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11화 (11/245)

11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음, 마지막 기록이 없는 걸 보니 이번에도 사부를 구하는 데에는 실패했나 보군.’

풍산검사 반경호면 충분했을 텐데, 왜 실패했지?

구산사괴의 전력으로는 절대 반경호에게 칼빵 하나 새길 수 없었을 텐데?

항상 마지막을 알 수 없으니 회귀하여 깨어나면 이렇게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어떻게 끝이 난 것인지 알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광마일기 옆에 놓인 각혼필(刻魂筆)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는 각혼필이다.

나는 동굴을 나서기 전, 각혼필을 세심히 살피고 또 살폈다.

* * *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풍산검사 반경호에 대한 정보가 과장, 왜곡됐다는 것밖에.

사실 좀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는 정확히 밝혀진 사문도 없는 거의 떠돌이 무사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이 꼴로 만든 소림사의 천수신권, 그 땡중이 정말 밉고 싫지만, 어쩔 수 없다.

딱 한 번만 눈을 감고 소림사에 부탁을 해야겠다.

아니지.

부탁이 아니라 그냥 이용하는 거지.

그래서 삼절의협(三絶義俠) 변북성이란 고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소림사 본산의 스님은 당연히 아니고, 속가제자 출신이다.

광천마제 시절의 나에게는 발에 밟히고 차이는 게 초절정이고 절정 고수였는데, 어렵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자들을 볼 수 없고, 만나 주지도 않으며, 섭외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나마 등신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호구인지, 변북성이란 놈이 선뜻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데리고 왔다.

구산사괴 중 여발무, 위은치, 한인심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죽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황노의 벽을 넘지 못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였다.

결국 변북성은 죽었고, 사부님도 또 죽고, 나도 또 죽었다.

각혼필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나의 다섯 번째 죽음이었다.

* * *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음, 또 실패군.’

이번엔 독이다.

진즉 독을 쓸 걸 그랬다.

계효보의 돈을 모두 쏟아 산공독을 샀다.

마당 곳곳에 겹겹으로 뿌렸다.

밟기만 해도 내공이 흐트러진다는 나름 고가의 산공독이다.

깨끗한 실패다.

마당에 산공독을 뿌리는 걸 놈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지켜보고 있지 않았어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독이란 모름지기 독 자체의 효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하독(下毒)이다.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알아채지 못하게 몰래 타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대사를 치르기 위해 경계심을 잔뜩 끌어 올린 세 명의 일류 무인과 한 명의 고수 급 무인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것이 정말 무색, 무취, 무미의 무형지독이 아닌 이상 말이다.

그렇게 실패했다.

계효보는 내 입에 산공독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고, 다시 발로 미친 듯 두들겨 팬 후에야 죽였다.

제발 칼을 쓰라고.

아파.

아! 이것도 광마일기에 기록을 못 하겠군.

이것이 나의 여섯 번째 죽음이었다.

그나저나 각혼필은 도대체 뭐야?

그냥 붓이잖아!

* * *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한 달 내내 사부님을 힘들게 설득했다.

명목은 유람이지만, 실제는 구산사괴를 피해 도망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사부님은, 갑돌산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구산사괴를 다시 만나야 했다.

실패다.

죽기 전, 나의 모든 삶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눈물이 쏟아졌다.

사부님이 나 때문에 계속 죽음을 반복하는 것에 더없이 죄송하고 마음이 아팠다.

더불어 계효보에 대한 증오는 내 영혼에 사무칠 정도로 커져만 갔다.

이것이 나의 일곱 번째 죽음이었다.

* * *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혼란스럽다.

생각이 깊어졌다.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무겁다.

사부를 생각하니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내렸다.

광천동 안에서 난 오랜 시간 앉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의 충성스런 수하 계효보는 지난번과 지지난번에도 그랬듯, 그 커다란 바위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됐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계효보 녀석이 큰 바위 바로 근처에 있는 이 광천동을 찾지도, 심지어 보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아마 내가 이 광천동을 팔 때 설치한 진법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또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회귀를 했으면 진법 또한 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이 동굴 자체가 없어야 하는데.

내가 미래에 판 동굴이니까.

아!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군.

그리고 진짜 각혼필은 도대체 뭘까?

