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84화 (완결) (183/184)

184화 내가 문장이라면 이 순간은 아마 마침표일 것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분노와 절망을 끌고 다니던 자신의 일상도 이젠 혐오스럽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런 행로가 바로 자신의 삶이었던 것이 저주스럽다고 후회했다.

마치 자신이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정의와 명분을 앞세워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아 보겠다며 설쳐댔던 일들이 미친 짓 같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 사실은 자명하다.

청운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바꾸었는지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자신만 악귀로 바뀐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을 곱씹어 볼수록 성취감보다는 좌절감이 더 큰 것 같았다.

이런 쓰디쓴 비애를 맛보려고 자신이 그렇게 발버둥치며 살았던가,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런 시간을 벗어나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을 바라보자 그동안 자신이 애써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청운의 가슴에 북받쳐왔다.

별빛이 무심하게 점멸할 때마다 청운은 자신이 자신을 온전히 마주했던 순간들이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조차 얼마 만에 마주하는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 * *

강호는 붓 대신 한 자루 검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곳이었다.

붓과 달리 검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의미와 가치도 없었다.

유일하게 있는 것이라고는 타인을 벨 때마다 동시에 베어진 자신의 영혼에 남은 생채기다.

그건 자신이 자신 속의 인간을 포기함으로써 얻은 대가였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원하던 모든 걸 얻는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깊은 회의감이 청운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분노와 성취 그리고 복수.

그 감정들은 기실 여러 가지 합리적 핑계로 자신이 자신에게 던진 낚싯바늘에 불과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자신이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있다고 성현의 말씀을 청운은 청석같이 믿으며 살았다.

자신의 시작을 알면 자신의 운명도 보이는 법이라고, 청운은 믿고 또 믿었다.

과거와 미래, 그 양 차원을 알아야 삶의 방향과 의미도 알 수 있는 법이라고 청운은 자신을 다잡으며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청운은 지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이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강호가 자기 삶에 들어서는 순간 진정한 자신의 삶은 사라져 버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그걸 뻔히 알면서도 복수라는 광기에 사로잡혀 애써 그 사실을 무시하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와버렸다고 후회했다.

도덕과 명분은 지킬수록 처량했고, 명성과 황금은 얻을수록 불편했다.

힘이 강해질수록 삶의 짐도 그만큼 따라서 무거워졌다.

늘 거창한 명분에 중독되어 자신이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명분과 정의감은 가장 심각한 자아도취의 중독일지도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겪은 그동안의 모든 일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득한 꿈속의 헛된 일처럼 느껴졌다.

강호행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했다.

청운은 들뜨고 떠돌고 꿈꾸고 절망했던 강호가 덧없고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바꾸려고 했던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고 거꾸로 세상이 자신을 원하지 않은 자신으로 바꾸고 말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매순간 자신을 착취한 대가로.

청운은 이제부터 자신에게 아무것도 안 하는 보상을 평생 줄 것이라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이제부터 청운은 평생 지겹고 단조로움이 지속되는 삶만을 살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심연처럼 깊은 고요 속에 살다가 물이 증발하듯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기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새들처럼.

별을 바라보며 폐허가 된 마족의 신전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듣고 있자니 인간사의 영욕과 성쇠가 마치 바람 이는 하늘에 별안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뜬구름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을 다 했으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어떤 일도 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누군가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다른 누군가를 무참히 죽였던 자신을 증오했다.

모든 게 의미가 없었다.

소수의 악을 죽여 다수의 선을 살렸다는 그 대단한 명분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자신이 성공이라 생각했던 것은 실상 성공을 가장한 실패였을 뿐이었을지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흘러간 시간 속에는 참담한 회의만 가득했다.

청운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거울을 치우듯 자신의 과거를 잊고 또 잊고 싶었다.

그 어떤 기쁨과 위안 없이 견뎌야 했던 지나간 날들은 끔찍했지만, 이미 지나갔기에, 더 이상 어떻게 바로잡을 수조차 없기에 더 끔찍하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이 경험한 강호의 현실은 목숨을 건 도박판처럼 참혹했고, 이상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허무했다.

