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부의 내공은 십사 갑자다.
언제 한번 어렴풋이 물었을 때 그리 답을 했으니, 아마 지금 시점의 사부 내공은 그 이상일 것이다.
일 갑자의 내공은, 무재가 출중한 한 명의 무인이 상승에 속한다 할 수 있는 뛰어난 무공으로 심법을 육십 년 동안 꾸준히 수련하여야 얻을 수 있는 양이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그렇고, 실제 그리되는 경우는 백에 한 명이 아니라 천에 한 명, 만 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게 냉혹한 현실이다.
그런데 십사 갑자다.
무려 팔백사십 년 동안 심법을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양이다.
당연히 우리 사부가 내공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이다.
내가 지금 어떻게 회귀를 한 것인지는 명확히 모르겠지만, 광천마제 시절 내공의 정점을 찍었을 당시가 팔 갑자였다.
다 우리 사문인 현화문의 현화승천신공(玄化昇天神功) 덕분이다.
그럼 다른 고수들도 그러한가?
아니다.
소림사의 천수신권 그 땡중이 육 갑자였고, 무림맹주였던 남궁세가 창궁검제의 내공은 사 갑자, 화산파의 자하신단까지 복용했다는 화산검후는 고작 이 갑자에도 미치지 못했다.
우리 사부의 내공은 그야말로 사기다.
나야 뭐, 중간에 영약도 냠냠하고 그랬지만, 사부는 오로지 도를 닦는 수행만으로 그런 무지막지한 내공을 쌓게 되었다.
그런 사부가 고작 구산사괴 따위한테 목숨을 잃는다?
하!
무림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현화문의 사정을 그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사실 한 달 뒤 사부를 죽이고 현화승천신공의 비급을 갈취하러 오는 구산사괴 녀석들이 그런 짓을 벌이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세상사라는 게 인(因)이 없는 과(果)는 없는 법이다.
"악치야."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사부를 꼭 끌어안고 있다가, 잠시 딴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울음을 그쳐서인지 아니면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사부가 인자한 목소리와 함께 나를 살포시 품에서 밀쳐 냈다.
날 보며 고개까지 갸우뚱하는 사부.
"왜 그러세요?"
"마을에 내려가 놀면서 무슨 일을 겪은 것이더냐?"
"마을에 안 내려갔어요."
"응? 그럼 어제부터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단 말이냐?"
아! 지금 시점에서는 내가 하루 가출한 것인가?
뭐, 그건 중요치 않고.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한다?
아니다.
그냥 솔직히 말하자.
그래야 한다.
우리 사부한테는.
"사부님."
"그래, 악치야. 하루 사이 무슨 엄청난 일이라도 겪었던 게냐?"
"그게…… 기억이 안 나요."
"응?"
"기억이…… 아무것도 안 나요. 집도 저 친구가 도와줘서 찾아올 수 있었어요."
사부의 얼굴이 심각해지며 순간 근심이 가득 찼다.
조금 떨어진 곳에 뻘쭘하게 서 있는 계효보에게 사부의 눈길이 닿자, 녀석은 화들짝 놀라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사부는 계효보의 인사는 받지도 않고, 다시 근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맥을 좀 보아야겠구나."
난 선뜻 사부에게 왼쪽 손목을 내밀었다.
아마 사부는 내 상태도 상태지만, 나에게서 느껴지는 기감이 평소와 다름을 감지한 것 같다.
그렇게 사부의 진맥이 시작되었고, 사부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어두워져 갔다.
"없구나."
"네? 없어요? 뭐가 없어요?"
"단전 말이다. 수년 내 일 갑자의 내공이 축기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허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일 갑자의 내공.
이맘때 내가 축기한 내공의 양이 사십 년 치 정도 되었다고 광마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모두 사라졌다.
아니, 단전까지 없어졌다고?
정말 내가 기억을 모두 잃어서, 그래서 운기하는 방법을 몰라 그랬던 게 아니라 그냥 단전 자체가 사라졌다고?
도대체 이건 어떻게 된 것일까?
아! 한 달 안에 무공 되찾아야 하는데.
안 그러면, 우리 사부 죽는데.
사부는 홀로 인상까지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난 믿는다.
사부라면, 무려 십사 갑자 내공의 사부라면 분명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곧!
"허허허. 허허허허허!"
사부가 무슨 커다란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그렇게 크고 환하게 웃었다.
찾은 것이다.
내 무공을 되찾을 방법을.
"뭔데요?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을 수 있어요?"
"무공?"
"아, 아니요. 내공이요."
"아, 허허. 실망이 크겠구나. 나도 잠시 그러했느니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뭐지?
갑자기 불안하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사부는 여전히 인자하여 빠져들 것만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이었다.
