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길고 긴 영겁 같은 찰나가 그렇게 지나갔다.
뼈와 살을 모조리 태우는 불길을 빙하기로 근근이 한나절 정도를 버티던 청운이 어느 순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청운은 쓰러지면서 이것이 자신의 한계인가 하고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대붕이 청운에게 날아내렸다.
대붕은 쓰러진 청운의 입을 부리로 벌리고는 하얀 우윳빛의 타액을 흘려 넣었다.
일각 정도 지나자 청운은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는 다시 빙하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한나절을 사투하던 청운이 스러지자 다시 대붕이 부리로 청운의 입을 벌리고 우윳빛 타액을 흘려 넣었다.
청운은 세 번 쓰러졌고 대붕도 세 번 그렇게 청운에 타액을 흘려 넣어 청운을 다시 살렸다.
그 세 번을 마지막으로 대붕은 하늘로 솟구쳐 사라졌다.
용광로 속 같은 뜨거운 시간이 얼마나 그렇게 흘렀을까.
어느 순간 청운은 자신의 몸과 영혼 속 하나의 점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거대한 불덩이가 아득한 시공간을 넘어 무수한 성운과 성좌로 회오리치며 뻗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감싼 채 휘도는 불길이 그동안 자신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었던 불안과 무기력과 두려움까지 모조리 태워버리는 것 같다고 청운은 느꼈다.
오랫동안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체되어 있던 자각과 각성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느낌을 청운은 받았다.
어느 순간 청운은 자신이 우주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청운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모든 것과 연결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잠에서 깨어 광대한 우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자각과 각성의 충만함이 자신의 영육에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청운은 새로운 깨달음의 차원을 음미하고 있었다.
진정한 깨달음은 자신이 성취할 어떤 최종적 목적이나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 진행 과정에만 최선을 다할 때 간신이 얻어지는 것이라는 자각이 일었다.
진정한 깨달음은 자신이 미리 정한 목표에 맞추어서 어떤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과정이었다.
삶의 진정한 의미가 삶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진정한 깨달음은 어떤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자신을 갱신하는 것이란 걸 청운은 알아챘다.
이미 정해져 있는 우주나 자연의 질서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그 질서의 방향성을 이해하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만큼 그 힘을 이용할 수는 있다는 것 청운은 알았다.
그 정도가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기 몸에 맞춰 근육 하나를 키우는 것과 흡사하다.
자신을 지각하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그에 따라 자신의 존재 자체도 바뀔 수 있다고 청운은 느끼고 있었다.
한계.
청운은 자신이 가진 영육의 한계가 끝없이 넓어지며 커지는 걸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상상하는 대로 몸과 마음도 따라서 자라나는 것 같았다.
그가 자라나는 그 공간은 시공간을 초월한 순수한 우주의 근본 그 자체였다.
우주와 감응한 그 기운은 시공간은 잊게 하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마저 잊게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도 깨달았다.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은 따로따로 제각각 자신의 형태와 영혼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간섭하며 서로를 촉발하는 관계였다.
광활하고 무궁한 절대고독의 시공간을 가득 채운 성좌와 성운이 아득한 어둠 속에서 한순간 눈을 번쩍 뜨는 것 같았다.
깜깜하고 고요한 우주의 진동 속에서 청운은 자신이 오매불망 꿈꾸던 진정한 무위가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별들이 칠흑의 어둠 속에서 눈을 뜨듯 고요하고 적막한 우주의 파동 속에서 청운이 꿈꾸었던 진정한 무위가 꽃이 만개하듯 피어나고 있었다.
때로는 밝고 때로는 어두운 우주의 빛과 적막이 청운의 전신을 감싸고 돌며 광휘를 뿜어내고 있었다.
진정한 무위는 텅 빈 우주처럼 상황에 따라 땅과 하늘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 것이라고 청운은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었다.
그것은 마음속에서부터 만들어진 흔들림 하나가 우주의 진동과 파장이 만나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것은 텅 빈 우주 속을 영겁으로 떠돌던 성운과 성좌가 한순간 조화를 이뤄 빛을 발하는 경이로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연의 에너지가 일순간의 조우로 만든, 찰나가 영원이 되고 영원이 찰나가 되는 성스러운 조화의 상태였다.
청운은 자신을 잊는다는 생각 속에 있는 자신까지 잊은 상태였다.
청운이 자신마저 잊은 그 빈자리에 자신이 상상도 못했던 깨달음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청운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며 자신만의 숨을 쉬었다.
우주를 이해하듯이 청운은 자신의 영혼과 삶을 이해했다.
바로 이 순간 이 우주에 자신을 호흡하고 느끼는 건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청운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감각과 정신이 지각하지 못하는 우주는 더 이상 없다고 청운은 느끼고 있었다.