물론 가끔은 현실의 엄혹한 표면 밑에 새순처럼 파릇파릇했던 다른 현실도 있기는 했었다.

자신의 모든 힘을 바쳐 자신의 고단한 생을 일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편이 되어 자신만을 믿어준 가슴 떨리는 사람도 만났다.

그녀 같은.

청운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이루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이 이룬 것들과 가능하면 멀어지고 싶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지금 자신이 자신을 재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신랄하게.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 눈이 녹으면 흔적없이 사라지듯 인간의 삶은 그런 것에 불과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인간이 겪은 그 어떤 기쁨도, 슬픔도, 절망도 마찬가지라고.

그 어떤 우수와 애수에도 젖지 않는 모든 것을 비운 무위로 나머지 삶을 살고 싶다고 청운은 간절히 염원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견디고 싶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이제 스스로를 결박했던 모든 시간을 훌훌 벗어버리고 싶었다.

청운은 그동안 자신이 지키려고 했기에 자신을 옥죄었던 모든 것들이 자신을 미련 없이 놓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의 극단적 추구가 가져온 허무하고 허망한 세계가 바로 강호다.

그 무질서가 만든 질서가 바로 강호의 질서다.

청운은 그동안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걸 내주며 강호를 견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자신만의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뒤늦게야 알 것 같았다.

청운은 자신 같은 사람이 강호에 한 사람 더 있든 없든 강호의 현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강호의 패자가 되던 강호의 그런 생리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강호의 가치와 의미는 인간의 탐욕이 만든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 환상을 운명이라 여기며 들뜨고 꿈꾸며 미친 듯이 떠돌다 절망과 나락에 떨어지는 곳이 바로 강호다.

깨어진 것들은 깬 사람의 의도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날아가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상처 입은 자들은 괄호를 치듯 자신을 상처 안에 가둔 채 복수를 꿈꾼다.

그것이 또한 강호다.

그 상처를 망각하지 못해 극복하려는 의지와 용기조차 때로는 그 상처를 덧나게 하기 일쑤다.

그게 상처의 본질이다.

그래서 강호엔 늘 피가 흥건하다.

그 상처를 지우기 위해 했던 더 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과 결심은 자신을 지독한 괴물로 만들어 강호를 피에 젖게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더 잔인한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강해진 자신이라고 믿었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그동안 자신은 온전한 기쁨은커녕 온전한 슬픔과 고통조차 누릴 줄 모르는 괴물의 삶을 살았다고 후회했다.

청운은 자신의 강호행이 고작 그런 것이었다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나마 이제 강호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물론 청운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완벽하게 다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호의 일이란 원래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래도 힘없는 약자들을 살벌하고 험악한 세상에서 지켜내고 싶었고 그렇게 살았다고 청운은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거꾸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걸어온 혈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이 시대에도 강호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시대를 거스른 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이 잠시나마 강호인의 뇌리에 각인되었으면 하고 청운은 바랐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감상적 탐욕일지도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강호가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더라도, 그 기억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점차로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사라질 덧없는 것일 뿐이라고 청운은 자신의 헛된 욕망을 나무랐다.

개인은 영원히 시대를 이길 수 없는 것일까?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 속으로 자신의 검 아래 죽어간 무수한 사람의 비명이 차디찬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는 것 같은 전율을 청운은 느꼈다.

뜨거운 눈물을 차갑게 식히는 얼음처럼.

청운은 자신이 강호에서 완전히 잊혀질 수 있는 방법을 간절히 알고 싶었다.

더 이상 그 누구와도 엮이지 않는 절대고독의 세계로 침잠하고 싶었다.

아무런 욕망도 목적도 없이.

청운은 양팔을 최대한 벌리고 자신의 가슴으로 쏟아지는 별빛을 모두 받아 앉았다.

그러자 금세 시작도 없는 끝이 이미 자신을 다 살아버린 것 같았다.

