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76화 (176/184)

176화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또 누군가의 무수한 생이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에는 승리가 없다.

모두가 패배한다.

전쟁은 이기고도 지는 것이다.

전쟁에는 인간다운 인간도 없고 정의로운 심판도 없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이 정도의 평화조차 과거의 무수한 전쟁을 통해 얻은 반성 위에 간신히 이룩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은 과거의 무수한 전쟁에서 무고하게 죽은 무수한 희생자의 죽음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살았었거나 살아가고 있는 모두는 과거 전쟁의 참혹 속에서 혈육과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고 공포에 벌벌 떨면서도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후손들이다.

그 공포와 참혹으로부터 다음 세대만은 반드시 지켜내고 말겠다는 필생의 의지를 품었던 부모들의 자식들이다.

하늘에서 저절로 굴러 떨어지는 평화란 없다.

그 어떤 평화도 이곳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누군가의 절실한 염원과 노력 덕분에 이룩된 것이다.

자신들만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한족들이 다른 민족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않는 한, 이런 참혹은 계속될 것이다.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타인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한족이 마족을, 마족이 한족을 서로 존중하고 배려했다면 이런 비극은 애당초 잉태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바라는 영웅은 무력만 앞세운 무지막지한 사람도, 권모술수에만 능한 수완가도 아니다.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영웅에 대한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의 영웅은 다른 종족의 땅을 정복하고 영혼을 짓밟아 그 피의 강물에 제 그림자를 드리워 군림하는 그런 자가 아니라 타인의 목숨과 삶도 자신의 것처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가슴 따뜻한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폭력과 억압으로 타인을 핍박하는 사람은 절대 변화한 시대에 어울리는 영웅이 아니다.

진리로 암흑을 밝힐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다.

* * *

따스한 바람이 모든 곳에 시나브로 봄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매일 매 순간 새 생명이 움트는 저 땅과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저 생기로 가득 찬 대지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이 제 삶을 기대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가야만 할, 삶의 토대이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과 재앙으로부터 저곳을 지켜내야만 한다.

청운은 황궁을 나올 때 천리신개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나 했다.

그리고 하오문에도 명령을 내렸다.

곤륜선인과 마련의 제혼마검 그리고 무림삼괴에게 자신이 서찰을 꼭 전달해달라고.

서찰의 내용은 단순한 것이었다.

이달 그믐까지 십만대산으로 가는 길목인 청해의 끝자락에서 자신과 만나자는 것이었다.

청운은 천리신개와 하오문 총사 하여빈에게 자신의 서찰을 전달한 후 곧장 대파산의 선하령 계곡으로 향했다.

삼재구(三災球)로 삼황(三皇), 즉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과 삼십육 신장(神將)의 힘을 온전히 불러내려면 자신의 힘 역시 그만큼 더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귀비와의 싸움을 통해 청운은 절실히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삼계의 힘과 맞닥뜨리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게다가 이제는 제갈신의가 준, 별의 힘이 담긴 침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런 힘을 얻을 수 있는 귀물(貴物)은 적곤의 내단뿐이었다.

더 큰 힘을 얻지 못해 삼재구의 힘을 불러내지 못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 힘으로 자신의 몸속에서 서로 겉돌고 있는 치우의 힘과 전륜의 힘을 융합시켜야 삼계의 힘을 대적할 수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칫하면 자신이 삼계에 들기도 전에 적곤에 의해서 먼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은 없기에 청운은 죽을 각오를 했다.

두려운 것 앞에 스스로를 세우는 것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공포와 직면하는 일이다.

그래도 청운은 자신을 그곳에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또다시 다른 차원에 다다를 수 있고, 이미 도달한 차원도 새롭게 일깨울 수 있고, 그 새롭게 도달하고 일깨운 차원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의 한계를 다시 뛰어넘으려는 그 도전은 자칫 지금의 자신조차 무화(無化)시킬지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걸 각오하고 반드시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이 만든 상황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마무리도 해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이 그 길을 바라보듯이 그 길 또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에.

청운은 황궁을 나설 때 하오문 외당주 방천호에게 서찰을 한 통 보냈다.

삼십 개월이 되지 않은 백마 다섯 필만 구해서 대파산 선하령 계곡 초입에서 기다려줄 것을 당부했다.

황궁무고의 한쪽 구석에 세상의 온갖 기사를 기록해 놓은 <기사총람(奇事總覽)>이란 책자가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삼십 개월 이전의 백마가 곤(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라고 그 책자에 적혀 있었다.

북해를 항해하던 무역상 중 하필이면 백마를 싣고 가던 배만 곤(鯤)의 습격을 받아 침몰했다고 책자에 기록되어 있었다.

