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광천동(光天洞).
내가 기억을 잃고 깨어난 동굴의 이름이 광천동이다.
아니, 내가 현경의 벽을 부수고 지고한 경지에 오른 장소가 바로 광천동이다.
하! 이름 한번 멋지게 지었군.
내가 지었다.
광천동 역시 내가 만든 동굴이다.
무림 최정점에 있는 고수들의 목을 연달아 베고, 다시 마교주와 일대일 대결에서까지 승리한 후 정파는 알아서 내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절대자는 고독하다고.
뭐, 난 고독까지는 모르겠고 그냥 심심했다.
그래서 광천동을 만들었다.
왜, 무림 영웅전 같은 거 보면 주인공이 동굴로 들어가 기연을 만나고, 막 무공을 익혀서 천하제일인 되고 그러지 않는가?
내가 좀 악명을 떨쳤어야지.
그래서 후대에는 나름 좋게 포장 좀 하려고 광천동을 판 것이다.
내 안배를 만난 후대의 연자가, 무림 영웅전처럼 천하제일인이 되고 멋지게 활약하면 덩달아 내 이름도 조금 좋게 바뀌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광천동을 준비할 때 각종 신병이기며 내 신공의 비급, 영약, 금은보화 등등 엄청난 보물들을 가득 쌓아 놨는데.
물론 이런 기억과 지식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다.
광천동에서 깨어난 후 광마일기를 읽어 알게 된 사실이다.
광마일기를 읽는다고, 없던 기억이 막 생겨나고 그렇진 않다.
그냥 읽고, 그렇게 습득한 지식들이다.
아무튼 어떤 새끼인지는 몰라도 내 보물들, 다 털어 갔다.
뭐, 상관없다.
도둑놈은 나중에 잡아 죽이면 되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현경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휴우. 휴우. 휴우."
심호흡을 길게 세 번 했다.
광천동을 나와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과연 현경의 경지, 그것에서 나오는 힘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려 온다.
그 첫 시험을 내 키보다 두 배는 커다란 이 바위에 하려는 중이다.
"휴우. 휴우."
다시 심호흡을 두 번 더하고.
기마자세.
그리고 정권지르기.
"얍!"
빠각.
"으아아아아아악!"
아프다.
졸라 아프다.
진짜 무지막지하게 아프다.
난 바위를 친 주먹을 움켜잡고 눈물까지 마구 흘리며 바닥을 사정없이 굴러야 했다.
뭐지?
왜?
난 현경의 고수인데.
이깟 바위 하나 부수지 못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아프다.
무지막지하게 아파.
아!
미친.
너무 아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얍!"
퍽.
"으악!"
젠장!
빌어먹을!
바위는 좀 심했다 싶어서 팔뚝 굵기의 나무를 상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내 손만 아프다.
더럽게 아프다.
아! 도대체 뭐냐고!
천하제일인의 주먹이 왜 이렇게 아프냔 말이다.
다시 한참이나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주먹을 꼭 움켜잡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휴우. 좋아. 이번엔 나뭇가지 세 개 도전."
심호흡을 한 후, 새끼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 세 개를 손날로 내리쳤다.
"얍!"
팍.
"으, 으윽."
젠장.
실패다.
나뭇가지 두 개까지는 부러뜨릴 수 있지만, 세 개는 무리다.
왜?
도대체 왜?
현경의 고수가 된 내가 고작 나뭇가지 세 개를 못 부러뜨리냐고!
아픔보다 성질이 더 났다.
* * *
큭큭큭.
내가 좀 멍청했다.
무림인이란 자고로 내공이 중요한 법.
아놔, 다시 생각해도 창피하네.
됐다.
누가 본 사람도 없고.
난 조금 전 내 무공을 처음 시험했던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앉았다.
당연히 무림인들이 그렇듯 가부좌를 그럴싸하게 틀고 앉았다.
내공, 그것을 운용해야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가르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푸하하하!
다시 생각해도 쪽팔리는 짓을 했군.
멍청하긴.
됐다.
내공만 생각하자.
난 가부좌를 튼 상태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쪽팔렸던 마음을 까맣게 지우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내공을…… 내공을 운용하면…… 응?
내공을 어떻게 운용하지?
맞다.
심법의 구결.
그런데 음,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다.
심법?
구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광마일기에도 적혀 있지 않다.
그건 말 그대로 일기다.
내 일생에 관하여서는 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무공의 구결이나 깨달음 따위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
그래서 뭐?
아! 어쩌지?