까닭 모를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뒤섞인 눈물이 은하수에 밀린 별빛처럼 눈시울을 적시며 반짝였다.

청운은 멀고 먼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볼수록 강호라는 세상은 이해할 수도, 이길 수도 없는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자리 하나가 몰락해도 절대 흔들리는 법이 없는 하늘처럼.

뜬금없이 청운의 뇌리에 서당의 학동이었을 때 배울 시(詩)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 시(詩)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흘러가는 것은 저 장강과 같으나 영영 가버려 없어진 적이 없고

차고 기우는 것이 저 달과 같으나 결국 아예 없어지거나 더 늘지도 않았으니

천지는 한 순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변하지 않는 관점에서 보면 만물과 내가 무궁하다네.

그런데 또 무엇을 부러워하겠는가.

오직 강가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만은

그것을 내 귀로 들으면 음악이 되고

내 눈으로 보면 그림이 되는 것을.

—소동파의 적벽부—

소동파의 시(詩)를 생각하던 청운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강호를 떠나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고 온 것들이 자꾸 떠올라 나를 끊임없이 부를 것이다.

강호와 은원은 내가 가장 먼저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이지만 이미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담겨 있기에, 그것은 내가 강호를 떠나도 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천형 같은 것이다.

내가 떠나왔으나 내 안에 담긴 그 강호가, 그동안 나를 만들었던 바로 그 강호가 끊임없이 자신을 그리워하며 내 속에서 울부짖을 것이다.

익숙하기에 진저리쳤고, 떠나야만 살 것 같기에 지금 떠나지만, 한동안 내가 버린 강호가 그립기 그지없는 내상이 되어 나를 엄습할 것이다.

내가 떠난 그 강호는 내가 매일 먹었던 음식처럼, 내가 매 순간 호흡했던 공기와 냄새처럼, 내가 잊어야 하는 수많은 얼굴로 불쑥불쑥 내 삶에 출몰해 나를 거꾸러뜨릴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무엇도 그리워하지 않기로 단호히 결심하지만 바로 그 결심 때문에 나는 다시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자신을 잊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고 싶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 또한 애써 누군가를 알 필요가 없는 곳으로 당장 들어가고 싶다.

내가 나를 잊을 수 있는 망아산장(忘我山莊)으로.

내 심장 속에 둥지를 튼, 내가 강호에서 만났던 수많은 아픈 얼굴들도 때가 되면 하나둘 둥지를 버리고 이소(새가 자라서 둥지를 떠나는 것)를 할 것이다.

한동안은 여전히 내 심장 깊은 곳에서 그들이 자꾸 내 이름을 나직하게 부를 것이다.

아직은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이제부터 나는 이 지긋지긋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없애는 것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바뀌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변화의 가능성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생길 것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

내가 간절히 보고자 하는 세상은 더 이상 내게는 필요 없다.

이제 나는 나조차 필요 없는 세상으로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오늘, 여기, 이 순간의 나는 다시 원래의 나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온 길보다 더 먼 길을 떠나야 한다.

나도 믿지 못하는 내 발길을 믿고서.

나의 강호행은 얼마나 먼 여정이었던가?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의 하늘은 내가 집을 나설 때의 바로 그 하늘이다.

나의 여정은 제 자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돈 셈이었다.

나의 강호행은 하나의 잘못된 서사일 뿐이었다.

내가 문장이라면 이 순간은 아마 마침표일 것이다.

오늘 밤 무수한 별이 뜬 이유가 오늘 아침이 되기 전 무수한 별이 졌기 때문인 것처럼.

잊자, 모든 것을 잊자.

잊는 것 또한 배우는 것이고 성장하는 것이다.

망각 또한 강호다.

나도 모르게 언제 나에게 왔다가 가버린 간절한 꿈같은…….”

청운은 자신 뒤에 남은 사람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의해 갑자기 끊어진 눈물 한 방울이 반짝이는 별이 되어 그의 눈시울을 몇 바퀴 굴러 깊은 밤 속으로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도비검무(刀飛劍務)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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