일반의 붓보다 절반의 크기.

휴대용 붓으로 이런 크기의 붓들은 많다.

특별할 것이 없다.

붓의 윗부분을 누르면 먹물이 저절로 흘러나와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

드물긴 하지만 비싼 휴대용 붓에 이런 장치가 된 경우도 분명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걸 모르겠다.

붓을 강하게 눌러봤더니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부드럽게 글씨를 쓸 때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는데, 아주 강하게, 그러니까 붓의 호(毫, 붓의 털 부분)가 완전히 짓눌릴 때까지 꾹 눌러 글씨를 쓰려고 했더니 뭔가 뾰족한 게 걸려 있다는 걸 발견했다.

털을 제치고 자세히 살폈더니 바늘이 털 중앙에 심어져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디에 쓰라는 거지?

암기로 쓰라는 건가?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데.

내가 무공에 있어서는 천재지만, 맞다.

다른 부분의 머리는 살짝 덜 굴러가는 편이다.

몇 시진을 앉아 고민했지만, 그 용도를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하여 각혼필을 옆에 두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아주 오랜 시간 길게 하였다.

차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광마일기의 한 부분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절대, 결코,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는 그 부분.

내가 진짜 천하제일의 악인이며 쓰레기임을 재차 각인시켜 준 광마일기의 그 부분.

그걸, 다시 펼쳐 보려 한다.

사부님을 살리기 위해, 나는 다시 한번 천하제일의 쓰레기가 되어야 한다.

* * *

<<광마일기>>

(상략)

……

절대, 결코,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다시는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에게 도움을 받는 일,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

나도 최소한 인간이라면, 다시는 그러해서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이 부끄럽고 숨기고 싶으며 잊고 싶은 사실을 광마일기에까지 기록하는 건, 절대로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된다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하지 마라.

혹시라도 현경의 반열에 오른 후까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일이 생겨도, 이 기록을 보며 그녀의 위화궁(衛花宮)과 그 어떤 인연도 맺지 말아라.

절대로 하지 마라.

내 나이 서른다섯.

사패천을 개파했다.

그것도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의 바로 앞마당에 사패천을 떡하니 개파했다.

이미 나는 천하제일인이었고, 천하의 주인은 나였다.

개파식 당일 무림 모든 문파의 수장이 개파식을 찾아와 축하와 아부를 이어 나갔다.

소림사라고 다를 수 없었다.

죽기 싫으면, 멸문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들 역시 내 앞에서 기어야 했다.

예외란 없다.

역시나, 소림사의 방장이 여러 고승과 함께 개파식을 찾아왔다.

소림사의 대환단까지 들고 와 우리의 개파를 축하해 주었다.

난 수천의 무림 명숙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림의 방장에게 술과 고기를 권했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가 권한 술과 고기를 모두 먹고 마셔야 했다.

이로써 마지막 증명까지 끝난 것이다.

천주천하(天主天下), 천하의 주인이 바로 사패천의 천주 광천마제 마악치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더더욱 천상천하 유아독존, 안하무인, 그냥 거칠 것이 없었다.

세상이 내 세상인데 무엇이 두려울 게 있냔 말이다.

개파 후 몇 달이 지나 나는 수하 수백 명을 대동하여 항주로 유람을 떠났다.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 했다.

항주하면 기루, 기루하면 기녀, 천하의 미녀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드는 곳이 또 항주 아니겠는가?

매일 기녀를 양쪽에 끼고 술을 퍼마셨다.

기분이 조금만 틀어져도 기루를 통으로 부수어 버렸다.

보름 동안 내가 부순 기루만 스물두 곳이 된다.

그렇게 보름째 되던 날, 기어코 스물세 번째 기루를 부수고 행패란 행패는 다 부린 후였다.

재미도 없고 허망하기도 하고, 그렇게 홀로 빠져나와 항주의 바닷가를 걸었다.

그러다 그녀를 발견했다.

보름 내내 짙은 화장의 기녀들만 보다가 수수한 외모의 그녀를 봤기 때문이었을까?

난 그녀의 아름다움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쫓아갔다.

끈덕지게 추근거렸다.

광천마제임을 숨겼다.

그냥 재미로 숨기고 그녀에게 추근댄 것이다.

