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할배요! 거기 조심! 아, 증말. 거기 낭떠러지! 조심하라니까! 떨어지면 죽어요."
절강 태주 용왕산(龍王山)의 지극현애(地極顯涯)는 나름 인근에서 절경을 자랑하는 절벽이다.
평소라면 이곳을 구경하려는 유람객들이 제법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유람객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십 장이나 되는 절벽 위 끄트머리.
그 위험한 곳에 봉두난발의 사내가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며 위태위태하게 서 있다.
그리고 그와 석 장의 거리를 두고 아홉 명의 사내들이 대치한 상태.
이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까지로 보이는 사내들은 무공을 익힌 무림인인 듯, 몇몇은 그럴듯한 병장기까지 소지하고 있었다.
다만, 봉두난발의 괴한을 해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는 듯, 검과 도를 뽑아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우 안타까운 얼굴들이었다.
"할배요! 그만하고 갑시다. 네? 고집 좀 그만 부리고요. 발 조심! 떨어지면 죽는다니까요. 제발! 쫌!"
아홉 명의 사내 중 나름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더욱 안타까운 목소리로 괴한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위함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괴한은 성난 얼굴로 고함을 치며 대꾸했다.
"네, 이놈! 자꾸 할배 할배 거릴래? 본좌의 나이 서른여덟이다!"
괴한의 호통에 순간 아홉 명의 무인들 사이에서는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미안했는지 서로 눈치만 보다가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살짝 미안한 얼굴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미, 미안. 미안하게 됐수다. 어험. 뭐, 그건 그렇고. 알았으니, 그만 갑시다. 거기 위험해요. 다리도 불편해 보이는 양반이. 어서 이리로 오시오. 위험하다니까."
하지만 괴한은 꿈쩍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더욱 무서운 눈으로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아홉 명의 사내들 한 명 한 명과 눈까지 마주치며 잔뜩 분위기를 잡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본좌가 아무리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하여도, 소림의 천수신권(千手神拳)도 아니고 남궁의 검제(劍帝)나 화산의 검후(劍后)도 아닌 네까짓 것들이 감히 본좌를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괴한의 광오한 허언(?)에 아홉 명의 사내들은 순간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곧이어 허리에 반월도를 찬 무인이 수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 들리는 귓속말 비슷한 것을 했다.
"지지부장, 저 노인네. 아니, 저 인간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더니 진짜 제대로 미친 것 같은데요?"
"휴우."
수장으로 보이는 자, 아니 지지부장은 고개를 푹 숙인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간 화를 삭인 후에야 다시 고개를 들은 지지부장.
얼굴에는 다 삭이지 못한 짜증이 일부 묻어 있었다.
"알았으니 제발 그만 좀 갑시다. 네? 우리도 퇴근 좀 하자고요."
하지만 괴한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더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아홉 사내를 향해 꾸짖듯 호통을 쳤다.
"본좌는 무림맹을 위시한 정파의 개잡종들과 사패천 배신자들의 천라지망을 수도 없이 파훼하였고, 천수신권의 주먹을 박살 내고 창궁검제의 검을 부러뜨렸으며 사악한 화산검후의 검을 아흔여덟 방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고작 그놈들의 사냥개 따위인 네놈들에게 잡힐 것 같더냐? 포기하고 얼른 돌아가라!"
괴한의 입에서 언급된 세 사람은 당금 무림의 정점에 오른 무림오대고수 중 삼 인이었다.
괴한의 말에 결국 지지부장이란 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서른여덟 살이라고 했지? 나 마흔하나니까 말 놓을게. 천라지망이고 천수신권이며 창궁검제, 화산검후 난 이런 거 모르겠고. 아놔,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네 말이 맞아. 실제 우리는 무림맹 무사들이야. 그런데, 야! 아오, 진짜."
지지부장은 화가 또 치밀었는지, 잠시간 거친 숨을 고른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무림맹 절강 태주 지부의 지지부인 촌 동네 삼문현 소속 하급무사들이다. 내가 팔급 무인이고, 얘들은 구급. 뭔, 말인지 알지? 신권이고 검제 맹주님이고 검후고, 저 멀리 다른 세상 이야기하지 말고. 어제 삼해반점에서 먹은 거 은자 한 냥 반. 오늘 석문객잔에서 먹은 거 은자 두 냥. 많이도 처먹었네. 아무튼 도합 은자 석 냥 반. 왜 밥을 먹고 돈을 안 내?"
이때 허리에 반월도를 찬 자가 다시 다 들리는 귓속말을 했다.
"지지부장, 자기들은 도저히 못 잡겠다며 우리한테 저 인간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던 삼문현 현청의 현감 대인 말입니다."
"현감 대인? 왜?"
"우리가 나서기 전에 현청에서 저놈이 무전취식하고 도망가는 거 잡으려다, 포쾌 두 명이 저놈에게 맞아 크게 다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치료비가 빠졌습니다."
"그건 얼만데?"
"꾀병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두당 은자 한 냥씩 주지 않으면 절대 합의를 보지 않겠다고 하던데요?"
