오빠. 사저들이 혼인할 때 다 ‘낭군님, 낭군님’ 이렇게 불렀어. 그러니 오빠도 낭군님이고, 오빠니까 낭군 오빠. 헤헤."
지난 생에서 그렇게 나한테 당하고도, 내가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음에도, 또다시 나에게 낭군이라 부른다.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난 곧바로 시선을 우석혜에게 보냈다.
우석혜는 대꾸 대신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난 초향을 번쩍 들어 말에 태운 후, 곧바로 뒤따라 말에 올랐다.
말을 타고 사문으로 달려가며 난 속으로 울었다.
그리고 세 가지 맹세를 했다.
‘첫째, 다시는 초향과 우석혜 그리고 위화궁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리라. 둘째, 그게 언제가 됐건 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온다면, 나는 내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걸고 이들을 도울 것이다. 마지막 셋째, 초향에게 천하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또래의 남자를 맺어 줄 것이다.’
"낭군 오빠, 달려!"
난 그렇게 마음으로 울고 맹세하며 초향과 함께 광야를 달렸다.
* * *
하남 허창에서 절강 항주로 갈 때는 열흘이 걸렸다.
하지만 돌아올 때도 그렇게 빠르게 달릴 수는 없었다.
아직 어린 초향에게는 이렇게 긴 여정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석혜가 밤마다 초향에게 추궁과혈과 진기를 불어넣어 운기조식까지 해 주었기에 별 탈 없이 허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우석혜는 지친 말들에게까지 진기를 주입해 주었다.
왜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해 봤을까?
광마일기에 적혀 있진 않지만, 나도 그런 시도를 해 보았을까?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그런 생각은, 미물마저 귀히 여기는 선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 같은 쓰레기가 어디 그런 생각을 해 보았겠는가.
우리는 우석혜 덕분에 허창 갑돌산에 열여드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산사괴 습격 바로 전날이다.
* * *
"악치야, 한 달이나 어딜 그렇게 다녀오나 했더니 귀한 손님을 모셔 왔구나. 허허허."
갑돌산 중턱의 작은 모옥.
그리고 작은 마당.
그에 어울리는 초라한 평상.
그곳에 앉아 먼 산을 향한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던 우리 사부.
한 달 만에 봤지만, 역시 우리 사부는 우리 사부다.
허허 웃으며 나를 반겨 주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감동케 한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말도 없이 먼 길을 다녀왔습니다."
"허허. 괜찮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걸로 족하니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부의 눈가가 촉촉하다.
꽤 걱정했던 모양이다.
또 한 번 사부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게 했군.
나란 놈은, 휴우.
"손님들께선 어서 이리로 드시지요."
사부님은 계효보 녀석도 손님으로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효보."
"충."
"네가 차를 내오도록 하여라."
"존명."
효보가 빠른 동작으로 주방을 찾아가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악치야, 손님께……."
"사부님, 저 친구 이야기는 추후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손님이 아닙니다. 제가 모신 손님은 이 두 분입니다. 우석혜 여협과 초향 아가씨입니다."
사부가 곧장 우석혜를 바라봤다.
"악치의 사부 유현이라고 합니다."
사부는 우석혜에게 인사했지만 답을 한 것은 우석혜가 아닌 초향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낭군 오빠의 예비 신부 초향이라고 해요. 헤헤."
초향의 맹랑한 인사말에 사부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면서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이것도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우 여협과…… 어? 우 여협, 괜찮으십니까?"
뭐지?
갑자기 우석혜가 왜 이러지?
얼굴이 홍시인 양 붉게 달아올랐다.
고개도 잘 들지 못하고, 심지어 몸까지 배배 꼰다.
화장실이 급한데 첫 만남이라 부끄러워 말을 못 하는 건가?
"저 혹시 측간을 가셔야 하시면……."
"아잉. 아니네."
뭐, 뭐야?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 방금 ‘아잉’이라고 했는데?
저 허공을 휘젓는 손동작은 또 뭐고?
뭐야?
왜?
갑자기 없던 주화입마라도 걸렸나?
"허허. 누추하지만 우선 이리로 앉으시지요, 우 여협."
"아, 네. 전…… 저는 우석혜라고 합니다. 현화문의 유 도사님을 뵙게 되어…… 호호. 아잉. 여긴 경치가 좋네요. 호호호."
미, 미친!
도대체 이 뜬금없는 전개는 뭐냐고!
이곳으로 오는 길, 누가 우석혜가 먹는 음식에 독이라도 탔나?
절강의 망망대해에서 칠 주야나 나를 향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죽이려 했던 그 무적 할매가 맞아?
