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걸 익히는 데에 반나절이나 걸렸다고?
광천동을 나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광마일기에 적힌 현화승천신공을 익히는 일이었다.
나는 천재다.
딱 한 식경 걸렸다.
광마일기에 적힌 반나절보다 몇 배나 줄어든 시간 만에 이를 완벽히 익힌 것이다.
사실 현화승천신공을 한 식경은 물론 반나절 만에 익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하다.
현화승천신공을 이렇게 쉽게 익힐 수는 없는데?
내가 방금 익히면서도 너무 빠른 습득에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
어떻게 현화승천신공을 이렇게 빨리 익힐 수 있는 것이지?
이 또한 회귀와 관련 있는 것일까?
이에 관해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겠다.
그보다 우선, 내 몸 상태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겠다.
나는 곧바로 운기를 시작했다.
이곳 병막산.
이 일대의 웅장한 자연의 기운이…… 뭐, 아마 그런 게 있긴 있겠지만 나는 못 느끼겠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아주 미세한 기운, 정말 이게 느껴지는 게 맞나 싶을 정도의 미세하고 작은 기운을 끌어와 하단전에 모아…… 실패다.
역시 안 되는군.
다시 몇 번을 시도했지만, 안 된다.
광마일기에 적힌 그대로다.
아! 오는군.
난 가부좌를 틀고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기감을 통해 감지한 건 아니다.
난 그런 거 못 한다.
현재 상태로는.
마른 낙엽 밟는 소리와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 알 수 있었다.
닭상의 사내가 나를 향해 허겁지겁 뛰어온다.
"주, 주군."
"기다려라."
"존명."
내 한 마디에 계효보는 왜인지 묻지도 않고 묵묵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
역시 생긴 것 빼고는 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난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우선 생각부터 정리를 해 봐야겠다.
첫째, 회귀가 맞는가?
이제는 구 할 이상 확신한다.
이건 회귀가 맞다.
그럼 회귀는 왜 하는가?
그건 모르겠다.
회귀는 나와 원래 추혼책인 광마일기 그리고 각혼필이 함께한다.
그것도 매번 광천동이다.
이것들은 내 회귀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지?
역시 전혀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계효보도 있다.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슬며시 눈을 살짝 떠 호법이라도 서는 양,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녀석을 보았다.
얘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냥 충직한 수하일 뿐이다.
제외하고.
다시 회귀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추혼책과 각혼필.
이건 나중에 귀정사(歸正寺)를 찾아가 물어봐야겠다.
내가 추혼책과 각혼필을 얻은 곳이 바로 귀정사.
그곳의 주지 스님한테였으니까.
일단, 회귀는 확실하고 그 외에는 단정 지을 수 있는 게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귀정사는 사부님을 구한 후 찾아간다.
둘째, 지금의 내 경지는 어떠한 상태인가?
현경인가?
아니면 화경인가?
그도 아니면 그냥 열여덟 살의 나로 돌아온 것인가?
최악의 가정으론, 모든 것을 잃은 상태의 열여덟 살 내 몸으로 회귀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마지막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예감이 그러하지 않다.
뭔가 있는데, 하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어떠한 경지 건 지금의 나는 삼류 무사에게도 맞아 죽을 수 있는 미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긴 했지만, 결론은 현재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회귀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마저도 일 할은 확신하지 못한다.
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지금이 언제이지? 정확한 날짜를 알고 싶다."
"계유년 경인월 병진일입니다."
역시.
회귀가 맞다.
마지막 일 할의 불확실마저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런데 이 녀석이 살짝 걸리기는 하네?
"효보, 너 혹시…… 회귀라고 들어 본 적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고개까지 갸우뚱하며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럼 그렇지.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엄청난 기연?
그런 건 나 같은 절대자에게나 있을 일일 것이다.
"주군."
어라?
갑자기 이 녀석이 눈에 힘까지 주며?
무언가 중차대한 말을 하려는 것 같다.
설마, 회귀에 대해 녀석도 뭔가 아는 것인가?
"옷부터 좀 입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
그렇지.
옷.
녀석, 이번에도 옷과 검까지 모두 챙겨 왔다.
엇!
그런데 이 녀석은 정말 내가 알몸 상태인 걸 어떻게 알고 옷과 검까지 준비한 것이지?
설마……?
"너."
"충!"
"어떻게 내가 알몸인 것을 알고 옷과 검을 준비한 것이지?"
"네? 주군, 기억 안 나십니까?"
이 녀석, 지금 나를 떠보는 건가?