청운은 지금 자신의 무위검이 시작된 곳에서 무위검의 극의를 깨닫고 있었다.
청운은 균형과 조화와 꽉 참과 텅 빔이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진정한 무위는 일부러 채우는 것도 비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텅 비워진 영육의 모든 곳에 상황에 따라 저절로 꽉 들어차기도 하고 텅 비워지기도 하는 조화였다.
진정한 무위는 꽉 차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것은 텅 빔이 꽉 차는 것이고 꽉 참이 텅 비어 있는 상태다.
그 텅 빔과 꽉 참의 조화가 바로 무위의 원초적 힘이었다.
무위는 스스로의 판단과 자성에 의해 저절로 일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었다.
영과 육 그리고 자연과 우주가 하나로 어우러진 무위의 검.
무위검은 검법을 전개할수록 증오와 분노와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돋우는 검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잦아들게 하고 가라앉히는 것임을 청운은 깨닫고 있었다.
청운은 이제 자신의 검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땅을 들어 올려 하늘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고, 하늘을 끌어내려 땅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청운은 자신의 모든 생각 자신의 검이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이제부터 자신이 믿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면 자신의 검이 알아서 모든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청운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곳에 자신의 검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길고 긴 영겁 같은 찰나가 그렇게 지나갔다.
어느 순간 청운이 눈을 번쩍 떴다.
청운의 눈에 그가 깨달은 깊디깊은 우주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성운과 성좌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청운은 가만히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대략 칠일 정도가 지난 것 같았다.
이달 그믐까지 청해성 끝자락에 있는 청해호(靑海湖)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떡 일어난 청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곤과의 사투로 인해 주변의 모든 곳이 온통 폐허로 변해버렸다.
연못은 이미 연못이 아니었고 호리병 모양의 분지가 무너지지 않은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과 자연은 이런 폐허 위에 또 다른 꽃을 피워 이곳을 또 다른 낙원으로 만들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틀림없이.
청운은 죽어서 널브러져 있는 적곤을 바라보았다.
다른 곤(鯤)과의 영역 다툼에서 패퇴해 자신의 고향인 북해에서 쫓겨나 대붕이 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이곳 선하령 계곡에서 분노의 화신으로 살다 내단까지 빼앗기고 죽은 적곤의 일생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곤의 가죽과 뼈들은 바깥세상에선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세에 둘도 없는 귀물(貴物)이다.
하지만 청운은 그것까지 건드리기는 싫었다.
청운은 널브러진 적곤을 향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에게서 뺏은 그 힘은 이 세상을 위해 쓰도록 하겠다.”
그 혼잣말을 마지막으로 청운은 동굴을 통과해 계곡 입구로 갔다.
청운은 자신이 계곡으로 내려올 때 사용했던 노송의 가지 하나를 주워 허공으로 던진 후 곧장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청운의 신법은 한 줄기 섬전 같았다.
단 한 번의 도약과 중간에서 노송의 가지를 살짝 밟는 단 한 번의 발 구름으로 거의 이백여 장이나 되는 건너편 계곡에 청운은 가볍게 착지했다.
만일 누군가 청운의 신법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커다란 야조(夜鳥)로 착각했을 것이다.
* * *
약속을 정한 당사자가 약속에 늦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청운은 약속 장소를 향해 전력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다행히 그믐 하루 전에 약속 장소인 청해호(靑海湖) 주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거의 청운이었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속도였다.
자신의 경신술이 곱절은 더 빨라진 것 같다고 청운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과거와 달리 별로 피로도 느끼지 않았다.
청운은 마지막으로 들른 객점에서 점소이에게 은자 한 냥을 건네면서 무림인들의 무리가 어디로 향해 갔는지를 물었다.
점소이가 청해호라고 말했다.
청해호는 광대했다.
이런 높은 고지대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것도 민물이 아니라 바닷물처럼 짠물인 것이 더 신기했다.
청해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봉에 오른 청운은 안력을 돋우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자신이 서 있는 호수 맞은편 분지에 상당한 규모의 천막이 보였다.
백여 개가 훨씬 넘는 것 같았다.
쭉 늘어선 모양이 마치 군막을 친 것 같았다.
천막마다 누런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바람이 심해 글자를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으나 무림맹의 깃발이 분명했다.
청운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청운은 보초를 서고 있는 무사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맹주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청운이 신분을 밝히자마자 주변에서 여러 명의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청운을 향해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청운도 일일이 포권을 취하며 응대했다.
가벼운 소란 속에서 승포를 입은 삼십 대 후반의 스님 한 분이 청운에게 다가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무이검 대협을 뵙습니다. 저는 소림의 현각이라 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