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녀를!"
"……?"
"사랑합니다!"
할매의 구타가 멈추었다.
막 나를 지르밟으려던 발이 허공에 멈추었고, 할매의 눈동자와 함께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지금…… 지금 만약 조금의 거짓이라도……."
"사랑합니다! 만약 그녀를 사랑한 게 죄라면, 그녀와의 사랑을 허락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흑흑."
기막힌 순간에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사실 아파서 운 거고, 짜증과 쪽팔림, 억울함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겹쳐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통했다.
할매가 허공에 있던 발을 스윽 하고 도로 가져갔다.
살았다.
진짜로 그녀를 사랑했냐고?
날 이 꼴로 만든 그녀가 정말 밉고 싫었다.
그런데 왜?
당연하지 않은가.
그냥 살려고 그랬다.
진짜 죽을 것 같아서.
* * *
난 정신없이 읽던 광마일기를 슬쩍 덮었다.
이 부분은 다시 읽어도 너무 섬뜩하고, 쪽팔리고 좀 그렇다.
나머지 부분은 항주로 가는 길에 마저 읽어야겠다.
계효보 녀석도 밖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고.
우선 떠나야 한다.
거리가 좀 멀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난 곧바로 광천동을 나와 큰 바위로 향했다.
처음 보는 녀석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녀석이 계효보 맞다.
닭상이다.
나의 충성스런 수하.
현재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놈.
"효보!"
"충!"
"떠난다."
"네? 갑자기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절강 항주로 간다."
좀 당황스러웠는지 움찔하며 놀라는 모습의 계효보.
난 녀석을 뒤로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 산을 내려갔다.
정신을 차린 녀석도 곧바로 내 뒤를 따랐다.
지금 만나러 간다.
그녀를.
아! 내 부인은 나보다 열세 살이 어리다.
내가 열여덟 살이니 그녀는 현재 다섯 살 어린아이겠군.
* * *
<<광마일기>>
삼백 년 전 무림은 천뢰무신(天雷武神) 곽청이란 사람의 시대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여러 명의 사부가 있었고, 부인 또한 색목인까지 포함하여 총 여섯 명이나 됐다고 한다.
부러운 놈.
여러 명의 사부 중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보타암에서 파문당한 풍화사태라는 여인이었다.
이걸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파문당한 이유가 가슴이 너무 크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도대체 사람 가슴이 얼마나 크면 파문까지 당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의 제자가 바로 초진아 여협으로, 훗날 곽청 대협의 여섯 부인 중 한 명이 되었고 동시에 미려의선(美麗醫仙)이라 불린 의선이기도 했다.
위화궁(衛花宮, 꽃을 지킨다)은 그녀들이 만든 비밀 세력이며 신비 문파다.
보타암에서 파문을 당한 후 항주에 자리를 잡은 두 여인은 항주 기녀들의 비참한 삶을 가련히 여겨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천뢰무신 곽청이 섬서에 천하제일문인 천뢰문을 개파하면서 함께 섬서로 떠나게 된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없는 곳에서 또 예전과 같이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기녀들을 걱정해 위화궁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도 언뜻 그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현경의 반열에 올랐다는 풍화사태와 화경의 끝자락이었다는 초진아 여협의 신공절학이 거의 다 위화궁에 전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그저 소문일 뿐.
실제 위화궁의 여고수들을 본 사람도 없고, 그녀들이 활동하는 실체도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현재에 이르러 천하 어디에서도 항주만큼 기녀들이 살기 좋은 곳이 없고, 엄청난 부를 쌓는 곳 또한 없다고 하였다.
당대의 항주가 기녀들의 천국이라 불리며, 중원 전역의 기녀들이 몰리는 이유다.
* * *
"닭고기 안 먹어?"
"넵."
"진짜? 맛있는데?"
"전 별로입니다."
"알았어. 하하. 진짜 맛있는데."
"전 기러기 고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개나 돼지고기 그리고 고양이 고기와 개구리 고기도 좋아합니다."
