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계요일기>>
난 계효보다.
요괴들이 사는 세상, 요계(妖界)에서 왔다.
요괴들은 그 종족마다 부릴 수 있는 요술이 따로 있다.
우리 계족(鷄族)은 시간 관련 요술을 부릴 수 있다.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시간을 부릴 수 있는 요술이라니!
물론, 인간들은 그리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요계에서 시간 관련 요술은 금기다.
만약 그래도 그 요술을 사용하게 된다면?
개나 소나 말이나 돼지나, 다른 요괴들이 금방 눈치를 챈다.
그럼 어떻게 되나?
극형에 처해진다.
당연히 나도, 또 우리 계족도 종족의 요술을 쓸 수 없다.
그렇다.
우리 계족은 요술을 쓸 수 없는 요괴고, 덕분에 요계의 신분 중에서 최하급의 천민이 되었다.
빌어먹을 기러기 녀석의 장난질에 내가 인간계로 왔지만, 지금껏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것을 보면, 요계에서는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 계족의 삶이 원래 그렇다.
인간들이 키우는 닭장 안의 닭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게 우리 계족이다.
최소한, 닭장 안의 닭 한 마리가 사라지면 인간들은 찾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 요계에서 난, 그보다 못한 존재다.
반란? 혁명? 복수?
흥!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우리의 시간, 회귀 요술은 쉽게 들키고 쉽게 파훼된다.
닭들이 떼거지로 뭉쳐도 호랑이 한 마리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감히 반란이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최소한, 내가 인간계에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것을 보았다.
나를 죽기 직전까지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던 그 가공할 괴물들.
그 엄청난 이들을, 이곳에서는 고작 이류 무사라 부른다고 했다.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고도 흔한 존재들.
난 그날, 인간계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그건 바로 무림이란 세계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무인이라 한다.
그리고 그 최정점에 서 있는 한 명의 사내.
광천마제 마악치다.
난!
나는!
그 사나이로 인해 역대의 그 어떤 계요(鷄妖, 닭 요괴)도 꿈꾸지 못했던 꿈을 꿀 수 있었다.
아니, 그 어떤 요괴나 인간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원대한 꿈을 이룰 것이다.
이곳, 인간계라면 가능하다.
시간의 요술.
내가 부릴 수 있는 요술은 ‘억겁의 굴레’다.
이곳에서는 통한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파훼하지 못한다.
그리고 꿈을 이루리라.
천하제일인 마악치.
그의 힘을 흡수해, 인간계와 요계를 동시에 정벌할 것이다.
* * *
"주군, 제가 어떻게 해서든 봉인된 비급을 찾아 주군께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으시고, 주군의 사부님을 음해하려는 악적(惡敵)을 물리치십시오."
"효보야."
"네, 주군."
"그만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만."
"네, 넵. 존명."
"왠지 기분이 별로구나."
진짜 기분이 별로다.
회귀할 때마다 이렇게 기분이 더러웠나?
그런 내용은 광마일기에 적혀 있지 않은데.
모르겠다.
그나저나 또 실패했나 보다.
광마일기 마지막 부분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무공을 되찾을 수도 없고, 낭인으로도 사부를 구할 수 없다.
다시 보고 또 생각을 해 봐도 구산사괴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한 전력이었는데, 어쩌다가 당한 거지?
광마일기에 적혀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는 노릇.
그렇다면, 더 강한 전력을 꾸미면 된다.
살짝 꺼려져서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른 방법이 없다.
"효보야."
"충."
"있는 돈 다 꺼내 봐라."
"존명."
전낭을 통으로 내게 건넸다.
난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지난번과 똑같다.
회귀를 하면 돈도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모양이다.
난 시선을 전낭에서 떼어 효보에게로 향했다.
내 시선이 닿자 녀석이 움찔한다.
"아깝냐?"
"아, 아닙니다. 감히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부족하시면 제가 만리상단의 금고라도 털어 오겠습니다."
"풉."
재밌는 녀석.
고작 일류 무사 주제에 천하의 만리상단을 어떻게 턴다고.
허풍마저 마음에 들게 치는 놈이다.
난 효보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며 그를 직시했다.
그리고 녀석에게 나직하지만 강한 어조로 한 가지를 약속하였다.