다시 무인도로 끌고 가 삼 일 밤낮을 잠 한숨 안 재우고 개 패듯 두들겨 패던 그 무적 할매가 맞냐고!
내가 사람을 착각해서 잘못 데려온 건 아닐까?
도저히, 도저히 내가 아는 무적 할매 우석혜는 저런 모습을 보일 사람이 아닌데.
아!
뭔가, 뭔가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고, 우리 향이 예쁘게 앉아야지 시사부님께 사랑받지. 호호호."
아무래도 사람이 바뀐 것 같다.
무적 할매가 저럴 수는 없다.
지옥에서 악귀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도, 생으로 다 씹어 드실 것만 같던 무적 할매가, 도저히 저런 모습을 할 수는 없다.
"허허허. 아이의 눈에 총기가 가득하고 그 미소에는 선심(善心)이 가득하니, 하늘의 축복을 가득 받은 아이인 것 같습니다."
"어머, 유 도사님께서는 말씀도 어쩜 그리 잘생기게…… 아니, 어멋. 죄송해요. 말씀도 멋있게 하세요. 호호호."
"허허허. 감사합니다, 우 여협."
허허거리며 웃는 사부.
아!
그거였나?
우리 사부.
내가 첫 회귀를 하며 지금까지 작성한 광마일기에, 짧지만 계속해서 언급하고 또 기록했다.
원래 잘생겼다.
그것도 엄청나게 잘생겼다.
거기에 누가 일 갑자의 시간 동안 산속에 틀어박혀 도만 닦은 진짜 도사 중의 진짜 도사 아니랄까 봐, 현묘하면서도 고아하기까지 하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동적인 풍모와 기운이 마구 풍긴다.
나도 볼 때마다 그렇게 감동했는데, 그걸 접한 대상이 여자라면…… 오죽하겠는가?
아! 정말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가만, 사부가 예순넷.
우석혜가 서른다섯.
무려 스물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뭐, 사실 외모만 보면 열 살 정도의 차이도 보일까 말까 하고.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호호호. 그래서 말이에요……."
"그렇습니까? 허허허."
아! 분위기 너무 좋다.
내가 낄 틈이 없을 정도로.
생각지도 못했던 황당한 전개에 나는 결국 계효보가 차를 우리고 있는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낭군 오빠. 나도. 헤헤헤."
주방으로 향하는 길, 초향이 아장걸음으로 따라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 * *
구산사괴 습격 당일.
사부는 언제나 그렇듯 마당 평상에 앉아 먼 산을 향한 상태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아! 진짜 적응 안 되네.
우석혜, 무려 당금 천하 무림의 최고수라 할 수 있는 그녀가.
사부 뒤에 멀찍이 홀로 서 있다.
손까지 맞잡고 얼굴이 발그레하여 귀신에라도 홀린 듯 그렇게 사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다.
돌겠다.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것 같지만, 발까지 동동 구르고 있다.
내가 데려온 것이 진짜 우석혜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지금 알게 되겠군.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던 사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 가득 근심이 차 있다.
사부는 서둘러 우석혜에게 향하며 또 나와 계효보까지 불렀다.
"지금, 음…… 우 여협과 향이가 온 시점에 하필 이런 일이. 우 여협."
"네, 유 도사님. 호호호."
"아무래도 안 좋은 일이 생길 듯합니다. 우선 제가 안내하는 곳으로 몸을 피해 계셔야……."
"어멋. 혹시 지금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사람들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가 보다.
우석혜는 사부보다 훨씬 이미 구산사괴의 기감을 감지한 것이리라.
내공에 있어서야 사부가 천하제일이겠지만, 그 내공을 이용해 경계를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우석혜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사부는 우석혜의 무공 경지를 모른다.
조금 놀란 얼굴로 우석혜를 보며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우석혜가 구산사괴 따위에게 겁을 먹을 리가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그냥 신경도 쓰지 않는 우석혜였다.
여전히 사부를 바라보는 눈에는 강렬한 열망과 애정만이 듬뿍 담겨 쏟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잉, 우리 마 소도사님 말이 맞았네요. 호호호. 그런데 유 도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무공이란 걸 쪼금, 아주 쪼금 익혔거든요.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세요. 제가 막 무식하게 드잡이질하고 싸우는 그런 여자는 절대 아니랍니다. 호호호."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해야 하나?
아님, 그냥 능력 없는 나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인가?
구산사괴 때문에 나는 무려 일곱 번이나 죽었다.
사부와 나는 일곱 번이나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했고, 나는 일평생 그 아픔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했다.