진지한 마음은 없었다.

그냥 그게 재밌어서 그랬다.

난 나쁜 놈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연이은 나의 추근거림에도 계속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오기가 생겼다.

아주 늦은 밤까지, 초라한 그녀의 집 앞에까지 따라가며 추근댔다.

마지막 거절.

오기가 짜증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천주천하에서 내가 얻지 못할 것은 없다.

그래서 뭐?

응, 그게 있었다.

개파식 때 사천 당가의 가주가 손바닥이 발바닥이 될 때까지 비비고 아부를 떨며 슬며시 건넨 약.

사랑의 묘약(妙藥)이라 했다.

사랑을 이루어 준다며 그리 말했다.

그래서 난 그것을 그녀에게 뿌렸다.

화경의 끝자락에 있던 내가 고작 절정 급이었던 그녀가 감지하지 못하게 묘약을 뿌리는 일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절대 하독(下毒)이 아니다.

그냥 몰래 뿌린 거다.

아무튼 그녀는 묘약의 기운에 강렬히 저항하다가 결국 혼절을 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사천 당가주 새끼.

미혼산(迷魂散)을 사랑의 묘약이라고 속여 나에게 준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당가주 놈의 입에다가 똥을 한 말이나 퍼 넣어 줄 것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나중에 진짜 그렇게 했다.

사천 당가 앞마당에서, 당가의 식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가주의 입에 정확히 인분(人糞, 사람 똥) 한 말을 퍼부었다.

뭐,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나는 혼절한 그녀를 안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상에 그녀를 눕혔다.

내가 천하제일악인이라고 해도, 나름의 신조가 있다.

일, 어린이와 여자는 때리지 않는다.

이, 싫다고 하는 여자에게 강제로 몹쓸 짓은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꼭 지켰다.

잠든 그녀를 잠시 쳐다보았다.

예쁘긴 예쁘더라.

내가 끈덕지게 추근댈 때도 욕 한마디 안 하고, 짜증 한 번 부리지 않았던 그녀다.

내가 무공을 숨기고 있었으니, 그녀는 무력으로 날 제압하려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하지도 않았다.

참, 착한 여인이다.

난 그렇게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기루에서 마셨던 술기운이 올라와 그냥 대충 그녀 옆에 누워서 잤다.

순수하게 잠만 잔 것이다.

손도 잡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을 때, 사달은 이미 나 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곤히 자던 여인은 침대에 걸터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한 사람, 정확히는 노파가 한 명 들어와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또 그렇게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음에도 나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하제일인인 내가 아무리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고 해도, 그 기감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니 말이다.

노파, 그러니까 그 할매는 무서운 눈으로 나와 여인을 몇 번 번갈아 보더니, 결국 분노하여 자신의 기도를 개방했다.

아! 지금 다시 생각해도 무시무시하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광마일기를 다른 이가 볼 일이 없기에 솔직히 적자.

나 그때, 조금 지렸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 할매와의 싸움.

절강의 바다 위에서 무려 칠 주야 동안 그 할매랑 싸웠다.

할매가 얼마나 강하고 무시무시했는지, 나는 칠 주야 동안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도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가 사람인지 용인지 헷갈렸을 정도였다.

몇 번이고, 그녀와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냥 그 할망구는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천하제일인 아니겠는가?

천마신교의 교주마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기껏 이런 할망탱구한테 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일곱 번의 낮과 일곱 번의 밤이 지난 후, 나는 개처럼 두들겨 맞은 상태로 그 할망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도 삼 일을 더 두들겨 맞았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였다.

진짜 쉬지도 않고 맞았다.

기절도 못 하고, 죽지도 못했다.

그냥 또렷한 정신으로 맞고 또 맞고, 계속 맞고, 옆으로 맞고, 위로 맞고, 앞으로 맞고, 아래로 맞고, 주먹으로 맞고, 발로 맞고, 그냥 맞았다.

진짜 나중엔 너무 아파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는데, 그 말 한마디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때리더라.

결국 그렇게 삼 일 동안 두들겨 맞은 후, 마지막 힘을 쥐어짜고 또 쥐어짜 외쳤다.

"그녀를!"

"……?"

"사랑합니다!"

지옥의 구타가 멈추는 순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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