"내가 천하를 되찾는 날, 내 권좌의 우편에는 의제가, 그리고 좌편에는 네가 앉을 것이다."
효보 이 녀석.
엄청 감동했나 보다.
몸까지 부르르 떠는 것을 보니 말이다.
큭큭큭.
"가자."
"존명!"
구산사괴 따위가 감히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 진짜 고수를 섭외하러 간다.
* * *
우리 사패천이 개파를 하자마자 정도 무림에서 가장 먼저 투신한 것은 산서의 풍산검사(風散劍士) 반경호란 놈이다.
무공이 고작 절정 급으로 쓰레기 수준이지만, 그래도 난 첫 번째라는 것에 큰 의의를 두어 녀석에게 중책을 맡겼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사패천의 성문에는 입문을 하려는 정도 무림 개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광마일기 中
광마일기에 그에 관한 내용은 고작 몇 줄이 전부다.
하지만 핵심은 그가 절정의 고수라는 것과 우리 하남과 가까운 산서에 산다는 것이다.
우선 개방에 먼저 들러야 했다.
가장 싸게 정보를 살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내가 광천마제 마악치였다면 얘기가 조금 다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광천마제 마악치가 아니라, 현화문이란 산골 벽촌에서 도를 닦는 어린 도사일 뿐이다.
풍산검사 반경호의 위치와 그의 인물 됨됨이, 그리고 그의 현재 무공 수위까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정보를 사는데 철전 스무 닢이라니, 역시 개방은 개방이다.
나와 계효보는 말을 몰아 곧바로 산서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풍산검사 반경호를 섭외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 * *
"주군, 믿어도 될까요?"
"응? 무슨 소리야?"
"풍산검사 반경호 말이에요."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은밀한 목소리로 말하는 계효보.
난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한 후 시선을 뒤로 돌렸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사부와 허허, 하하하며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 그냥 딱 봐도 정파 사람이었다.
"효보야, 넌 사람 보는 눈 좀 키워야겠다.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위에서 보나 아래에서 보나. 그냥 딱 쓰고 버리기 좋은 정파의 호구 아니더냐. 그것도 절정 급 호구."
"그래도 전 왠지 불안한 예감이……."
"쯧쯧. 나를 믿어라. 이제 곧 사부님을 해하려는 악인들이 올 것이다. 그때 저 호구 녀석이 열과 성을 다해 물리쳐 주면, 우린 약속한 돈이나 주면 될…… 어, 왔군. 넌 사부님을 초가 안으로 모시거라."
"존, 존명."
반경호는 이미 놈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다.
나와 눈까지 마주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였다.
바둑을 두던 사부도 불길한 기감을 감지한 모양이다.
계효보의 말에 두말없이 모옥으로 향했다.
곧바로 구산사괴가 우리 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셋이 전면에 나섰고, 한 놈.
가장 강한 황노는 숨어 있다.
등신 같은 놈.
그따위 기습으로 진짜 절정 고수를 상대할 수 있을 줄 아느냐?
쉬이이이이익.
파파파팟!
퍼퍼퍼퍼퍼펑!
일시에 구산사괴 세 놈이 반경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곧바로 반경호와 세 사람 사이에서 검기의 충돌에 의한 폭발이 일어났다.
"으아아악!"
"으악!"
반경호와 부딪쳤던 셋은 거의 두서 장 밖으로까지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한 놈은 즉사였고, 둘도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확실히 절정 고수는 다르군.
그런데 그때.
역시나 은형술을 극대로 펼치고 있던 황노가 갑자기 튀어나와 반경호를 기습했다.
샤아아아아악.
스윽.
툭.
툭.
단 한 방.
반경호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 검에 황노의 목이 머리에서 분리되어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아! 진즉 저놈을 섭외할걸, 지금까지 괜히 개고생했네.
아주 통쾌, 상쾌, 유쾌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반경호는 거침이 없었다.
이미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나 숨이 붙어 있는 나머지 두 놈에게 다가갔다.
‘그래, 깨끗하게 끝내라. 그래야 돈을 받지. 가라, 풍산검사! 하하하!’
그런데 뭐지?
단칼에 끝을 볼 줄 알았는데, 반경호는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문이라도 하려는 듯, 두 놈을 죽이지 않고 머리끄덩이까지 잡아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무엇이더냐? 이 깊은 산중에까지 무엇을 훔치려고 온 것이냐! 대답해라!"
