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동굴에서 깨어났다.
작은 석탁에 놓인 책자, 광마일기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각성하였다.
난 광천마제 마악치다.
* * *
동굴을 나오니 정말로 동굴 입구 위에 광천동이라는 글자가 각인 돼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내가 무공을 시험하기 위해 정권지르기를 했던 그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참,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그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앉았다.
난 광천마제 마악치다.
당금 무림의 주인은 나였다.
하지만 배신당했다.
그게 끝이 아니다.
반격의 시작.
내가 드디어 현경의 벽을 깬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광마일기에 적힌 대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
왜 이럴까?
아니 그보다, 분명 광마일기 마지막 글에 내가 의제를 찾아 우각당으로 향한다고 적혀 있는데.
그 이후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곤 다시 광천동에서 깨어났다.
무슨 변고라도 생겼던 걸까?
그래서 계효보 녀석이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인가?
그것도 아니지.
그 먼 곳에서 굳이 이곳까지 힘들게 날 데리고 올 필요가 없잖아?
그나저나 계효보 이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야?
빨리 만나야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볼 텐데.
답답한 마음으로 계효보를 찾고 있을 때, 한 사내가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헐레벌떡 뛰어 올라왔다.
저 녀석이 계효보가 맞다.
본 적도 없고 기억도 안 나지만, 광마일기에 분명 그리 적혀 있었다.
‘계효보는 닭상이다.’
* * *
"저…… 저기……."
이 녀석도 함께 미쳤나?
주군인 나를 향해 요상한 표정과 함께 주저주저하며 저리 말을 한다.
"저기?"
내가 짜증 섞은 표정으로 반문하니 계효보가 화들짝 놀란다.
"그게…… 저……."
"야. 그렇지 않아도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너까지 왜 이래?"
더더욱 놀란 표정을 짓는 계효보.
이 녀석까지 정말 왜 이러는 건지.
짜증이 더 치밀어 오르려고 할 때, 놈은 한술 더 떠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절,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제가 누군지 아세요?"
"갈! 매일 나에게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던 계효보가 바로 너 아니냐!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왜 그래? 너까지 미쳤어?"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 호통에 계효보는 곧바로 허리를 부러뜨리기라도 할 듯 크게 숙이며 용서를 구하였다.
덜덜 떨기까지 하는데, 그나마 지금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녀석인데 좀 미안하기도 했다.
"됐어. 허리 펴."
"존명."
바른 자세를 했지만, 조금 전 내 호통이 많이 무서웠는지 식은땀과 함께 눈알을 사정없이 굴리는 녀석이었다.
됐다.
우선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봐야겠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정말.
한 대 후려갈기고 대화를 다시 시작할까?
답답해 미치겠네.
뭐, 저 녀석이 반항이라도 하면 꼼짝없이 두들겨 맞는 건 나일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왜 여기에 있냐고!"
"주, 주군."
"왜?"
"우선 옷부터……."
쌍방울을 덜렁거리며 서 있던 나를 향해, 계효보가 조심스레 봇짐을 건넸다.
허리에 차고 있던 두 자루 검 중 한 자루까지 함께 건네 주었다.
짜식, 한 번 겪어 봐서 그런가?
내가 알몸인 건 어찌 알고 이런 걸 다 준비했는지.
역시 광마일기에 적힌 대로 생긴 것 빼고는 마음에 드는 짓을 잘하는 녀석이다.
옷을 다 입고 허리에 검까지 찬 후 다시 계효보를 향해 물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분명 우린 강서 남창에 있어야 할 텐데."
명확한 질문.
하지만 계효보는 즉답을 하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혼란한 얼굴을 하더니, 또 눈알만 사정없이 굴린다.
이번에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다그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그도 나처럼 어려운 무언가가 있기에 저러는 것일 테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러 계효보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나를 향해 말했다.
"주군, 혹시 지금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뜬금없이 그건 무슨 말이야?"
"그, 그게…… 우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하! 너 지금 내가 미쳤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번에는 허리만 숙이는 게 아니라 아예 오체투지를 하고 벌벌 떤다.
