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세상에는 그 누구의 삶도 안타깝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그들 마족의 삶 또한 마찬가지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중원에 대한 증오, 분노, 살의, 절규, 좌절, 혼돈이 오늘의 마족을 만들었기에 따지고 보면 저들 또한 그 피해자다.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죄는 마땅히 응징해야 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를 적대시해선 안 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인간은 원래 바보이면서 영악하고, 악귀이면서 성자이고, 모질면서도 자비롭고, 관대하면서도 악독하고,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고,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는 이중적 존재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누군가를 무조건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일부만을 보고 전부를 못 보는 것일 따름이다.
인간의 내면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복잡하다.
인간의 삶은 제아무리 거창하게 요란 떨어봤자 태어나고, 먹고, 자라고, 자식을 낳고, 늙고, 아프고, 죽는 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그 과정이 너무 빤하고 슬프기에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발명한 것일 뿐이다.
가문, 문파, 관직, 황금 그런 것들로 자신의 삶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치장하고 분칠해도 그건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아니 자신의 삶을 그런 것들로 치장하면 할수록 분칠하면 할수록, 그건 오히려 자신의 삶이 더 그렇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인간의 몸속에는 여태껏 자신이 먹은 밥, 자신이 살면서 당한 차별과 원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자신이 쌓은 업으로 가득 들어 차 있다.
자기 스스로 무슨, 성인이네, 현자이네, 의인이네, 협객이네 하는 것들도 알고 보면 모두 자신과 세상을 속이며 사는 위선자들일 뿐이야.
그런 치들보다는 차라리 황금을 보면 못 가져 안달하고, 예쁘고 잘생긴 여자를 보고 어쩌지 못해 몸이 달고, 다른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권력과 힘을 갖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기도 하다.
왜 인간들은 이 땅에 잠시 살다 갈 뿐인 하찮은 존재인 줄 모르고 신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다고 해서 영원히 높은 곳에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왜! 왜!
청운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속으로 절규했다.
하긴 죽어서까지 그렇게 바닥으로 내려오는 걸 못 참아 어떤 놈은 수많은 사람의 생목숨을 희생시켜서라도 거대한 동상과 어마어마한 무덤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봤자 그 거대한 동상에는 지나가는 새똥이 쌓일 뿐이고, 그 어마어마한 무덤은 더 쉽게 도굴당할 뿐이다.
모두 미친 짓이다.
하긴 그렇게라도 미쳐야 자신의 슬픈 삶을 견딜 수 있다고 우기면, 그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인간이 보기에 신들은 영원히 웃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그들도 인간이 떠받들지 않으면 더 이상 신이랄 수도 없다.
백성이 있기 때문에 황제가 있듯이 인간이 있기 때문에 신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武)가 아니라 무(無)야 말로 진정한 신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번지는 노을에 밀린 구름이 어두운 밤을 향해 시체처럼 떠내려가고 있다.
서쪽을 벌겋게 물들이는 노을이 죽은 자들의 마지막 눈시울 같다.
이제 그 누구도 여기서 죽은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
누가 이 슬픈 문을 닫아 줄 수 있을까.
사람들은 타인의 무덤 위에 자신의 무덤을 쌓는 것이 제 삶인 줄 왜 모르는 것인가?
강호의 겁난은 항상 일정한 주기를 두고 되풀이되곤 한다.
모든 문파가 자신들의 이익 추구에 혈안이 되어 강호 전체를 도외시한 채 서로 죽이고 죽는 이전투구를 벌일 때 어김없이 겁난이 닥쳐왔다.
하지만 강호가 제정신을 차린 순간은 딱 그때뿐이었다.
겁난이 지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서로를 물고 뜯는 악다구니를 연출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강호의 역사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그게 강호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청운은 그런 혼돈의 강호에 다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인간적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그래도 하늘에 거하고 있는 신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함께 공존해야 하는 이 땅의 사람뿐 이라고 믿고 싶었다.
처참한 상황을 둘러보던 청운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등 뒤에서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행렬이었다.
자신의 문파와 세가를 상징하는 커다란 깃발을 펄럭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도착은 한편으로 반가웠으나, 다른 한편으론 불편했다.
삼계가 열리지 않도록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그들의 생각은 가상하나, 이참에 자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강호에서 자신들의 지분이 없어질까 두려워 다 차려진 밥상에 제 숟가락을 얹겠다는 생각은 경멸스러웠다.
그들은 이 일이 마무리되면 틀림없이 논공행상을 벌이며 자신들의 지분을 두고 다툴 것이다.
