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세상의 첫 시작과 마지막 끝을 보는 것 같았다.
그 틈새는 현세가 삼계와 연결되는 통로 같았다.
이계의 공간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져 나온 알처럼 생긴 것들이 계속된 변태를 통해 난생처음 보는 흉측한 괴물로 둔갑하고 있었다.
징그럽고 혐오스러웠다.
알은 금세 이차원의 벌레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삼차원의 날아다니는 괴수로 변신했다.
알과 벌레 상태에서는 없었던 괴이한 눈과 흉측한 이빨과 징그러운 혀가 괴수 상태가 되자마자 순식간에 돋아났다.
악몽을 꾸듯 세포 같은 괴물의 변태가 신기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징그러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생경하고 혐오스러운 이질감이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 괴수의 변태는 삼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악의 힘과 형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것들이 그걸 직접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변태를 마치자마자 공중으로 날아오른 괴수와 괴물들은 정교한 눈과 더듬이로 자신들의 먹이인 인간을 순식간에 감지하고 덮치기 시작했다.
번뜩이는 거대한 이빨과 날름거리는 긴 혀로 시공간을 찢고 핥으며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도래한 것 같았다.
그동안 세상을 세상이라고 인정하고 규정했던 모든 상식과 질서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마계, 명계, 요계, 삼계를 돌아 나온 핏빛의 안개들이 스멀거리며 시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핏빛의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악귀의 형상이 사람들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 핏빛 안개에 접한 사람들은 영혼이 바뀌듯 그들의 몸과 얼굴이 악귀의 형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죽음이 눈을 뜨고 있었다.
사람들의 살과 피가 순식간에 붉은 안개로 변해 시공간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막아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삼재구를 꺼내기 위해 막 왼손을 품속에 집어넣으려고 했을 때 두 사람이 청운을 덮쳐왔다.
그들의 무위가 엄청났다.
그들은 바로 파황군, 아니 병필태감과 귀비였다.
틀림없이 자신에게 당해 무공을 상실했는데 그새 무공을 회복하다니, 아니 전보다 한 단계는 더 강해진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파황군, 아니 병필태감이 분노에 가득 찬 일갈을 터트렸다.
“네 놈이 기어이 이곳까지 쳐들어와 천제(天帝)님이 주관하는 신성한 제의에 초를 치는구나. 내 오늘은 기필코 네놈을 죽이리라.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저 알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이 바로 마족의 깨달음인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운은 속전속결을 선택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즉시 ‘멸환겁’을 전개했다.
병필태감과 귀비는 청운의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두 마디 처절한 비명과 동시에 피륙이 되어 투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아예 그들의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후천개벽(後天開闢), 광제창성(光霽昌盛), 후천개벽(後天開闢), 광제창성(光霽昌盛).
지—요—마—경—문—명—곤—계—
후천개벽(後天開闢), 광제창성(光霽昌盛), 후천개벽(後天開闢), 광제창성(光霽昌盛).
지—요—마—경—문—명—곤—계—
나, 천제(天帝)가 내 선택을 받은 백성에게 말하노라.
천계의 위대한 천신이었던 내가
내 자리를 찬탈한 자의 지독한 저주로
삼계의 땅에 떨어지고 말았도다.
그때부터 나는 수억 겁의 시간을
분노와 증오를 먹고 살았도다.
이제 나는 스스로 결박했던 시간을 벗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다른 나로 바꾸어도
너희들은 절대로 놀라거나 도망치지 마라!
나는 바로 너희의 시작이고 시원이다.
나는 너희의 원래의 모습이다.
네 내면에 가득한 분노이고
증오이고
혐오이다.
너희는 지금 너희의 원천으로 돌아오고 있다.
겁먹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망설이지 말고 너를 활짝 열고 나를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에게 나의 힘을 줄 것이다.
현현하라.
삼계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과거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왕국을 만들어라!
억압받고
예속되고
차별받고
속울음 삼키던 날들을 떨쳐내고
분연히 일어나라.
일어나라!
나의 아들과 딸들이여!
우리를 핍박하던 낡은 세계는 곧 사멸하리라!
이제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나의 아들과 딸들이여!
나를 믿고 삼계의 신성한 땅을 침입한
저자들을 모두 말살하라!
그 후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우리의 나라로 가자!
그새 제단에서는 천제라는 자가 더 크게 주문을 외우며 삼계를 완전히 열기 위해 기괴하고도 필사적인 몸짓으로 이상한 춤사위를 추고 있었다.
청운은 더 이상 삼계가 열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거리가 다소 멀었지만 우선 제단부터 파괴해야겠다고 작심을 했다.
그래야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 즉시 청운은 제단을 향해 양팔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치우환으로 극한의 멸환겁을 전개한 것이다.
청운의 양 손목에서 투명한 자황색의 거대한 환이 신(神)의 섬광처럼 번쩍했다.
오! 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이 장내에 펼쳐졌다.
오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던 제단이 종잇장이 찢어지듯 수천 수백 조각으로 찢어졌다.
제단 위에서 괴이한 춤을 추고 있던 천제도 갈가리 찢어져 형체도 남지 않았다.
이제 청운의 무위에 더 이상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제단을 박살 낸 청운은 품속에서 삼재구를 꺼냈다.