"아! 어제 좀 많이 마시기는 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토하고 오줌을 갈기고…… 앗,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러다가 홀라당 벗으시고는 이곳 병막산으로 막 뛰어오르셨습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주군을 찾아 헤매느라 혼났습니다."
"술? 내가 술을 마셨어?"
"주, 주군. 괜찮으십니까?"
뭐지?
그건 기억에 없는데?
광마일기에도 적혀 있지 않고.
나의 충성스런 수하인 효보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또 뭐가 있군.
"옷부터 좀……."
젠장.
"아, 알았다."
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은 후 다시 효보와 마주했다.
"주군, 어제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내가? 내가 어제 뭐라고 했는데?"
"주군께 목숨을 걸겠다고 맹세한 제가 순간이나마 주군의 말씀을 의심한 점은 추후 벌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무공을 잃어버리고 한 달 뒤 주군의 사부님께서 괴한들에 의해 목숨을 잃을 거라 말씀하시며 슬피 우셨습니다. 그래서 과음까지 하신 것 같습니다."
아!
그런 거였어?
회귀의 시점은 오늘이 맞는 것 같은데.
회귀를 하면 그 과거의 일까지 바뀌나?
광마일기의 나는 이맘때 술은 물론 사부가 의심하던 고기도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모르겠다.
효보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일단 더 들어 보자.
"밤새 주군을 찾아 헤매며, 반성도 하고 그 해결 방법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 무슨 방법이 있어?"
"어리석은 제가 감히 이런 계책 같지도 않은 걸 말씀드려 주군의 귀를 더럽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는 하지만……."
"말해. 어서 말해 봐."
"존명. 주군의 사문인 현화문의 무공을 익혀 보심은 어떠십니까? 봉인된 무공."
"봉인된 무공?"
"현화승천신공 말고, 주군의 태사조님께서 익히셨던 천하제일신공들이 무더기로 봉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 그거 사문의 비밀인데, 내가 그것까지 말했나?"
"아, 네. 저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그런데 갑자기 나더러 그걸 익히라고? 왜?"
"단전과 내공이 사라졌다고 하시며 슬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무공만 되찾으면 주군의 사부님을 습격할 그 괴한들은 일 수에 제거할 수 있다고도 하셨고요."
"내, 내가?"
"네. 그래서 생각한 것인데, 현화문의 신공절학이라면 분명 어딘가에는 잊어버린 무공을 되찾는 방법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그게……."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주군께서는 무공도 되찾고, 사부님도 구할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너……."
효보의 계책.
난 그것을 다 듣고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커다란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난 놈의 두 눈을 직시했다.
잔뜩 힘까지 주어 녀석을 노려보니, 계효보 이 녀석 무언가 두려웠는지 내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사정없이 눈알을 굴린다.
이제 알 것 같다.
"너, 계효보 너 이 녀석……."
"주, 주군……."
목소리까지 떨리는 계효보.
이젠 확신할 수 있다.
"너…… 너…… 천재였구나! 크하하하하하!"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뛸 듯 다가가 녀석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 녀석, 그냥 충직한 수하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천재 지략가였다.
유비에게 제갈공명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계효보 이 녀석이 있다.
푸하하하하!
오른팔은 곽우적.
왼팔은 계효보.
확정이다!
사실 광마일기를 읽자마자 사부를 어떻게 구할지부터 고민을 했고, 방법을 하나 간구해 둔 게 있다.
그런데 계효보의 계책을 듣고 나니, 어디 쪽팔려서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겠다.
아이고, 이렇게 사랑스런 녀석이 내 수하라니.
확실히 내가 전생에 꼭 나쁜 짓만 하고 다녔던 건 아닌 것 같다.
하늘이 이렇게 나를 돕지 않는가?
하하하!
"효보!"
"충!"
"가자!"
"존명!"
나와 계효보는 곧바로 갑돌산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물론, 나는 길을 몰라 계효보가 앞장선 걸음이었다.
다시 무공 익히려고 시도하는 건 미련한 짓이라 생각해 포기하려 했는데,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었다니.
구산사괴, 이번엔 진짜 다 죽었다!
* * *
"사부니이이이임!"
"어허, 사문의 문규를 잘 아는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리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더냐?"
"사부님! 정말 중요한 일이라 그래요! 제 몸에 있던 단전이 사라진 것까지 확인하셨잖아요."
"허허허. 악치야.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란다."
"제가 혀 깨물고 죽어도 안 된다고 하실 거예요?"
"녀석, 정말 오늘따라 왜 이리 생떼를 쓰는 건지."
"저 밥 안 먹어요. 굶어 죽어요!"