그래, 어디선가 상승의 고수들은 의지만으로 내공을 움직인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의지.
내 의지와 의념으로 내공을 움직인다.
다시 시작이다.
젠장!
빌어먹을.
안 된다.
한 시진이나 오로지 내공을 운용하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집중했지만, 내공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다리가 너무 저리다.
감각까지 사라진 느낌이다.
미친!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것이다.
내공, 아니 단전.
무림 영웅전 같은 거 보면-그나저나 내가 무림 영웅전을 읽은 적이 있긴 있나? 모르겠다.-단전이 있고 내공이 있으면, 아랫배에 따뜻하고 묵직한 느낌이 든다고 했는데.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줌만 가득 차 있다.
젠장.
진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설마…… 아닌가?
그 일기, 내가 주인이 아니었던 건가?
혼란스럽다.
* * *
"주군!"
닭상이다.
쥐상, 말상, 돼지상, 호랑이상 등등 수많은 얼굴의 형태가 있는데, 얘는 닭상이다.
얼굴 자체가 뾰족한데 입과 코가 더 튀어나와 그냥 딱 닭처럼 생겼다.
양쪽 귀는 축 늘어진데다 심지어 귀 끝이 동상에라도 걸렸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붉은빛을 띤다.
머리는 또 왜 저런 모양으로 한 것인지.
그냥 생각나는 게 닭 볏밖에 없다.
생긴 게 좀 독특하긴 한데, 또 입고 있는 무복은 고급으로 보였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까지 꽤 그럴싸하다.
어쨌거나 내가 혼란한 머리를 정리하려고 꽤 긴 시간 바위에 앉아 있을 때 이놈이 왔다.
여전히 알몸 상태인 나를 발견하고는 헐레벌떡 달려와 허리까지 깊이 숙이고는 ‘주군!’이라 소리치는 놈이었다.
누구지?
역시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주군이라니.
음.
"그런데 누구……?"
"네? 주군, 저…… 저 효보입니다. 계효보."
"아, 음."
말을 길게 할 수 없었다.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게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맞는 건가?
나 진짜 광천마제 맞아?
계효보에게 직접적으로 물을 순 없다.
진짜 미쳤다고 할 게 뻔하니까.
내가 너무 오래 침묵해서였을까?
아니면 내 상태가 정말 이상하다고 여겨 그랬을까?
계효보가 걱정이 가득 담긴, 달리 보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향해 매우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주군. 괜, 괜찮으십니까?"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
체통도 체통이고,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언제 어디서 다시 무림맹과 사패천 배신자들이 공격해 올지 모른다.
현경의 반열에 올랐으나,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음과 동시에 무공까지 함께 잃었다.
지금의 나는 너무 위험한 상태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조심해야 한다.
계효보란 이 녀석도 아직 완전히 신뢰할 수 없고.
"어험. 내가 뭐? 이상해 보이냐?"
이 녀석의 눈초리, 점점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
뭐지?
설마 알아차린 건가?
"그게 아니라…… 주군, 아무것도 입지 않고 계셔서."
"아! 이거? 하하하! 뭐, 수련하다가 그만…… 하하!"
알몸 때문에 그런 거였군.
괜히 쫄았네.
"그러고 보니."
"넵, 주군."
"옷이 필요하군."
"금방 구해 가지고 오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자 계효보는 곧바로 움직였다.
와! 저게 무림인들이 쓴다는 경신법인가 보다.
대단하다.
난 저것보다 열 배, 아니 백 배는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겠지?
빨리 무공을 되찾아야 한다.
당장 안전을 대비해야 하고, 찾아야 할 사람도 있다.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은데.
나는 계효보가 산 밑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다시 생각이 깊어졌다.
* * *
계효보는 한 식경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돌아왔다.
상품(上品)의 비싼 무복은 물론, 시키지도 않은 멋들어진 검까지 한 자루 구해 가지고 왔다.
자식, 생긴 게 닭상이라 그렇지 하는 행동은 무척 마음에 든다.
그보다 확인할 게 있다.
난 계효보에게서 받은 옷을 입고 검까지 허리에 찬 후, 내 키보다 높은 바위의 뒤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 다음, 알몸이었던지라 어디에 둘지 몰라 바위 뒤에 숨겨 두었던 광마일기와 각혼필까지 잘 챙긴 후에 다시 바위 앞쪽으로 나와 근엄한 얼굴로 계효보를 마주했다.
"묻겠다."
"하명하십시오, 주군."
"내가 누구냐?"
"네?"
"내가 누구냐 물었다. 정확히 내 이름."