"됐어. 일어나. 내가 정상인 것만 알려 주면 되는 거잖아."
"죄송합니다, 주군."
몸을 일으킨 후에도 감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그나저나 사실 내가 진짜 정상이 아니긴 아닌데.
내가 조금 미친 것 같다고 말해 주기에는 체통도 안 서고, 혹시 모를 위험도 대비해야 하고.
뭐, 모르겠다.
우선 계효보 녀석이 묻는 것에 답부터 해 주자.
"올해가 계사(癸巳)년이 아니더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만 보던 계효보가 곧바로 고개를 쳐들며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주, 주군!"
덩달아 나도 놀랐다.
"왜? 뭔데? 왜 그래?"
계효보의 목소리도 떨렸고, 내 목소리도 떨렸다.
"계, 계유(癸酉)년."
"뭐? 계유년?"
"네, 올해는 계사년이 아닌 계유년입니다."
난 엄지로 검지, 중지, 약지, 소지를 콕콕 짚어 가며 미친 듯 시간을 계산했다.
그리고 인정하기 힘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내…… 내 나이가? 지금 내 나이가 몇이지?"
"주군께서 올해 열여덟이 되셨습니다."
"넌?"
"전 스물일곱입니다, 주군."
"난?"
"네?"
"내 나이 몇 살이라고?"
"조금 전 열여덟이라고……."
"광천마제 마악치."
"주군의 함자가 마악치라는 위대한 이름은 맞지만, 광천마제라는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천하제일인!"
"주군께서 천하제일인이 되실 거라하셨습니다. 전 주군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 길로 가는 과정이고, 당장 천하제일인이라는 말씀을 하시면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패천! 사패천의 천주! 천주천하!"
"모두 처음 듣는 말들입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계효보가 미친 걸까?
안다.
내가 미쳤다는 걸.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십 년 전이라니?
내가 이십 년 전으로 돌아왔다니.
그럼 광마일기는 뭐지?
마지막 순간 현경의 벽을 깨기 위해 도전했던 게 실패한 건가?
그때 죽고 회귀한 거?
아!
무슨 손오공과 요괴가 살던 시대도 아니고,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일이란 말인가?
계효보를 만나면 뭔가 혼란스러웠던 게 정리될 줄 알았는데, 더더욱 복잡해졌다.
잠깐!
"효보."
"충!"
"내가 열여덟 살이라고?"
"그렇습니다."
"계유년?"
"네, 주군."
"계유년 언제지? 정확한 날짜."
"계유(癸酉)년 경인(庚寅)월 병진(丙辰)일입니다."
효보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이 굳고 말았다.
회귀고 뭐고 지금 중요한 건 사부님, 그래 사부님이다.
사부, 사부님이 죽는다.
어찌 사부님의 기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광마일기에 대문짝만한 글씨로 몇 번에 걸쳐 기록해 놓기도 했다.
계유(癸酉)년 신묘(辛卯)월 병술(丙戌)일.
정확히 삼십 일 남았다.
지금 현경이고 나발이고 복수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없다.
시간이 없다.
사부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
"효보!"
"충!"
"가자!"
"네?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사부님께 간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곧바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넵!"
내가 정신이 돌아왔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게 마음에 들었던 걸까?
계효보의 우렁찬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말을 탈 필요는 없다.
뛰어가도 금방이다.
그래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무슨 문제라도……?"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던 계효보가 함께 뜀박질을 멈추며 의아한 듯 나에게 물었다.
"근데 갑돌산이 어디야?"
결국 계효보가 앞장을 서고 내가 그 뒤를 따라 다시 뜀박질을 시작해야 했다.
* * *
내가 깨어난 광천동이 있는 곳은 병막산(丙幕山).
사부가 계신 곳, 즉 나의 집이자 사문이 있는 곳은 갑돌산(甲突山)이다.
이곳 일대는 정확히 열 개의 커다란 산으로 이루어진 땅이다.
갑돌산, 병막산, 을수산, 정정산 등등.