자신들 문파나 세가의 의지가 뜻대로 관철되지 않으면 다시 자잘한 물길처럼 갈라져 목숨을 걸고 서로 검을 맞댈 것이다.
늦은 오후의 하늘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청운은 잔인할 정도로 무심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청운은 뭐가 뭔지 모르겠고 분간도 안 가는 상황에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깊은 무력감에 빠진 것 같다고 느꼈다.
이제 모든 걸 잊어야 하는 데 잊을 수 없을 것 같았고, 상처를 벗어나려고 할수록 그 상처에 더 갇히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옳은 일이라고 행한 일들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이제 확신마저 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옳은 일이라고 그 하나의 이유로 걸어온 이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이었는지도 의심이 들었다.
사실 삶에는 의미가 없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 건 그냥 되는 대로 살 건 그 결과는 동일하다.
결국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은 똑같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허무한 삶에 필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문이니 문파니 하는 것들은 모두 그런 허무의 부산물일 뿐이다.
때론 절망과 좌절에 빠져 몸부림치고, 또 때로는 황홀경에 빠져 삶을 송두리째 바쳤던 그 열정으로 산다고 살았던 게 과연 잘 살았던 게 맞는 것인지를 청운은 회의하고 또 회의했다.
바로 그때 먼발치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여섯 필의 말이 보였다.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청운의 십여 장 앞에서 말을 멈추고는 말에서 뛰어내려 청운에게로 다가왔다.
가운데 있는 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청운에게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태사령님, 어명이 당도 했습니다.”
어명이라는 말에 청운이 부복하자 그자가 두루마리를 펼치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당금 황실과 나라의 겁난을 일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태사령 강청운을 태령왕(太嶺王)에 봉하고 안휘현 여령산 주변 백 리를 영지로 하사한다.”
두루마리를 다 읽은 관원들이 돌아가자 맹주 사마휘가 청운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맹주 사마휘가 청운에게 말했다.
“대협이 강호에 남긴 일보일보(一步一步)가 전부 거보(巨步)가 되었소. 그래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중지를 모아 무위검 헌정 무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청운 덕분에 무림맹에서 자신을 견제하던 껄끄러운 노인들을 몰아낸 맹주는 드디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한 행보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청운은 지배자의 이름이 아무리 바뀌어도 권력이 있는 곳엔 자유가 발붙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맹주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무림대회의 명칭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앞으로도 내 이름을 건 어떤 무림대회도 불허한다고 청운은 맹주에게 명확히 말했다.
그 순간 맹주의 표정은 떫은 감을 씹은 듯 떨떠름했다.
십만대산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지상의 참혹함을 서서히 지우고 있었다.
어둠은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늘에 달과 별을 띄우고 있었다.
지상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는 청운의 눈 속에 죽은 자에 대한 연민이 차디찬 별빛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저 무수한 별들 속에 자신의 별도 반짝이고 있을까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는 이 대로 잠들었다 깨어나면 이 모든 사태가 하룻밤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서로 모순되는 무수한 생각이 별빛처럼 몰려왔다.
강호행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시작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전혀 원하지 않는 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상한 곳이 목적하지 않은 목적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달고 맵고 짠 지난날들이 자신의 입안에서 모래처럼 버석거리는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강호는 모든 것을 힘으로 판가름한다.
심지어 잘못마저도 힘으로 짓뭉개면 그만이다.
그래서 강호의 모든 개인과 집단은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경쟁을 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경쟁은 이겨도 실패고, 지면 지옥이다.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힘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그런 방식은 서로가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오직 힘으로 누군가를 억누르고 해치는 강호는 반드시 다른 강호로 바뀌어야 한다.
자신이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가 못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이런 강호를 다른 강호로 바꾸어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래야 모두가 상생할 수 있다.
진정한 강호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지옥이 아니라 서로가 상생하는 인간다운 세상이어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눈에 빤히 보이는 것을 오히려 보지 못하고, 손에 확실히 쥐고 있기에 오히려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강호인들은 자신이 바로 그런 강호에 속해 있기에 강호의 그런 살풍경을 오히려 모른다.
아니, 당연하게 여긴다.
삶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바뀔 때마다 청운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죽여야 했다.
그때마다 원래의 자신도 죽여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에 에 대한 신의 심판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이제는 숨 쉬는 공기처럼 되어버린 누군가를 죽이는 강호가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청운은 몸서리쳤다.
이기고 졌는지에 따라 기분이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복수라는 미명하에 무수한 살인을 저지르는 자신을 제지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걸어온 길마다 너무 많은 누군가의 주검이 있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