"읔. 고, 고양이 고기도 먹어?"
"넵. 씹을수록 그 맛이……."
뭐지?
이 녀석 갑자기 섬뜩하다.
기러기, 개, 돼지, 고양이, 개구리에게 무슨 한이라도 맺힌 것 같다.
"뭐, 먹는 건 개인 취향이니 내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 얼른 먹자. 갈 길이 멀다."
"주군, 그런데 항주에 누굴 만나러 가는지 아직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음, 그게……."
난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빠르게 놀리던 젓가락까지 식탁에 내려놓고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계효보를 향해 말했다.
"일평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나에게 패배를 안긴 천외천(天外天)의 고수."
"네? 주군께서 이미 무림에서 활동을 하셨습니까?"
"뭐, 설명하자면 길어. 그러니 우선 그렇게 알고 있어."
"아, 넵."
"그리고 효보야."
"충."
"훗날 네가 내 권좌의 좌편에 앉으려면……."
"……?"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물론, 숨소리 하나 놓치지 말고 머리에 각인시켜. 그것이 먼 훗날 네게 크나큰 도움이 될 테니까."
"도, 도대체…… 그분이 누구시기에……?"
"난 그녀를, 무적 할매라 부른다."
* * *
<<광마일기>>
난 그녀와 혼례를 올렸어.
사랑하지도 않았고, 원치도 않았던 혼례였어.
하지만 방법이 없었지.
혼례를 올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할매는 내가 항주에 도착했을 때부터 날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고 하더군.
아!
다시 생각해도 무섭네.
더 정확히 표현을 하면, 내가 항주에 도착한 후부터 계속해서 날 지켜보며 죽일지 말지를 고민하고 갈등했다는 거야.
미친!
천하제일인 마악치 나를 죽일지 말지 고민했다는 게 말이 돼?
응.
무적 할매라면 가능했겠지.
그런데 왜 나를 죽이지 않았냐 하면.
내 두 가지 신조 있잖아.
일, 어린이와 여자는 때리지 않는다.
이, 싫다고 하는 여자에게 강제로 몹쓸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게 날 살렸어.
위화궁의 십이 대 궁주인 우석혜.
그 할망구 이름이야.
그리고 위화궁에는 어느 문파나 그렇듯 궁률, 율법이란 게 있어.
특히 위화궁의 율법 중 가장 중시되는 것이 바로, 위화궁의 시조인 풍화사태와 초진아 여협이 위화궁 시초에 만든 율법인데.
일, 기녀들을 암중에서 보호한다.
이,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내가 말이야, 항주에 와서 보름 동안 기루를 스물세 곳이나 박살 냈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와중에도 기녀들은 절대 때리거나 핍박하지 않았어.
오히려 내가 그녀들에게 뿌린 돈만 금자와 은자 수천 냥이 넘어.
난 그냥 요란하게 기루만 부수고, 술병 깨뜨리고, 소리 지르고 그랬거든.
그래서 그 할매도 애매했던 거지.
암중에서 날 지켜보며, 내가 기녀들한테 손찌검하기만을 계속 기다렸다는 거야.
와! 다시 생각해도 식겁하다.
그때 실수로라도 기녀를 밀쳐 넘어뜨리기라도 했다면, 그냥 죽었다는 소리 아니겠어?
참나.
어쨌거나 난 내 신조를 잘 지켰고, 실수도 하지 않았어.
무림에 속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아예 무림의 주인인 나를,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그녀로서는 죽일 수 없었던 거지.
기녀를 때리거나 핍박하지도 않았으니, 더더욱 그럴 명분이 없었고.
덕분에 내가 산 거야.
그리고 그런 속사정까지 나중에 안 후에는, 정말 우석혜 이 할망탱구가 저승사자처럼 보이더라.
다행히 아무도 그 할매의 존재도, 또 내가 거의 열흘 동안 할매에게 두들겨 맞은 사실도 몰랐어.