"마, 악 자 치 자를 쓰십니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맞다.
내가 광천마제, 천하제일인, 사패천의 천주, 현경의 고수 마악치가 맞는 것이다.
근엄한 척하기 위해 무지 애를 쓰고 있는데,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아무튼 내가 마악치인 것은 확실해졌다.
이젠 더 이상 이를 두고 혼란할 필요가 없다.
"이곳은 어디지?"
"병, 병막산입니다. 주군, 그런데 정말 조금 이상하십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이 녀석, 이젠 옷까지 제대로 입었는데 왜 계속 이상한 눈초리로 날 보는 거지?
진짜 날 의심하는 건가?
혹시 내 달라진 외모 때문에?
아! 그렇지, 그럴 수밖에.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정사연합 추격대에 쫓기며 엄청난 상처를 입은 몰골이었지.
심지어 화산검후한테는 칼빵만 아흔여덟 방을 맞았던 나인데, 멀쩡한 모습을 보니 이상할 만도 하겠지.
심지어 젊어지기까지 했으니, 큭큭큭.
"묻겠다."
"하, 하문하십시오, 주군."
"내가 너를 믿어도 되겠느냐?"
"어찌 신의 충심을 시험하시나이까? 신 계효보, 주군께 목숨을 바치겠다 매일같이 맹세하고 있습니다."
캬! 역시 생긴 것 빼고 다 마음에 들어.
"지금부터 내가 이르는 말은 목숨을 걸고 비밀에 부쳐야 할 것이다."
"존명!"
"드디어 성공했다. 내가 벽을 깼다."
"네?"
"어허!"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모두가 날 배신했는데, 너는 끝까지 나를 찾아 함께해 주었구나. 그래서 특별히 네게만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할 사람이 없어 너한테 말해 주는 거다.
아까부터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
"현경의 벽, 드디어 깼다. 큭큭큭. 내 모습이 변한 건 환골탈태에 반로환동까지 하였기에 그런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이해되느냐? 크하하하하!"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던 계효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녀석도 엄청나게 놀란 모양이다.
차마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못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어찌 아니겠는가?
삼백 년 동안 아무도 이루지 못했다는 현경이란 지고한 경지에 내가 올라섰다는데, 당연한 반응이다.
계효보는 지금 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놀란 녀석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가자."
"어,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따라와라. 내가 곧 네게 천하를 주도록 하겠다. 가장 위급한 순간 끝까지 함께해 준 네게, 이인지하 만인지상(二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를 약속한다."
난 계효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떼었다.
내가 돌아왔다.
예전의 내가 아닌, 더 강력해진 나.
광천마제가 아니라 이제는 절대무신이다.
물론, 어험.
지금 살짝, 아주 쬐끔 불안정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 * *
<<광마일기>>
(상략)
……
천하를 내 발아래 두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이 날 배신했다.
나와 함께 무림을 종횡무진했고, 위기의 순간 내 등을 맡겼던 전우이자 수하들이 내 등에 칼을 꽂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패천 내부의 배신과 반란이 일어남과 동시, 외부에서 무림맹을 위시한 정도 무림의 개잡종들이 공격해 왔다.
천수신권과 창궁검제, 그리고 집요하고도 사악한 화산검후가 수만에 달하는 정파의 개들을 이끌고 날 죽이려고 들이닥친 것이다.
아무리 천하제일인이었다 한들, 천하 모두를 혼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원래 그때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나의 의제 곽우적.
그만이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나와 천수신권, 창궁검제, 화산검후와 더불어 무림 오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사패천의 부천주이자 나와 형제의 결의를 맺은 곽우적.
그가 목숨을 걸고 적들과 싸웠다.
큰 부상으로 싸울 수 없던 내가 탈출할 수 있게, 그가 홀로 모든 적과 맞서 싸우며 활로를 뚫었다.
의제 덕분에 나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나를 살리고 그는 적들에 포위당했다.
하지만 그가 죽는 모습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의제 역시 나처럼 천신만고 끝에 탈주에 성공하여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지금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다.
제발, 제발 살아 있어다오 나의 의제여.
……
(하략)
* * *
강서 남창으로 간다.
그곳이 의제 곽우적의 고향이자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우각회(牛角會)가 있는 곳이다.
만약 의제가 살아 있다면 그곳에 있으리라.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친다.
고작 글로만 읽었을 뿐인 의제다.
그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도대체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가 왜 이렇게 내 심장을 뛰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이 끓어오르는 피가 증명한다.
그가 바로 나의 진짜 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