청운은 <극황지감술>로 근육의 감각을 최대한 일깨우고 신경의 감각을 최대한 고조시켰다.
‘신체적 극’과 ‘정신적 극’이 서로 완벽하게 통하고 일치해야 삼황과 삼십육 신장의 온전한 힘을 끌어낼 수가 있다.
그것은 오감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상실했던 다른 감각들까지 모두 되살려야 가능한 것이다.
그건 자신의 몸을 태어나기 이전의 세속의 탁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원형지체로 되돌릴 때에나 가능한 지고의 경지다.
청운은 삼재구에 치우전륜공의 서기와 전륜의 빛을 극한으로 주입하며 삼황과 삼십육 신장을 소환하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청운은 삼황과 삼십육 신장을 불러내는 주문을 걸며 신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자신에게 전적으로 집중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일월성진(日月星辰), 성휘만천(星輝滿天), 능조천하(能照天下).
일월성진(日月星辰), 성휘만천(星輝滿天), 능조천하(能照天下).
한순간 삼재구에서 이 세상의 빛이 아닌 것 같은 영롱한 서기와 영기가 번쩍하며 주변의 시공간을 뒤흔들었다. 세상의 첫 시작과 마지막 끝을 보는 것 같았다.
삼재구의 빛이 닿는 곳마다 핏빛의 안개가 사라지고 맑고 투명한 자연의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하는 맑고 청아한 소리와 함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괴수와 괴물들이 나타날 때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다시 벌레가 되고 알이 되더니 나타났던 구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유명불이(幽明不二).
즉 삶과 죽음, 어둠과 밝음, 이승과 저승이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옥은 언제나 이승에 존재했지 단 한 번도 저승에 존재한 적은 없었다.
아니, 도저히 이승을 견딜 수 없는 누군가가 저승에 있는 지옥을 이승으로 불러냈다.
저승은 이미 지옥이니까 따로 지옥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에 태양과 달은 다시 하나로 하늘에 떠올랐고, 핏빛의 안개 대신 따뜻한 봄빛이 내리쬐었다.
시원한 바람이 지친 사람들의 이마를 매만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명계, 요계, 마계의 사기와 요기 그리고 마기가 일부 새어 나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악의 기운에 물든 누군가가 또 악의 집단을 만들어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다.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다 자잘한 전쟁도 일어날 것이다.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역병이 번지고,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도 출몰해 힘없는 양민의 삶을 더 힘들게 할 것이다.
그걸 견디지 못하는 또 다른 의기 있는 누군가가 그걸 막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걸 것이다.
그건 그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그게 또한 세상사다 하고 청운은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청운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
파사와 퇴마의 묘법을 기록한 <환서>를 찾기 위해서다.
수거해 무영문에 보관할 생각이었다.
대전 바닥에 고리가 달린 석판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지하의 규모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온갖 무기들이 구비된 무기고도 있었고, 무공서적과 술법 서적도 석실 하나를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가서 득이 될 것이 없다는 생각과 곧 들이닥칠 무림인들의 탐욕을 믿을 수 없다는 판단에 청운은 닥치는 대로 삼매진화로 태워버렸다.
<환서>는 마지막 석실 금고에 있었다.
<환서>를 갈무리한 청운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곳곳에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 무수한 단말마의 비명, 자신의 심장을 토해내는 것 같은 악다구니 소리.
모든 일이 마무리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하늘에 두 눈을 박고 그 소음을 들으니 모든 것이 부질없고 또 부질없는 것 같았다.
그의 깊은 눈빛이 빈 하늘에 뭉게구름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난 풍경을 둘러보던 청운은 모든 것이 망가지고 타버린 폐허에서 재를 뒤적이는 기분이었다.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마족의 신전과 전각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없는 무수하게 널브러진 시체와 시체를 태우는 냄새.
불과 재와 상실의 시간이었다. 멋모르고 이곳에 먼저 들어섰던 사람은 무생물이 되어 이곳저곳 널브러져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타오르는 한쪽 구석에선 소림사 승려들이 빙 둘러서서 죽은 사람들을 위한 구병시식을 하고 있었다.
출렁이는 노을을 헤쳐 밟으며 청운은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승 속에 저승이 펼쳐졌던 바로 그곳에는 처절한 비명과 울음마저 뚝 그친 정적과 적막만이 시체를 태우는 메케한 연기와 함께 사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보면 보이던 무수한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들으면 들을 수 있던 그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누구는 살았고 누구는 죽었다.
금군은 채 삼분의 일도 살아남지 못했고, 무림맹 토벌대도 반 이상이 죽은 것 같았다.
청운은 자신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곳에서 마족들은 중원에 대한 불신과 불만, 불안과 두려움, 고착화된 불평등과 불공정을 뿌리 깊은 미신으로 만들었었다.
그것을 자양분으로 수천 년간 저곳에서 저주의 힘을 키웠다.
자비 없는 압도적 공포가 그들의 가장 강한 무기였다.
악이 그토록 잔인한 이유는 사람들이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그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체념과 절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악의 공포와 두려움은 늘 사람들이 희망과 기대를 상상할 수 없도록 절망과 체념을 더 크고 깊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