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녀가 있다.
그녀가 보인다.
"꺄르르. 사부님, 꽃이 폈어. 꺄르르르."
이번 생에는 나라는 쓰레기가 아닌, 천하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또래의 남자와 평생 행복하게 살도록 해 주리라.
거의 기적이라 할 속도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항주의 이름 없는 해변.
그곳에는 여전히 아담한 초가가 한 채 있고, 마당에는 그녀가 있다.
무적 할매…… 아! 무적 할매가 젊다.
사실 할매를 내가 처음 만났을 때도 할매라 부르기엔 좀 그렇긴 했다.
쉰둘이었고, 실제 외모는 삼십 대 후반이나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을 뿐이니.
지금은 서른다섯 살일 테다.
그리고 그 외모는, 고작 이십 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남에서 이곳 절강 항주까지 미친 듯 달려온 나와 계효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마당에서 꽃을 보며 무적 할매를 향해 ‘꺄르르’ 웃는 나의 다섯 살 부인.
하지만 할매, 아니 그녀 사부의 시선은 이미 나에게 꽂혀 있었다.
경계 따위가 아니다.
우석혜의 경지면, 진즉 나나 계효보의 경지는 파악했을 터.
자신들에게 그 어떤 해도 가하지 못함을 알고 있으리라.
그냥 이상해서 쳐다보는 것일 테다.
열흘 동안 씻지도 못하고, 하루 한 끼만 먹었으며, 거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말이다.
"꺄르르. 꺄르르. 꽃이 예뻐. 꺄르르르."
차마 꽃을 꺾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우석혜를 향해 웃기만 하는 나의 부인.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그녀들이 이곳에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이곳에 있어서.
위화궁의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른다.
일 년 중 절반 정도, 궁주인 우석혜가 직접 항주의 기루들을 시찰하기 위해 궁 밖으로 나온다.
그때 위장으로 머무는 곳이 바로 이곳 초가다.
내가 내 부인, 초향을 처음 만났을 때도 시찰을 위해 이곳에 머물러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정기 시찰이 아니라 광천마제 마악치인 내가 항주로 온다는 보고를 받고 일부러 나왔다고 했다.
죽일지 말지를 보고 판단하겠다며.
내가 처음 초향을 만난 날, 밤새도록 우석혜가 자리를 비웠던 이유는 내가 부순 스물세 번째 기루의 뒷수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밤새 위화궁 여고수들과 수습을 도운 후 돌아왔더니, 초향은 울고 나는 술 냄새를 풍기며 초향의 침대에 자고 있었고.
어쨌거나 천만다행으로 우석혜와 초향까지 모두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빨간 꽃, 이건 파란 꽃, 사부님! 이건 노란 꽃. 꺄르르르."
나의 우석혜를 향했던 시선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도착과 동시에 내 시선은 어린 초향에게 머물러 떨어질 줄 몰랐다.
그리고 곧, 그렇게 울지 않겠다고 수백 수천 번을 다짐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꽃을 보며, 또 자신의 사부를 보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초향.
그래서 더 슬펐다.
나란 인간 때문에, 저 예쁘고 사랑스런 얼굴이 칼에 난도질당하지 않았겠는가.
팔이 잘리고, 흙바닥을 구르고 다시 일어서고, 개처럼 두들겨 맞으면서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웠던 그녀다.
저렇게 작고 예쁜 아이가.
고작 나 같은 쓰레기 때문에.
한 번 터진 울음은 도저히 수습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이곳까지 온 목적마저 모두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꺼억꺼억 오열을 참고 토해 내길 반복하며, 그렇게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고마웠다고.
미안하다고.
내 영혼을 불태우는 마음으로 사죄하고 감사하리라.
탁!
"으윽."
막 초향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으려는 순간.
무언가 내 머리를 강타하며 번뜩이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나와 초향 사이로 다가온 우석혜가 마른 나뭇가지로 내 머리를 때린 것이다.
"이런 변태 같은 놈을 봤나."
눈을 부라리며 호통치는 그녀.
동시에 초향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초롱초롱 별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에는 호기심과 놀람이 섞여 있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초향과 눈이 마주치자 내 감정을 더 주체할 수 없었다.
"으어어엉. 엉어엉. 끄억억. 엉엉엉."
오열을 토해 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용암이 터지듯 그렇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부님, 오빠가 많이 아픈가 봐."
그런 내 모습에 초향이 우석혜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미, 미안해. 미안해요. 엉엉엉. 내가…… 엉엉엉. 내가 잘못했소. 엉엉엉엉. 정말…… 엉엉엉. 미안해요. 엉엉엉."