"내공이 있은들 없은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우리야 도를 닦는 도인들 아니겠느냐? 오로지 마음의 수양을 쌓고,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 수양하면 되느니라. 내공이란 것은 무릇 수양을 쌓는데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 우리가 도를 닦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란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허허허."
* * *
현화문(玄化門).
나의 사문이다.
그리고 도를 닦는 도문(道門)이다.
사부가 이십삼 대 문주니, 그 역사도 정말 오래됐다.
현화문의 목적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무공은 그 과정에서 얻은 수많은 것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사부가 그렇듯, 도를 닦는 도인이 무림과 은원을 만들 필요는 없다.
심지어 우리 현화문은 철저하게 고립된 생활을 자처하며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문제는 이십일대 문주, 그러니까 얼굴도 본 적 없는 나의 태사조 대에서 시작되었다.
참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태사조는 여러 방법을 시도했고, 그중 무공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 사부가 그렇듯, 태사조께서도 원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괴물급의 내공을 쌓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사문에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는 여러 무공을 익혔다.
그리고 때마침, 무림에 광천마제 시절 때의 나보다 더 미치고 사악한 대마두가 출몰했다.
이름하여 흑성대마왕.
무림인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이는 살인귀였고 끔찍한 대마두였다.
당시 무림의 최정점에 있던 고수들조차 그의 마수에 피를 뿌리며 속절없이 죽어 갔다.
그걸 심산 벽촌에서 은거하며 홀로 도를 닦던 태사조가 우연히 알게 되었고.
모르면 몰랐을까, 그 즉시 하산을 하여 흑성대마왕과 싸웠다.
결과?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무공에 무 자도 모르는 우리 사부의 내공이 십사 갑자인데, 무공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며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혔던 우리 태사조의 내공이며 무공은 어떠했겠는가?
당시 무림사대고수니, 십대고수니, 백대고수니 하던 작자들이 두려워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코빼기도 비치지 않을 때, 우리 태사조가 그 흑성대마왕을 홀로 물리친 것이다.
천하는 열광했고, 태사조를 향한 찬사는 끊이지 않았다.
흑성대마왕을 제거한 태사조는 조용히 산으로 돌아와, 하던 도나 계속 닦을 생각이었다.
너무 순진했다.
무림의 생리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개방과 하오문 등에서 태사조에 대한 정보는 그 값을 매기기 힘들 정도로 치솟았고.
고수가 되길 꿈꾸는 무인들은 그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태사조의 위치를 알아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한 달 뒤 사부를 죽이고 비급을 갈취하러 올 구산사괴 놈들의 할아버지도 그때 몰려들었던 수천 명의 무인 중 일부였다.
도만 닦을 줄 알았지, 세상에 대해 너무 몰랐던 태사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사이 몰려든 무인들은 알아서 전각도 짓고, 연무장도 만들고, 태사조를 문주로 모시며, 스스로 우리 현화문의 제자가 되었다.
결국 이렇게 가다가는 도를 닦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렇다고 본 적은 없지만 우리 사부처럼 착했을 태사조가 차갑게 그들을 내칠 수도 없었기에, 그들을 모두 받아 주고 제자로 삼는 결심을 한다.
단, 무공에 관련한 비급을 모두 봉인하고 오로지 도를 닦는 방법만을 전수해 주었다.
훔치려는 자, 유혹하려는 자, 사기를 치려는 자, 가짜 눈물을 흘리는 자, 심지어 죽이려는 자까지.
태사조는 그 모든 역경을 이겨 내고 사문을 지켰다.
아니, 봉인한 무공 비급들을 지켰다.
그 후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더니, 수십 명이 떠났고, 다시 수백 명이 사문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제자는 단 네 명.
그게 정확히 구산사괴의 할아버지들이다.
사부는 태사조가 우화등선했다고 하나,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원래 있던 태사조의 제자가 이십이 대 문주로 등극.
나의 사조 되시겠다.
사조 역시 태사조의 유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봉인된 무공의 비급을 풀지 않았고, 스스로 익히지도 않았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던 구산사괴의 할아버지들은, 끝내 현화문의 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실망과 분노로 사문을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떠났다고 한다.
우리 사문이 현제 갑돌산에 위치한 이유도, 마지막 제자들을 떠나보낸 사조께서 세상을 피해 사문을 이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사조의 유언은 사조에 이어 사부에게까지 이어졌고, 이제는 사문의 우선 문규가 되었다.
우리 사부가 현화승천신공이라는 무지막지한 신공을 익히고 있음에도, 무에 무 자도 모르고, 평생 정권지르기 한 번 해 보지 못했으며, 십사 갑자의 말도 안 되는 내공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그 흔한 발경(發勁), 발기(發氣)는커녕 충기(充氣)조차 못 하는 이유다.