"아놔. 이봐, 다 들었지? 도합 은자 다섯 냥 반. 없으면 몸으로 때우고. 한 일이 년 정도 노역하면 될 거야. 좋게 가자고."
괴한은 콧방귀를 뀌었다.
지지부장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냥 그렇고 그런 사냥개가 아니군."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그래?"
"음, 알겠군."
"뭘 알아? 그만하고 가자니까. 해 떨어진다고."
역시나 지지부장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괴한의 얼굴에는 진한 비웃음이 드리웠다.
"너, 무림맹주 창궁검제 그놈의 제자인가? 아니면 그냥 남궁세가에서 비밀리에 키운 수하인가?"
괴한의 말에 지목을 당한 지지부장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는지 대꾸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괴한의 의심인지 추론인지 모를 언행은 멈추지 않았다.
"거기 너. 빡빡이."
지지부장에게서 시선을 뗀 괴한이 이번에는 다른 이를 지목했다.
다른 무인들과 달리 머리를 삭발한 무인이었고, 병기조차 소지하지 않은 적수공권이었다.
얼떨결에 지목을 당한 빡빡머리 무인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너, 빡빡이. 넌 소림사에서 보낸 게 분명해 보이는군. 머리라도 좀 기르고 오지 그랬냐? 천수신권의 제자인 게 너무 티 나잖아. 이 대머리 녀석아!"
순간이었다.
괴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빡빡머리 무인이 괴한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두 명의 무인이 순간 잡지 않았다면, 괴한과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라도 할 듯 화가 난 모습이었다.
"놔! 놓으라고! 내가 오늘 저 새끼 죽이고 뇌옥 간다. 놔! 놓으란 말이야!"
빡빡머리 무인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대머리의 핏대가 터질 듯 울분을 토해 냈다.
"말려. 꽉 잡아."
지지부장이 다른 무인에게까지 명령을 내렸고, 다시 두 명이 더 달라붙어서야 간신히 빡빡머리 무인을 제지할 수 있었다.
지지부장은 이제 머리까지 지끈거리는 모습이었다.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감싸더니 다시 괴한을 향했다.
"이봐, 저 녀석 머리는 아버지를 닮아 유전적으로…… 어험. 이봐, 네 머리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풍성할 줄 알아? 남자들 머리 빠지는 거 한순간이야. 그리고, 에휴. 야! 진짜 선은 넘지 말자. 머리는 건들지 말라고."
"삭, 삭발한 게 아니었냐? 소림사……."
"쫌! 스물한 살 때부터 머리가 빠져서 어쩔 수 없이 주변머리까지 다 밀어 버린 거야. 저 녀석 사흘 전에 짝사랑하는 여자한테 청혼했다가 대머리라는 이유로 차였고. 그런데 네가 그걸 건드려!"
"지지부자아아앙!"
빡빡머리 무인이 이번엔 눈깔이 뒤집혀서 지지부장한테 달려들려고 악을 썼다.
다시 두 명의 무인이 더 달라붙어서야 그를 제지할 수 있었다.
지지부장은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거의 죽을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괴한 역시 남자들 사이에서 불문율과 같이 지켜야 할 선을 자신도 모르게 넘어 버렸다 생각을 했는지, 멋쩍은 얼굴을 했다.
싸한 분위기를 바꾼 건 지지부장의 인내심이었다.
"좋게 갑시다. 거, 바람이라도 강하게 불면 뒤로 떨어져요. 보아하니 사정도 어려워 보이는데, 우리가 아무리 하급이래도 무림맹 무사들이라 입김이 있으니, 최대한 선처를 해 줄 수 있게 말해 볼게요. 네? 갑시다. 위험하게 거기 있지 말고, 이리로 와요."
지지부장이 다시금 괴한을 향해 존대를 했다.
목소리도 한껏 부드러워진 게, 괴한을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멋쩍어하던 괴한은 어느새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지지부장을 바라보았다.
그 분위기와 미소가 꽤 쓸쓸해 보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본좌가 검을 어떻게 휘둘렀고, 어떻게 천하를 발아래 두었는지. 그래도 본좌는 본좌다. 광천마제 마악치가 본좌고, 사패천의 천주가 본좌며, 당금 무림을 천주천하(天主天下)라 불리게 한 장본인이 바로 본좌다. 본좌가 바로…… 당대의 천하제일인이다."
지극현애 절벽의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괴한.
그는 제대로 미친 것인지 아니면 올바른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언뜻 장엄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말만을 남기고 뒤로 눕듯 그렇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지지부장!"
반월도의 사내가 다급히 지지부장을 불렀고, 지지부장이 곧바로 수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추격! 절대 놓치지 마라!"
지지부장을 포함한 아홉 명의 무인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아홉 명 전원은 석 장에 달하는 거리를 뛰어넘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 누구도 거침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깎아지른 듯한 수십 장 높이의 절벽을 이들 아홉 명 전원이 마치 평지를 달리듯 그렇게 무서운 속도로 내달린다는 것이었다.