칠 주야의 싸움은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이뤄졌고, 복날 개 맞듯 두들겨 맞은 곳 역시나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절강 주산열도의 수많은 무인도 중 하나였으니까.
수하들에게 쪽팔림을 면할 수 있었고, 무림에서의 체면도 그대로 지킬 수 있었지.
다만,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마음고생 좀 했어.
물론 가장 큰 두려움은 역시나 그 할망탱구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날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지.
그리고 그 가장 확실한 명분은, 내가 뱉은 말을 지키지 않았을 때 벌어진다는 거야.
그래서 혼인식을 치렀어.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데 말이야.
아니, 그냥 그녀를 볼 때마다 비참한 내 상황이 모두 그녀 때문인 것 같아 짜증 나고 화나고 그랬지.
첫날밤?
당연히 치르지 않았지.
혼례식만 올리고, 난 그녀를 신혼 방에 덩그러니 놔두고 수하들과 밤새도록 술을 퍼마셨어.
그 후로 이 년 동안 계속.
내 수하들이 날 배신하고, 정도 무림의 개잡종들이 사패천의 담벼락을 넘는 날까지 난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없는 사람 취급했고, 그녀가 나에게 말이라도 걸어오면 냉기를 풀풀 풍기며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만 쏟아 냈지.
아!
인간 쓰레기 마악치.
그녀는 일 년 중 절반을 무적 할매가 있는 항주에 가 있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위화궁의 존재도 몰랐고, 할매가 위화궁의 십이 대 궁주인 것도 몰랐어.
부인과 이 년 동안 나눈 대화 자체가 거의 몇 마디가 전부였으니 말이야.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보는 것만으로 짜증이 났어.
그래서 그녀가 항주로 간다고 하면 오히려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
눈엣가시 같은 그녀가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좋았겠어?
아예 항주로 가서 돌아오지 않길 속으로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몰라.
한편으로는 그녀가 항주로 가서 할매에게 나에 대해 고자질을 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고.
내가 그렇게 항상 쌀쌀맞게 대하는데도, 그녀는 항주에서 돌아올 때면 손에 선물을 가득 사 들고 와서는 해맑게 웃었지.
씨팔.
또 눈물나네.
사실, 그래서 거의 이 년이 다 되어 갔을 때, 나도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됐다.
이건 그냥 변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날이 왔어.
배신과 기습.
광천마제 마악치, 내가 몰락하는 날.
그녀는 그때도 없었어.
마침 항주로 갔을 때였거든.
믿었던 수하들이 내 등에 칼을 꽂았고, 사패천의 담벼락을 넘어 셀 수도 없는 적들이 몰려들었지.
나 하나 죽이겠다고.
의제 곽우적, 녀석이 목숨을 걸고 적들을 막았어.
덕분에 큰 중상을 입고도 난 도망을 칠 수 있었지.
하지만 온 무림이 작정하고 나 하나 죽이겠다며 천하를 들쑤시고, 틈만 나면 천라지망이니 뭐니 겹겹으로 포위를 했는데 살아남을 수 있었겠어?
그것도 일 년이나?
간신히 한 달까진 어떻게 해서든 도망을 칠 수 있었어.
그래도 내가 천하제일인인데, 한 달까진 버틸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게 나에게도 한계였어.
천라지망은 다시 펼쳐졌고, 화산검후 그 미친년을 선두로 셀 수도 없는 정사(正邪)의 고수들이 나에게 칼을 들이댔지.
그땐 진짜 꼼짝없이 죽는구나 하고 자포자기했어.
그리고 그때, 그녀가 나타난 거야.
내 부인, 초향.
그리고 위화궁의 여고수 이백여 명.
일 갑자에도 미치지 못했던 그녀의 내공이 한 달 만에 오 갑자가 훌쩍 넘어 있었어.
그 무지막지한 내공과 무림에서 나 외에는 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무적 할매의 사기급 신검까지.
화경의 고수였던 화산검후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싸웠어.
나를 지키겠다고.
나를 살리겠다고.