"으아아아악!"
점혈 수법인 것 같다.
그것으로 구산사괴 두 놈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하며 고문하는 것이다.
뭐지?
이 싸한 느낌은?
안 되겠다.
뭔가 틀어졌다.
나는 급히 반경호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아니, 막 움직이려 할 때.
쉬이이익.
툭.
툭.
남은 구산사괴 두 명의 목이 깨끗이 잘려 죽어 버렸다.
난 막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던 자세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경호의 기운이, 기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한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는 반경호.
난 얼음이 된 상태에서도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곧바로 전낭을 통으로 꺼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쉬이익.
툭.
내민 나의 손이 깨끗이 잘렸고, 곧바로 전낭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늦게 밀려오는 극심한 고통.
"으아아아아악!"
동시에 모옥에 있던 사부가 뛰쳐나왔다.
"악치야!"
하지만 사부는 몇 걸음 걸을 수 없었다.
쉬이이익.
샤아악.
쿠당탕.
양쪽 무릎이 정확히 잘려 바닥을 구르고 만 것이다.
"사부님! 사부님!"
"악치야."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엔 반경호의 고문이었다.
구산사괴보다 더 지독했다.
난 곧바로 모옥 방 안에 있는 현화승천신공의 비급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사부는 이미 사지가 잘려 죽었고, 나 역시 한쪽 손목과 양쪽 다리를 잃어 죽어 가고 있다.
모옥에서 한 손에 든 책을 뚫어져라 읽으며 천천히 걸어 나오는 반경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의 충성스런 수하 계효보가 서둘러 몸을 피한 것 같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효보라도 살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음, 이게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현화검존(玄化劍尊)의 신공이라고? 그럴듯하긴 한데."
쉬이이익.
샤악.
놈은 그렇게 여전히 시선을 현화승천신공의 비급을 향한 상태로 검을 휘둘렀다.
내 목이었다.
목이 삼 분의 일쯤 잘렸다.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반경호는 그렇게 현화승천신공의 비급을 읽으며 천천히 걸어 이곳을 떠났다.
이것이 나의 네 번째 죽음이었다.
난 그렇게 또 죽…… 아!
퍽퍽퍽!
퍽퍽!
"무림 공적! 마두! 풍산검사가 아니라 풍산검마(風散劍魔)!"
퍽퍽퍽!
"무림맹에 쫓기다가 사패천이 개파를 하자 곧바로 우리한테 도망쳐 온 무림공적! 마두! 마두라고! 강간마! 살인마! 마두 풍산검마 반! 경! 호!"
퍽퍽퍽!
"사람 보는 눈을 키워? 너나 키워!"
퍽퍽퍽!
"단순, 무식, 광천마제, 이 등신 새꺄!"
퍽퍽퍽!
아!
혼란스럽다.
그리고 아프다.
계효보, 네가 왜?
유일하게 믿었던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리고 풍산검사가 마두라니?
아픔보다 더 혼란스럽다.
"권좌의 우편! 좌편! 빌어먹을 새끼!"
퍽퍽퍽!
"권좌는 내가 앉는 거고! 너는 봉인된 무공이나 익히라니까! 내가 가져다준다는데 왜! 말을! 안! 들! 어!"
퍽퍽퍽!
죽을 때가 됐나 보다.
내 모든 삶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래, 기억났다.
계효보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 말이 맞다.
풍산검사 반경호는 악명 높은 마두였고, 사패천이 개파하자마자 정파와 무림맹의 추격을 피해 투신한 놈이었다.
별호도 마두가 되기 전의 별호를 내가 기록한 것이고.
하! 그 중요한 걸 왜 광마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걸까?
뭐, 광천마제였던 내게는 기록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나저나 이번에도 광마일기에 이 일을 기록하지 못하는군.
다른 게 문제가 아니었어.
지옥 불에 백만 년 동안 빠뜨려 버릴 계효보, 놈에게 계속 속고 있는 내가 진짜 문제다.
어쩌지?
방법이 없다.
광마일기에 기록할 방법이.
정신이 계속 희미해진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무한회귀.
누군가 그토록 상상하고 꿈꾸는 무한회귀는.
기연이 아니다.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무한회귀는.
끝이 없는 무한의 저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