"그래도 안 된다."
"저…… 정말 죽는다고요!"
"안돼."
"사부!"
"‘님’ 자가 빠졌다, 악치야."
"진짜 필요해서 그래요!"
"쯧쯧쯧. 네가 정말 이상해졌구나. 안 되겠다. 벌이다."
"사부!"
"문주로서 명을 내리겠다. 악치는 무릎을 꿇어라."
"사부우우우!"
"어서!"
아! 사부가 처음으로 화난 얼굴을 했다.
도저히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난 눈물이 쏟아질 것같이 억울했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사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하산을 해 다섯 개의 마을을 돌며 공양을 받아 오도록 해라. 이게 문규를 어기려 했던 네게 내리는 벌이니라."
"……."
"대답, 안 하느냐?"
"네."
"악치야."
사부가 또 저렇게 빠져들 것같이 인자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날 불렀다.
어느새 다가와 내 어깨에 손까지 얹었다.
"누구보다 착한 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나는 도통 알 수 없구나. 바람 좀 쐬고, 사람 구경도 하고 오너라. 이거 받아라. 아직 밤바람이 차니, 꼭 방을 잡아 자도록 하고."
사부는 은자 한 냥과 철전까지 내게 건네주었다.
아마 우리 사문의 전 재산일 테다.
그 은자와 철전을 받고 나니, 내 눈에서 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난 그렇게 다시 갑돌산을 내려와야 했다.
* * *
"주, 주군?"
산을 내려왔다.
대낮부터 객잔에 앉아 술을 퍼마시고 있다.
"효보야."
"네, 주군."
"있는 돈 다 꺼내 봐."
"네? 그, 그게…… 넵."
효보는 충신이다.
내 말에 곧바로 자신의 품에 있던 전낭을 통째로 나에게 건넸다.
난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 전낭 안을 확인했다.
이 녀석, 역시 부자다.
엄청나군.
"상책이 통하지 않으면 중책을 써야지."
"그 말씀은……?"
"낭인을 고용한다."
"낭, 낭인이요? 사문의 신공절학은…… 포기하시는 겁니까?"
"사부님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아, 네. 넵."
"이 돈이면 낭인을 얼마나 구할 수 있지?"
"쉽지 않을 겁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름이 있는 문파나 세력이 아닌 경우, 믿고 쓸 만한 낭인을 구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소림사가 있는 하남 아니겠습니까? 다른 지역처럼 활동하는 낭인 자체가 많지도 않고요."
"한 달 안에 구할 수 있는 낭인은 모두 구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존, 존명. 죽을힘을 다해 죄다 끌어모으겠습니다."
그렇다.
내가 광천동에서 깨어나 처음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어쨌거나 사부님은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비급들이 어디에 봉인되어 있는지, 또 그게 어떻게 봉인되어 있고 꺼낼 수 있는지는 나중의 문제다.
지금은 사부님을 살리는 데 모든 것을 집중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운 후, 나와 계효보는 낭인들을 구하기 위해 쉴 틈도 없이 사방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 * *
일류 낭인 일곱 명.
이류 낭인 스물네 명.
삼류 낭인 열 명.
큭큭큭.
성공이다.
충분하다.
구산사괴 중 황노가 고수 급이라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그건 정말 아주 작은 가능성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한 전력이다.
거기에 우리는 완벽한 계책까지 세우지 않았겠는가.
효보의 돈을 모두 쏟아부어 정말 아슬아슬하게 날짜에 맞춰 낭인들을 고용하고 계책을 세울 수 있었다.
"다들 내가 했던 말 명심하시오!"
"마악치 도사님, 열 번도 넘게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모인 자들 모두 십 년 넘게 이 바닥 생활을 했고, 최소한 일백 번이 넘는 작전과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은 낭인들입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을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나를 향해 자신 있게 답하는 자.
노검랑(老劍狼) 도공우다.
낭인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자라고 한다.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인 고수 급 무인 다섯 명의 목을 벤 이력까지 있는 낭인 경력 사십 년의 백전노장이기도 하다.
그 외 다른 낭인들 역시 모두 든든하기 짝이 없는 제대로 된 자들만 뽑아 데리고 왔다.
그게 끝이 아니다.
나는, 계효보는 물론 낭인들과 며칠에 걸쳐 머리를 맞대고 계책을 수립했다.
빈틈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작전이다.
이번에는 사부님을 꼭 살린다.
"갑시다!"
"넵!"
나는 마흔한 명의 낭인들을 대동하여 갑돌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산사괴, 이번엔 진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