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걸어온 길 때문에 걸어가야 할 길의 책임이 너무 무거웠다.
삼황자의 이상한 논리에 청운은 자꾸만 무뎌지고 흐려지는 자신의 논리를 수시로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청운은 평소의 자신처럼 침착하려고 했다.
어느 순간 청운은 굳이 자신이 그토록 그에게 쓸모가 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끝없는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의 속성이 자신을 짓누를 때마다 청운은 하루라도 빨리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황궁을 벗어나고 싶었다.
청운은 권력과 권모술수의 시궁창에서 풀풀 풍기는 썩은 내를 더 이상 맡기가 싫었다.
일관되게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피력하는 청운의 논리에 삼황자도 조금 설득을 당했는지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로 전과는 다른 어투로 말했다.
삼황자는 ‘만일’이라는 자신의 마지막 말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태사령. 만일 저들의 잘못을 대충 덮고 넘어가면 그들이 또다시 악의 꾐에 빠져 이 나라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네. 그런 의미에서 잘못을 단죄하는 건 은총이고, 그걸 용서하는 건 파탄일세.”
삼황자의 말은 백성보다 자신의 차후 권력에 대한 걱정을 앞세운 것이었다.
청운이 다시 한번 자신의 견해를 단호하게 밝혔다.
“단순 가담자들은 무력한 희생자일 뿐입니다. 자비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합니다. 자비 없는 공포는 백성을 돌아서게 만듭니다. 헤아려 주시지요.”
“…….”
“꽃도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있어야 활짝 핍니다. 계절만 도래했다고 저절로 피는 꽃은 없습니다. 꽃만 홀로 존재하는 나무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 일에는 절대 ‘만일’이라는 가정이라는 말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단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편안한 자리 같았지만 삼황자의 눈빛과 말에 담긴 의미와 무게까지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삼황자와 한참을 대화하고 그의 집무실을 나올 때 청운은 마치 과음한 다음 날 아침처럼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거북했다.
청운은 삼황자의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극도의 섬세한 조심성을 발휘해야만 했다.
결례를 감추고 신중하게 상황에 맞는 말을 찾느라 어떤 때는 청운의 대답이 조금씩 더뎌지기도 했다.
청운은 보통 사람과 대화했을 때보다 몇 배나 더 피곤함을 느꼈다.
청운은 삼황자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다소 애매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게 실망했다.
청운은 자신의 의견이 최소한 수치스럽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삼황자와 대화할 때 계속해서 방어적인 미소만 지어야 했던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틈타 힘없는 양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황궁에서 자신의 영향력만을 확고히 다지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삼황자의 속셈에 대한 자신의 분노가 굼뜨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청운은 울화가 치밀었다.
청운은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자괴감이 들었다.
다행히 삼황자는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는 작자는 아니었다.
결국엔 자신의 고집을 일부 버리고 청운의 의견도 일부분 반영했다.
하지만 삼황자는 실패마저도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청운은 그것 또한 몹시 불편했다.
청운은 한시라도 빨리 황궁을 벗어나고 싶었으나 어의의 간곡한 부탁으로 삼 일을 더 안정을 취하고 황궁을 나왔다.
황궁을 떠나는 날 삼황자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그가 만면에 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꼭, 다시 만나고 싶네.”
그의 입에서 나온 네 마디 말이 밝은 아침에 살짝 밤의 어둠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고 청운은 느꼈다.
* * *
모든 것이 그들끼리의 장난 같았다.
청운은 힘없는 약자들을 도외시한 채 권력을 위해 암투만 일삼는 황궁이 체질적으로 싫었다.
청운은 삼황자의 말에 장담도 확신도 주지 않았다.
그냥 그는 멍한 상태에서 무언가에 동의하고 말았다는 느낌과 그 거래가 자신에게 지울지도 모르는 대가 때문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건 옳지 않은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청운은 수없이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는 소리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거의 폐허가 돼버리다시피 한, 황궁을 나오며 청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은 아침의 햇빛이 황궁의 지붕 위에서 흐려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변화무쌍한 황궁의 권력다툼처럼. 그 모습이 마치 싸움에서 반쯤밖에 이기지 못한 삼황자의 우울한 눈빛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자신의 불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청운은 황궁을 나오며 삼황자에게 하고 싶었으나 차마 하지 못했던 혼잣말을 나직하게 웅얼거렸다.
“겨우내 단단하게 얼었다 녹은 땅이 더 비옥하다고 말을 하지만 인간이 저지른 재난은 자연재해와는 전혀 다르다. 자연재해는 모두에게 평등하지만, 인간이 만든 재앙은 절대로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낡은 질서가 죽어 가는데 새로운 질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혼란과 혼돈이 온다.
이 공백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의 아귀다툼에 죽어 나가는 것은 힘없는 약자들뿐이다.