난 무릎까지 털썩 꿇고 초향을 향해 그리 울부짖었다.
미친놈이라 생각해도 좋았다.
아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우석혜도 놀란 얼굴이었다.
더는 나를 부릅뜬 눈으로 보지도 않았고, 손에 쥐었던 나뭇가지마저 바닥으로 버려 버렸다.
하지만 나의 오열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땅을 짚고,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계속 초향에게 사과하고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 작고 앙증맞으나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나를 감싸 주었다.
초향.
초향, 그녀가.
그 작은 양팔로 나를 감싸며 안아 준 것이다.
이미 내 얼굴은 콧물과 눈물 그리고 흘러내린 침으로 범벅이 됐지만, 그래도 초향은 나를 더더욱 꼭 안아 주었다.
그 따스함에 영원할 것 같던 내 곡소리도 멈추고 말았다.
그저 흐느낌과 뜨거운 눈물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오빠, 울지마. 사부님이 이제 안 때릴 거야. 내가 막아 줄게."
작은 손으로 내 등까지 토닥이며 위로해 주는 초향.
난 억지로라도 울음을 멈추고 미소 지어야 했다.
"일단 저기로 가서 앉지. 먼 길을 온 듯한데, 내가 차라도 한 잔 내오겠다. 향이는 나를 따라와라."
"네."
우석혜와 초향이 함께 초가 안으로 들어갔다.
우석혜의 손을 잡고 초가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초향은 끝까지 나를 걱정해 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그렇게 제가 말씀을 드려도 사부님은 믿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분명 저와 제 수하가 그들의 모의를 듣고 확인했습니다. 한 달 뒤, 아니 이제는 십구 일 남았습니다. 그들 넷이 사부님을 죽이고 사문의 비급을 강탈해 갈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우 여협."
아까 눈물을 너무 많이 쏟았기 때문일까?
내가 이곳까지 온 사연과 목적을 말하면서도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대신 내 진심을 보여야 했다.
나는 마당에 있는 낡은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만 살릴 수 있다면, 이깟 무릎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꿇을 수 있다.
아니, 그걸 다 떠나.
나는 평생 우석혜와 초향 그리고 위화궁 여고수들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해야 한다.
나의 죗값은 그것으로도 만분지 일조차 갚지 못한다.
"음…… 사연이…… 매우 안타깝긴 하구나."
갈등하는 것일까?
그녀가 연신 초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다시 마주쳤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랬던 것인가? 처음에는 변태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는 미친 게 아닌가 했네."
"그, 그게…… 실은 예전에 저의 크나큰 잘못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됐습니다."
"음, 향이만 한 여동생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그건 더 묻지 않겠네."
"네."
다시 고민에 빠진 우석혜.
이상하게 초조하지도, 또 걱정되지도 않았다.
아마 초향에 대한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러, 우석혜가 다시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현화검존에 대해서는 나도 익히 알고 있네. 그 현화문이 아직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안타깝긴 하고…… 내가 위화궁의 십이 대 궁주인 것을 어찌 알았는지도, 자네의 말대로 묻지 않겠고. 그런데 말이야."
다시 갈등하는 그녀.
틀어진 것 같다.
돕지 않아도 난, 나는, 할 말이 없다.
사부님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더 부탁할 수도 없다.
그냥 내가 죽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내 목숨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미안하네, 마 도사. 본 궁에도 본 궁의 율법이 있다네. 무림의 일에 관여할 수 없어. 현화문과 현화검존에 대한 존경 때문에라도 꼭 도와야 하겠으나, 그럴 수 없는 본 궁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게. 정말 미안하네."
미안한 건 난데.
염치없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 것 자체가, 내가 진짜 나쁜 놈이고 쓰레기임을 증명한 것인데.
우석혜는 오히려 한껏 미안한 얼굴로 나에게 사과하였다.
"아닙니다. 초면에 찾아와 이런 무례한 부탁을 한 제가 실례를 한 것이지요. 우 여협과 초향 아가씨에게 사죄드리겠습니다."
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 그대로 머리를 땅에 대고 다시 한번 사죄하였다.
더더욱 난처하고 미안한 얼굴을 하고 마는 우석혜였다.
그런데 그때.
내가 숙였던 고개를 들던 순간, 초향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바닥을 짚고 있던 더러운 내 손까지 잡으며, 우석혜를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
"사부님, 우리 이 오빠 도와줘요."
"향아."