곤이 그렇다면 적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아니면 할 수 없지만 한 번쯤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멀리 선하령 계곡 들머리에 백마 다섯 필과 다섯 명의 사내들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신법을 전개해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청운이 날아내리자 그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우렁찬 소리로 청운에게 인사를 했다.

“하오문 제자들이 부문주님을 뵙습니다.”

청운도 마주보며 가볍게 포권을 취한 후 일일이 그들을 격려했다.

외당주 방천호가 청운에게 가볍게 읍을 하더니 말했다.

“부문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천하의 최고 절지인 선하령엔 무슨 일로… 거기에다 백마 다섯 필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지 저는 도저히 이해가…….”

청운이 빙긋이 웃으며 방천호의 말을 받았다.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해가 가지 않은 일도 많은 법이지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한 분만 남아 저를 좀 도와주시고 나머지는 돌아가셔도 됩니다.”

방천호는 자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청운과 방천호는 백마 다섯 필을 번갈아 갈아타면서 산길을 올랐다.

거의 해가 뉘엿하게 질 무렵이 되어서야 청운과 방천호는 수중동굴이 있는 맞은편 계곡 근처에 당도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깊어 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한 협곡 아래 맹수 같은 시커먼 급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깍아지른 절벽을 때리는 세찬 바람.

그 바람을 메아리치는 듯한 맹금류의 울음소리가 협곡의 아찔함을 더욱 아찔하게 만들고 있었다.

선하령 계곡의 풍광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그날의 아픔만 없었다면 저 경치를 경치로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청운은 안타까워했다.

그 상처의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육 년 전의 일이었구나 하고 청운은 회상했다.

변하는 건 사람밖에 없는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주변의 노송에서 이십여 개의 큼지막한 노송의 가지를 분질러 와서는 바닥에 내려놓고는 한 척 정도의 길이로 대충 손질했다.

방천호는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청운의 행동을 멀뚱히 지켜봤다.

손을 털고 난 청운이 방천호를 돌아보며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말을 한 필씩 어깨에 들쳐 메고 계곡 맞은편 아래로 옮기려고 하니 자신이 한 오십 장 정도 하강할 때마다 노송의 가지를 전력으로 바닥으로 던지라고 했다.

그 가지를 허공의 디딤돌 삼아 하강하겠다고 청운이 말했다.

한 번씩 오르내릴 때마다 서너 차례 그렇게 해주면 된다고 청운이 말했다.

청운의 말을 듣고 방천호는 대경실색했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황당한 표정으로 청운을 쳐다보며 방천호가 말했다.

“저야 부문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게 정말로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저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해도 오금이 다 저립니다. 하여튼 알겠습니다.”

청운이 방천호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말 한 필을 어깨에 들쳐 메고는 곧장 바위가 떨어지듯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방천호는 청운이 시키는 대로 청운이 오십여 장 하강할 때마다 노송의 가지를 계곡의 바닥을 향해 던졌다.

그렇게 세 번을 던지자 말을 들쳐 멘 청운이 무사히 맞은편 계곡에 내려서는 것이 방천호의 눈에 들어왔다.

방천호는 청운의 무위가 어쩌면 당대 제일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듣기는 했지만 설마 저 정도로 대단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린 채 협곡 바닥의 까만 점처럼 보이는 청운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저게 과연 인간의 신법이란 말인가! 부문주님의 무위가 천하제일일지 모른다는 강호의 세평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구나.”

청운이 협곡 아래로 내려갈 때보다 올라올 때 방천호는 노송의 가지를 두 번 더 던졌다.

네 필의 말을 옮기고 난 청운이 마지막 한 필의 말을 어깨에 들쳐 멨을 때 방천호가 청운에게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보따리 속에는 열흘 치 정도의 건량과 육포 그리고 가죽 주머니에 담은 술이 들어 있었다.

청운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고맙다는 인사를 마지막 하강을 시작했다.

동굴 입구에 다섯 필의 말을 무사히 옮긴 청운은 방천호가 알아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계곡 위에 있는 그를 향해 손을 한 차례 흔들어주었다.

청운이 다섯 필의 백마 고삐를 한 손에 틀어쥐고 막 동굴로 들어가려고 하는 일순간 시퍼런 소(沼)의 수면이 일순간 일렁거렸다.

적곤이 어떤 낌새를 느낀 것 같았다.

청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놈의 회가 동한 모양이로군…….”

청운이 말들을 끌고 동굴을 통과했다.

가는 길에 자신이 만든 구무자(求武子)의 무덤에 삼배를 올렸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게 진정한 무공이 뭔지를 눈뜨게 해준 스승과 같은 사람이었다.

동굴을 다 통과한 청운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계곡과 이어진 연못과 그 주변에는 바깥세상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기화이초들이 온갖 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육년 전, 적곤과 대붕의 싸움으로 인해 원래의 풍광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으나 연못 주변은 그때와는 또 다른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