지금은 병든 시대, 탁월한 현자나 성군이 시대를 이끌지 못하는 이런 지리멸렬한 시대에서 약자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매 순간 목숨을 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걸 한꺼번에 다 고치는 건 불가능하다.
우선 힘없는 약자들과 직결된 것들을 먼저 고치고 나머지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쳐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신의 우주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이 땅을 사는 누구라도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좋은 것은 자신들이 독차지하고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된다.
자신과 다른 지역에서 다른 핏줄로 태어났다고 혐오하고 차별해서도 안 된다.
자신보다 사회적 신분이 낮다고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며, 부의 많고 적음을 따져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고플 때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추울 때 따뜻하게 쉴 곳이 있어야 하고, 밤에는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하고, 서로의 사정을 보살펴주는 이웃이 있어야 한다.
자신은 이런 세상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삶은 이미 다른 곳을 살고 있다고, 그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고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본래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하지만 청운은 곧 자신의 그런 생각이 역겨운 감상성 같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자신이 이미 너무 걸어가지 말아야 할 길을 많이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때론 돌이킬 수 없는 길도 있다.
청운은 지금 자신의 길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미 걸어온 길 때문에 걸어가야 할 길의 책임이 너무 무겁다고.
성문 근처의 담장을 따라 수백여 개의 대나무가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대나무들의 끝에는 반란군들의 잘린 머리가 어김없이 꽂혀 있었다.
대장군 오웅비, 아니 상제의 머리를 중심으로 해서.
빨지도 않은 걸레처럼 긴 혀를 빼문 흉측스러운 머리들이 봄 햇살에 나물 마르듯이 말라가고 있었다.
어제까지 누군가의 남편이고, 자식이고, 가장이었던 사람의 머리들이.
집안을 걱정하고, 부모를 걱정하고, 아내와 자식을 생각했던 바로 그 머리들이.
바꿀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바꾸려 하면 세상은 뒤집어진다.
가능하면 바꿀 수 있는 것 안에서 바꾸려고 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변화에는 피가 흥건한 것이다, 지금처럼…….
잠시 말머리를 돌려 황궁을 바라보며 청운은 생각했다.
저 황궁 깊숙한 어딘가에 세상을 다스리는 비책이 적힌 <환서>가 있을 것이다.
그 <환서>의 가르침대로 그가 부디 성군이 되어 주기를 청운은 간절히 염원했다.
다시는 저런 참혹이 일어나서 자신이 또 이곳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말머리를 다시 돌린 청운은 황궁과 점점 멀어졌다.
청운을 태운 타박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시나브로 봄이 익어가는 길을 두드리는 타악기의 선율 같았다.
말발굽이 내딛는 자리마다 봄날의 아지랑이가 아슴푸레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봄의 절정이었다.
눈길이 가닿은 모든 산천에 새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새싹이 땅을 뚫고, 새순이 가지에 솟는 소리까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봄은 그냥 따뜻한 날씨나 화사한 풍경으로만 오는 게 아니었다.
봄은 새롭게 처리하고 감당해야 할 일들도 함께 가지고 온다.
태어나고 피어나는 것에는 이미 죽고 시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청운은 자신의 몸속에 포함 되어 있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향하는 이 봄 길이 어쩌면 자신 속에 있는 죽음을 앞당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배가 고팠다.
청운은 그제야 자신이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길을 너무 재촉하느라 청운은 일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좀 쉬어야겠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때마침 관도에서 삼백여 장 떨어진 둔덕 아래 제법 널따란 연못이 보였다.
정자도 하나 있었다.
청운은 곧바로 정자에 올랐다.
길을 떠나기 전 저잣거리에서 사 온 육포와 소홍주 한 병을 꺼내고는 퍼질러 앉았다.
방원 이백여 장이 족히 될 것 같은 연못의 수면은 연잎으로 뒤덮여 있었다.
물보다 연잎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군데군데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수면과 연잎에 봄바람이 살랑거릴 때마다 연잎 위에 가만히 몸을 포개고 있던 적막과 정적이 잠시 흔들렸다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
연잎처럼 고요하고 수면처럼 잔잔한 마음으로 청운은 생각에 빠졌다.
마족의 역사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중원으로부터 받은 차별과 혐오는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렸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삼계의 저주를 이 땅에 소환해서는 안 된다.
삼계가 열리고 사람들의 심성이 악에 잠식당하면 이 땅에는 흉악한 범죄와 잔혹한 전쟁이 끊이질 않을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결정에 전혀 관여하지도 않았고 선택하지도 않은, 그 전쟁에서 비록 이기더라도 그 어떤 전리품도 챙기지 못하는 아무 힘도 없는 다수의 양민만이 전쟁을 치르고 죽을 뿐이다.
전쟁은 어느 쪽이 승리하고, 어느 쪽이 패배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전쟁을 시작하는 순간 모두가 패배를 선고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말겠다는 다짐이 강할수록 반드시 패배하는 것이 바로 전쟁의 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