산 이름을 죄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의 십간(十干)에서 따와 지었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몰라도, 정말 너무 대충 지었다.
갑돌산은 당연히 병막산 바로 옆의 옆에 위치해 있다.
난 숨이 턱 하고 막히고, 나뭇가지에 피부가 찢겨 나가고, 다시 다리 근육이 터질 듯 아파도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새 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바람과 함께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곳에 도착하였다.
초라하고 낡은 모옥.
그 마당에 난생처음 보는 사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사…… 흑흑흑. 사…… 흑흑."
사부를 보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눈물만 계속 폭포수처럼 터져 흘러나왔다.
내 흐느낌을 들었는지 사부가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향했다.
"허허, 또 마을에 놀러 갔다 온 모양이구나. 그래도 잠은 집에서 자야지, 인석아. 그래, 밥은 먹었느냐?"
사부 유현.
현화문(玄化門)의 이십삼 대 문주.
일평생 오로지 참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심신(心神)의 수행에만 전념한 진짜 도사.
그로 인해 선풍도골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게 만드는 멋진 풍모와 기운까지.
한 마디로 잘생겼다.
광마일기에 적힌 그 모습 그대로다.
"사부님!"
난 단숨에 달려가 사부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정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사부를 꼭 끌어안고 오열을 토했다.
움찔하던 사부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괜찮다. 다 괜찮으니라. 허허허.’라며 내 등을 토닥여 주셨다.
사실 나는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글로만 읽은 사부다.
그 내용이 절절하고 가슴에 사무쳤지만, 그래 봐야 어차피 처음 보는 사람일 뿐이다.
분명 머리로는 그리 생각하는데,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사부를 떠올렸을 때부터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광마일기 마지막 부분, 의제 곽우적을 생각할 때도 이런 느낌이라 기록해 놨는데.
무엇일까?
회귀를 하며 기억은 지워졌지만, 감정은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 지금 이게 정말 회귀가 맞긴 맞는 건가?
아! 혼란스럽다.
솔직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단 하나!
어떻게 해서든 사부를 살릴 것이다.
절대, 절대로 놈들에게 다시는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이 그리 울부짖고 있다.
시간은 딱 삼십 일 남았다.
그 안에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광천마제의 힘을 되찾아 사부를 살릴 것이다.
* * *
<<광마일기>>
(상략)
……
사부님은 아버지셨다.
또 사부님은 어머니셨다.
천애 고아였던 내가 기억이란 걸 하기 시작할 때부터 사부님은 나의 아버지셨고, 어머니셨으며, 스승이셨다.
그런 사부님께서 내 나이 열여덟 살에 돌아가셨다.
아마 내가 처음으로 세상을 증오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 사건이었으리라.
마두였고, 대마두가 됐으며, 대마왕이라 불리고, 종국에는 광천마제라는 악의 절대자가 된 나의 일생.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손에 사부님이 돌아가시면서 시작되었다.
증오, 분노, 살의.
맞다.
그때부터 선했던 나의 마음에 악이란 것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
(중략)
……
광천마제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천하의 모든 정보 세력을 돌리는 일이었다.
사부님을 죽인 흉수.
난 그놈들을 찾을 때까지 개방과 하오문은 물론 무림의 모든 방파와 세가의 정보 조직까지 죄다 굴려 흉수들을 찾게 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구산사괴(九山四傀).
놈들은 사부를 죽일 때 어리숙하고 착하기만 했던 내가 광천마제 마악치와 동일인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부를 죽이고 훔쳐 간 사문의 비급, 현화승천신공(玄化昇天神功)을 바탕으로 네 명 모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후 당당하게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난 직접 놈들을 찾아갔다.
놈들을 산 채로 잡았다.
먼저 불로 놈들의 눈을 지지고, 그다음 산 채로 껍질을 벗겼다.
그런 후 삼십 일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놈들을 말려 죽였다.
내 삶 중, 가장 잔인하게 누군가를 죽인 일이었다.
……
(하략)
* * *
기다려라, 구산사괴!
이번 선빵은, 내가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