한 달 뒤, 구산사괴의 칼에 속절없이 맞아 죽은 이유기도 하고.
우리 사문에서 현화승천신공은 그야말로 도를 닦는 과정인 명상 수련의 일부 단계일 뿐, 절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실 구산사괴의 할아버지들은 되돌릴 수 없는 멍청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태사조는 물론, 사조께서도 그들에게 현화승천신공을 전수해 주려 했는데 그들이 거부한 것이다.
이유는 누구나 예상을 하듯, 그것이 무공인 줄 몰랐고 도를 닦는 단전호흡법 정도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화승천신공은 심오한 심법이다.
고작 이류 수준이었던 구산사괴의 할아버지들이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그렇게 간단한 심법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문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집요함과 끈질김이 있었다.
구산사괴의 할아버지들은, 천하가 모두 현화문에 대한 이야기를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에도 기억하고 있었고, 욕심 또한 놓지 않았다.
그들의 욕망은 그 아들들에게 전해졌고, 다시 그 아들들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현화문에 봉인된 신공절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여섯 달 전부터 그들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십간(十干) 산들을 오르며 약초를 캐는 약초꾼이라 스스로 소개했다.
도를 닦는 도사에게 공양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한 달에 두세 번씩 이곳에 들려 싸구려 약초들을 전해 준 후 가곤 했다.
반년 동안 우리를 염탐한 것이다.
그리고 확신했을 것이다.
자신의 할아버지들과 달리 한 명은 고수 급이고 나머지 셋 역시 일류 무사의 반열에 오른 그들의 눈에, 우리 사부가 그들이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심법을 익히고 있음을.
* * *
"무슨 생각을 그토록 깊이 하는 것이더냐?"
"네? 아, 죄송해요."
사부가 진맥을 잡고 있던 손을 떼며 다시금 감동적이기까지 한 눈빛과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많이 서운한가 보구나?"
"그게, 네. 솔직히 많이 서운하네요."
"그래, 그럴 수 있단다. 괜찮다."
"사부님,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죠? 내공이 사라진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노력하겠는데, 멀쩡히 있던 단전까지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사라졌잖아요."
사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짧게 생각을 마친 후 곧바로 그 답을 주었다.
"다른 가능성은 모르겠다. 다만 네 태사조께서도 너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단다."
"흑성대마왕을 물리쳐 그 당시 무림의 천하제일인이 되셨고, 나중에는 우화등선했다는 태사조님이요?"
"그래. 물론…… 풉. 아, 미안하다. 심각한 상황에 실없이 웃어 보여서."
"아니에요."
"사실 가능성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구나."
"태사조님께서 겪었던 일이 어떤 일이었기에 저에게는 그 가능성이 그렇게까지 없다는 말씀이세요?"
"아, 그게. 음, 그래. 그냥 재미난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듣거라. 실망하지 말고."
"네, 사부님."
"태사조님께서 엄청난 무공의 고수라 하지 않았느냐? 물론, 모두 도를 닦는 일련의 과정으로 인해 그렇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네."
"그 태사조님께서 무림인들이 말하는 화경의 경지에 오르시고, 나중에는 무림에서도 이백 년 동안 아무도 오르지 못했다는 현경의 반열에 오르셨다고 하시더구나."
"현, 현경이요?"
이건 광마일기에도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 현경의 고수가 삼백 년 동안 없었던 게 아니라, 그 중간에 우리 태사조님이 있었다는 거잖아.
살짝 충격이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래. 네 사조님께서 친히 내게 말씀해 주셨단다. 이를 직접 목격했다고 하시더구나."
"태사조님께서 현경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을 사조님께서 직접 목격하셨다고요?"
"그렇지. 흔히들 말하는 삼화취정이니 하는 기이한 현상들은 없었다고 하더구나. 다만 네 태사조님께서 확실히 환골탈태를 하시고 젊어지셨다고 하셨다."
"반로환동이요? 저만큼 젊어지신 거예요?"
"허허허.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더냐? 고희(古稀, 70세)를 넘기셨던 태사조님께서 불혹(不惑, 40세)이나 지명(知命, 50세) 정도로 보이셨단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제게 단전과 내공이 없어진 이유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게 말이다. 그 이유는 사부님께서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단다. 사부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단전이야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그 이유는 알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네? 단전이, 단전이 없다고요?"
"그렇다. 태사조님께서 현경의 반열에 오르신 후 단전이 사라졌다고 하셨다."
설마 나…… 광마일기에 적혀 있던 마지막 도전, 진짜로 성공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