온몸이 수도 없이 칼에 베여 피를 뿌렸고.
그 고왔던 얼굴에도 끔찍한 상처가 셀 수도 없이 생겼는데도 아내는 물러서지 않았어.
그렇게 목숨을 걸고 화산검후와 싸웠어.
위화궁의 여고수들 역시 일당백의 고수라는 말이 무엇인지 증명하겠다는 듯, 그렇게 용맹하게 싸웠지.
그녀들 덕분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고, 위화궁은 그때 일백 명이 넘는 고수를 잃어야 했지.
내 아내도, 왼팔이 잘리고 얼굴과 온몸은 끔찍이 난도질당했어.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어.
뛰고 또 뛰고, 오장육부가 뒤틀어지고, 단전이 갈라지고, 기도가 막혀 숨도 쉴 수 없었지만 계속 달렸어.
나를 추격하는 놈들 때문이 아니었어.
아내를 볼 자신이 없었어.
하지만 아내는 그 후에도 계속 나타났어.
내가 위급할 때마다 나타나 나를 구해 준 거야.
무려 일 년 동안 화산검후, 천수신권, 창궁검제를 상대하면서 말이야.
난 내 아내가 팔이 잘리고, 칼에 난도질당하고, 흙바닥에 개처럼 굴러서 살 수 있었어.
위화궁의 여고수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 갔기에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야.
나는, 그렇게 목숨을 부지했어.
내가 배신당하던 날, 그날이 바로 부인이 위화궁의 십삼 대 궁주로 즉위하던 날이었데.
위화궁의 율법에 따라 무적 할매가 자신의 내공 구 할을 내 부인에게 전수해 주었다고 하더군.
위화궁에도 내 소식이 전해졌지만, 우석혜 할매와 위화궁 고수들은 내 아내가 할매의 내공을 고스란히 소화할 수 있게 그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나 봐.
그리고 한 달간의 폐관이 끝난 후에야 내 사실을 보고했데.
그녀는 내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나를 살리기 위해 싸웠던 거야.
무려 화경의 고수들을 상대로 일 년 동안이나.
결국 일 년 정도 되었을 때, 그녀는 나보다 더 심한 상처들을 입은 상태가 되었어.
이백여 명에 달하던 위화궁의 여고수들도 더 이상 남지 않았고.
홀로 남은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날 살리겠다며 추격대 수십 명과 싸웠어.
끝내 수십 명에 달하는 적들을 죽였지만, 그녀 역시 쓰러지고 말았지.
난, 쓰러진 그녀를 안고 펑펑 울었어.
그 곱던 얼굴은 이미 셀 수도 없는 칼자국들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끔찍했지.
핏기는 하나도 없고, 입으로는 검은 피를 연신 쿨럭쿨럭 토해 냈어.
난 정말 미친 듯 울고 또 울었어.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내 품에 안겨 축 늘어져 있기만 하던 그녀가 손을 들어서 내 볼을 어루만져 주더라.
입에서는 계속 피가 쏟아져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지금 그녀가 느낄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 뻔한데.
그녀가 그렇게 내 볼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짓더라.
‘당신 품에 안길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그녀는 따스한 손길과 함께 마지막 그 눈빛을 남기고 죽었어.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안고 있는데, 너무 슬펐어.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참 바보 같은 여인이었어.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런 바보.
그리고 난, 쓰레기였고.
천하제일인?
광천마제?
퉤!
마악치! 지금 내가,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네가.
현경의 반열에 올랐는지 어떤지, 상황이 나아졌는지 더 위급해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 있다면 꼭 기억해.
넌 그냥 최악의 쓰레기일 뿐이야.
그리고, 네가 최소한 사람의 배 속에서 나온 인간이라면.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그녀와 그녀의 사문에 그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마.
그녀는 이미 이 땅에 없지만, 혹시라도 어딘가에 있을 그녀의 위화궁 여고수들과 무적 할매에게 그 어떤 도움도 바라서는 안 돼.
절대로.
다시는.
그건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