절대, 하급이라 불리는 무인들이 부릴 수 있는 신법이 아니었다.
그리고 곧.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그들이 조금 전까지 발을 딛고 있던 땅과 다시 그들이 몸을 날려 달리던 절벽.
그 모든 것이 통으로 터져 나가 수백 장 위의 허공과 사방으로 비산하는 폭발이 일어났다.
그날의 폭발로, 태주의 자랑거리였던 용왕산의 지극현애는 완전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 * *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동굴에서 깨어났다.
동굴이 예쁘다.
아니, 멋있다고 해야 하나?
인위적인 동굴이다.
분명 저기랑 저기랑 저기, 아니 곳곳에 사람의 세심한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동굴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난 옷도 입지 않은 알몸 상태이다.
동굴 역시 정성 들여 깎아 놓은 것 치곤 텅 비어 있다.
아니, 있다.
알몸 상태의 내가 존재하고, 내 조금 앞에 돌로 깎아서 만든 작은 석탁(石卓)이 있다.
석탁 위에는 한 권의 책과 한 자루의 붓이 놓여 있다.
아! 도대체 뭐지?
그보다 진짜 나는 누구고, 왜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알몸 상태로 멍하니 동굴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석탁으로 향할 수 있었다.
사타구니 사이에 달린 녀석이 사정없이 덜렁거렸지만, 보는 이는 아무도 없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작은 석탁 앞 돌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사타구니 사이에 있던 녀석이 돌바닥에 닿는 느낌이 시원하고 좋다.
"음, 광마일기(狂魔日記)?"
미친(狂) 마두(魔)가 쓴 일기라고?
웃긴 놈이군.
스스로 일기장의 이름을 미친 마두라 지은 걸 보니.
더 웃긴 건, 원래 이 책자의 이름은 광마일기가 아닌 추혼책(追魂冊)이라는 것이다.
추혼책이라는 멀쩡한 이름에 크게 X자를 쭉 갈겨 놓은 다음, 그 옆에 광마일기라는 이름을 적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책 옆에 놓여 있는 붓도 그냥 붓이 아니다.
길이가 보통 붓의 절반 정도였고, 뚜껑까지 달려 있는 게 휴대용 붓으로 보였다.
붓에 이름까지 적혀 있다.
각혼필(刻魂筆)이라.
꽤 그럴싸하군.
그나저나 설마 내가 이 일기를 쓴 미친 마두 본인은 아니겠지?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기에, 순간 혹시라도 이 일기장을 쓴 것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 볼까? 광마라는 놈이 무슨 일기를 썼는지. 내가 누군지 또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단서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난 그렇게 광마일기의 첫 장을 펼쳤다.
* * *
<<광마일기(狂魔日記)>>
부제 : 대마두가 된 이유
난 광천마제(狂天魔帝) 마악치다.
처음에는 마두(魔頭)라 불렸고, 그다음엔 대마두(大魔頭)라 불렸다.
어느새 사람들은 마두와 대마두의 왕을 뜻하는 대마왕(大魔王)이라는 칭호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마제(魔帝)가 되었다.
사패천(邪覇天)의 천주(天主).
이는 곧 사도(邪道)와 정도(正道) 그리고 마도(魔道)를 모두 발아래에 둔 절대자이자 천하제일인을 뜻한다.
당금 무림을 천주천하(天主天下)라 부르는 이유와 같다.
천하의 주인은 나다.
그리고 난 내 칼로 천하를 그려 나갔다.
셀 수도 없는 많은 이들이 내 칼에 피를 뿌리며 죽어야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려 했던 것은 아니다.
난 원래 착한 아이였다.
내가 대마두가 된 이유는 아주 아주 하찮은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다.
……
(중략)
……
아마도 마지막으로 날 죽이려 했던 아홉 놈들은, 무림맹주인 창궁검제와 소림사의 천수신권 그리고 화산파의 화산검후와 사패천의 배신자들이 비밀리에 키운 제자나 고수들이었으리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화입마의 증상은 더욱 악화되어 정신이 온전치 않았고, 거기에 더해 기존에 입은 치명적인 내상으로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간신히 살아남아 마지막 기회이자 도전을 해 볼 참이다.
실패하면 곧 죽음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더 이상 저들의 추격을 따돌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만약 내가 깨어나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마지막 도전이 성공하게 된 것이다.
현경(玄境).
삼백 년 동안 아무도 오르지 못했다는 그 지고한 경지에 도전하려 한다.
그 벽만 무너뜨린다면, 내가 만약 그 벽을 부수고 현경의 경지에 오른다면.
나는 다시금 천하를 발아래 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해와 누명으로 비뚤어져 버린 내 인생을 바로 잡을 것이다.
* * *
장장 다섯 시진.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광마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안에, 모든 답이 적혀 있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군지.
또 왜 여기에 있는지.
이젠 안다.
내가…… 내가 말이다.
"내가 해냈다. 내가 성공했다고! 푸하하하하!"
내가 바로 광천마제 마악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