우석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초향을 부른 후 말을 이었다.
"너도 본 궁의 율법을 알지 않느냐?"
"응, 알아요. 그래도 도와줘요. 이 오빠 도와주고 싶어."
아! 또 눈물샘이 열리고 말았다.
와락 쏟아지는 눈물은 홍수라도 난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 오빠. 울지마. 우리 사부님이 도와줄 거야."
그런 나의 등을 토닥인 후 다시 우석혜를 바라보는 향이.
"나도 율법 다 알아. 다 외웠잖아요."
"그런데 어찌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방법 있어."
"방, 방법?"
"응."
"방법이…… 향아, 그만하거라. 네가 그럴수록 마 도사가 더 힘들어진단다."
"아냐. 있어. 진짜 있어요, 방법."
"휴우."
결국 우석혜는 초향과 펑펑 눈물을 쏟아 내는 나를 번갈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하지만 초향은 멈출 줄 몰랐다.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마라.’ 이게 우리 율법이잖아요. 그쵸?"
"그걸 잘 알면서……."
"그런데 사부님. ‘본 궁의 제자가 위험에 빠지면, 본 궁은 모든 힘을 동원해 그 제자를 돕는다.’ 이것도 우리 율법이고."
"하지만 마 도사는 본 궁의 제자가 아니지 않느냐?"
"이제 하면 되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
그때였다.
초향이 내 손을 그 앙증맞은 손으로 강하게 쥐며 우석혜를 향해 말했다.
"나, 이 오라버니한테 시집갈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 돼요, 사부. 내가 오라버니한테 시집가면, 오라버니도 우리 위화궁 사람 되는 거잖아. 율법에도 ‘본 궁의 제자가 혼인을 하면, 그 남편과 자식까지도 본 궁의 제자를 돕듯 도와야 한다.’라고 적혀 있잖아요, 사부. 안 그래요?"
"그, 그런 율법이 있긴 있는데."
"헤헤헤. 그거 봐요. 사부님, 설마 우리 율법 어길 거 아니지?"
"향아."
"왜요?"
"너 이제 다섯 살이란다."
‘무림의 일에 관여하면 안 된다.’라는 율법이 위화궁에 분명 존재하고, 심지어 가장 중요한 율법 중 한 가지다.
하지만 내가 광천마제 시절 초향이 위화궁의 여고수들과 나를 도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저러한 예외 조항의 율법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황당하고 또 황당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너무 충격적일 정도의 황당함에 어느새 쏟아지던 눈물까지 멈추어 버렸다.
그럼에도 둘의 이런 황당한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약혼 먼저 하면 되죠. 아가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그게 뭐더라? 임신 혼약? 태중 혼인? 아, 맞다. 태중 혼약. 남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혼인도 한다던데, 나는 다섯 살이나 됐으니 약혼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사부님. 헤헤."
"그,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느냐?"
"몰라. 어디서 들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네. 헤헤헤."
초향의 말에 우석혜는 할 말마저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나 또한 놀람과 황당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저 마당 끄트머리에서 공손한 자세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계효보 녀석마저 턱이 빠질 정도로 놀란 얼굴을 해댔다.
하지만 우석혜의 황당함과 놀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사부 그리고 우리 현화문을 간절히 돕고 싶어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약, 약혼은…… 어험. 우선 구두로 약혼에 대해 논의하고. 추후 파혼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네."
그녀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난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고 복잡한데, 우석혜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고 명분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우선 자네의 사부를 만나 이 약혼에 관해 이야기해 보아야겠네. 어험. 어험."
헛기침을 두 번 연속한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궁의 율법이 지엄하니, 나 또한 그 율법을 따라야 하고. 만약 자네와 향이의…… 어험. 어험. 약혼에 관해 자네 사부와 대화를 나누던 중, 혹시라도 불의의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건 자네와 자네 사부, 그리고 현화문의 일에 관여하는 게 아니라, 내 제자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것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여…… 여협. 여협…… 흑흑흑."
또 눈물이 쏟아졌다.
고개가 절로 떨구어졌고,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폭포수처럼 쏟아져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그리고 이내 그 앙증맞은 손이 내 등을 또 한 번 토닥여 주었다.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 앙증맞은 손의 주인을 보았다.
초향이 나를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나와 초향, 우석혜 그리고 계효보까지.
우리는 곧 하남 허창의 갑돌산을 향해 출발할 것이다.
‘사부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녀와 함께 갑니다. 그녀가 바로 당대의 천하제일인, 무적 할매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