광마일기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마두가 되고, 대마두가 됐으며, 다시 대마왕과 광천마제가 되어 천하를 피로 물들인 그 시작이 바로 구산사괴였다고.
그렇게 나에게는 끔찍하고 무섭기도 하며 증오로 가득한 구산사괴인데.
하!
우석혜는 여전히 초승달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다.
마치 하찮은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려 손바닥으로 단숨에 때려죽이면 될 뿐이라는 듯.
"그, 그게…… 우 여협께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저의 사문이고, 문주는 저입니다."
"어멋,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게."
사부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우석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이러다 또 큰일 치를지도 모른다.
내가 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 여협, 사부님께서는 무공을 전혀 모르십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은 살기가 가득합니다. 그러니…… 사부님! 도움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제게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더냐?"
사부가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모른다.
기억이 안 나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급한 마음에 사부를 향해 버럭 소리까지 질렀다.
사부가 놀란 눈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미세하지만 몇 번이나 끄덕인 후 다시 우석혜를 향했다.
"우 여협, 지금 오는 자들의 기세가 사뭇 흉흉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본 문은 무공을 조금도 익히지 않아 대처할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우 여협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와 제 제자의 안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부가 정중하게 우석혜를 향해 부탁했다.
그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던 우석혜의 입은 아예 그냥 그 입꼬리가 귀에 걸려 버리고 말았다.
"우리 사이에 부탁이라뇨. 호호호. 수고랄 것도 없는 일인데요. 호호호. 금방 처리할 테니, 저기 앉아서 보고 계세요. 쉬워요. 아주 쉬워요."
"그래도 최대한 조심을……."
"감동이에요. 훌쩍."
"네?"
"지금 제 걱정해 주시는 거잖아요."
"그, 그렇습니다만……."
"우리 유 도사님과 작은 마 도사님을 음해하러 오는 저치들. 제가 용서치 않겠어요. 호호호."
아! 원래 내가 예상했던 결말은 장엄하면서도 감동적인 것이었는데, 진짜 뭔가 많이 틀어지긴 했다.
뭐, 그래도 됐다.
사부님만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희극이 됐건 우스개가 됐건 상관없으리라.
그렇게 우리가 대화의 결말을 맺을 때쯤.
그들이 찾아왔다.
살기를 가득 풍기며 마당에 모습을 드러낸 사 인.
구산사괴다.
* * *
"허리에 칼을 찬 닭대가리 저 녀석이 나설 줄 알았더니, 웬 아줌마가 나서는……."
툭.
구산사괴의 황노.
그는 뱉으려던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석 장의 거리를 두고 우석혜와 마주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말을 하던 도중 우석혜가 마치 파리라도 쫓아내듯 허공에 손을 살짝 휘저었더니 그냥 툭 하며 쓰러져 버린 것이다.
피를 뿌리지도 않고, 내가 있는 거리에서는 그 어떤 상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보기에는 그냥 황노가 갑자기 혼자 쓰러진 것처럼 보였다.
황노를 그렇게 일 수에 죽여 버린 우석혜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부도 나도, 또 초향과 계효보 모두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우석혜가, 아니 우리가 아니라 정확히 사부를 향해 초승달 미소를 짙게 지어 보인 후 다시 남은 구산사괴를 향했다.
남은 구산사괴 셋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형님! 형님! 왜 갑자기 쓰러져……."
툭.
말을 하던 여발무가 쓰러졌다.
아니, 죽었다.
"뭐, 뭐야? 도대체 무슨 짓을……."
툭.
위은치가 죽었다.
"살…… 살려 주싶……."
툭.
마지막으로 늦게나마 사태 파악을 한 한인심이 죽었다.
우석혜는 그렇게 손을 한 번씩 허공에 휘젓는 것만으로 고수 급 한 명과 일류 급 무사 셋을 죽여 버렸다.
그런 후 다시 뒤를 돌아 여전히 놀란 얼굴의 사부를 향해 초승달 눈으로 미소를 짙게 그려 보였다.
구산사괴는 그렇게 끝났다.
아! 이거 너무 허무한 것 같기도 하고.
뭐, 진짜 천하제일인이 나섰는데 이런 결말이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지금까지 무슨 개고생을 했나 허탈한 마음도 들고.
아무튼 내가 사람을 제대로 데려온 것 같긴 하다.
지금도 사부를 향해 몸을 배배 꼬며 요상한 눈빛을 보내는 그녀가 내가 원래 알던 그녀가 맞는지 좀 의심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확실히 맞는 것 같다.
그녀.
그녀가 바로 무적 할매 우석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