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명부(冥府)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소리 같았다.
“황자님의 배려는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강호가 더 편합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삼황자가 혀를 끌끌 차며 참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런 청맹과니들이 어디 있을까. 자네 같은 인재를 선발하지 않고 누구를 뽑았단 말인가. 황궁이 귀비와 병필태감의 전횡으로 꼴이 말이 아니네. 아깝네! 참으로 아깝네! 대신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황궁으로 즉시 달려와야 하네. 그것만이라도 반드시 약속해주게.”
청운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운의 말을 듣고 삼황자가 껄껄 웃더니 탁자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청운에게 건넸다.
은으로 된 오각 모양의 패였다.
앞면에는 은빛 용이 어검(御劍)을 입에 문 채 승천하는 부조가 양각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옥새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옥새 인장이 그대로 부조되어 있었다.
삼황자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태사령패(太師令牌)이네. 이 일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자네를 태사령에 봉하네. 서류에 그 인장을 찍으면 어명과 진배없네. 앞으로 자네는 황제 폐하와 내 명만 따르면 되네. 일하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될 것이네.”
청운이 태사령패를 품속에 갈무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 * *
그로부터 삼 일 후 갑자기 도성 근처의 모든 산에서 일제히 봉화가 올랐다.
황궁 수호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도성을 떠나 변방으로 갔다.
그날 저녁 무렵 노을이 불그스름하게 도성의 지붕들을 물들일 때 청운은 천리신개 일행과 함께 대장군 어웅비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대장군의 저택 지붕을 비추는 노을이 유난히 더 붉은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천여 명의 날랜 군사들과 이십여 명의 황궁 시위들이 백여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장군의 저택을 겹겹이 포위한 상태였다.
청운은 천리신개 일행과 함께 곧바로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대장군의 집을 지키던 삼십여 명의 병사들이 창을 겨누며 제지했다.
청운이 태사령패를 내보였다.
병사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무릎을 꿇고 외쳤다.
“만세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듭니다.”
청운이 왼손을 내저으며 모두 물러나라고 했다.
병사들이 모두 물러나자 청운 일행이 본채를 향해 걸어갔다.
청운이 본채의 이십여 장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치 천년바위 같은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본채에서 흘러나왔다.
“너는 더 이상 다가올 필요 없다. 내가 그리로 나가마.”
잠시 후 십수 명의 인물들이 본채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골이 장대했다.
청운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상당히 큰 편에 속했는데 그는 청운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그는 사십 대 중후반으로 각진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전형적인 무장의 생김새였다.
청운은 그를 보자마자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의 옆에는 익히 아는 얼굴도 있었다.
사사천주 묵성풍혼도와 첫째 절심마환과 셋째 혈미륵도 보였다.
그리고 천산의 천도봉에서 본 인물도 두 명 있었다.
그들은 사해표국과 대퓩표국의 국주 같았다.
나머지 십여 명은 모르는 인물들이었다.
청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대장군이 말했다.
“네가 요즘 강호 최고의 검이라는 무위검 강청운이구나. 기어이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너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고,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왔다. 그 대가는 당연히 너의 죽음이다.”
“…….”
“그 나이에 그 정도 능력이라면 앞으로 수십 년 이상을 강호의 별로 숭상을 받으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하긴 이제 이런 말이 다 무슨 필요가 있을까. 네가 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게 끝나 버렸는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어떻게 난 줄 알았느냐.”
청운이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베어 물고는 말했다.
“그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당신 조모의 출생 배경과 지역 모두가 의문투성이였소, 그래서 직감했소. 마족 출신임을. 거기다 귀비와 사례감의 관계 그리고 최근에 당신이 변방의 군사를 움직인 것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니 당신이라는 답이 딱 나오더군.”
“…….”
“대장군, 아니 상제(上帝)라고 불러야 하겠지요. 당신네 마족의 인물들은 아마 당신을 그렇게 칭하지요. 나는 그동안 당신네 혈족이 중원에서 받아 온 부당한 차별과 혐오로 인한 고통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긴 한(恨)을 몹시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당신네 혈족의 한을 풀기 위해 봉인된 삼계(三界)의 저주를 이 땅에 불러내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한을 어떻게 풀라는 말이냐.”
“하지만, 한을 그런 식으로 풀면 중원은 가만있을 것 같소? 중원의 한족은 당신네 마족에게 또다시 낙인을 찍어 더 심한 차별과 고통을 줄 게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니오. 왜 그걸 모르시오.”
“…….”
“그렇게 되면 당신네 혈족은 더 지독한 한을 가슴에 품을 것이고, 그렇게 쌓이고 쌓인 한으로 또다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궁리를 할 것이고, 중원은 다시 더 지독한 보복을 할 것이고… 내 눈에도 빤히 보이는 그 악순환의 고리가 당신 눈에는 정녕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왜 그런 악순환을 끊어 버릴 생각은 하지 않고 되풀이할 생각만 하시오.”
청운은 대장군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참으로 안타깝구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삼계는 절대 불가하오. 당신들의 계책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건 모두가 공멸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오. 이겨도 지는 것임을 왜 모른단 말이오.”
“…….”
“나는 당신네 혈족의 한도 안타깝게 여기지만, 당신네 혈족의 한풀이 때문에 아무런 죄 없이 무수히 죽어 나갈 무고한 양민이 나에게는 더 우선이오.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시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꾼다면 내가 책임지고 황제 폐하에게 당신네 혈족에 대한 선처를 부탁해 보겠소.”
대장군, 아니 상제가 한 차례 앙천대소를 터트리고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네놈이 우리 혈족의 한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나불대느냐. 옆에서 보는 것과 실제로 당하는 건 천양지차다. 우리 혈족의 한은 중원의 악귀들이 우리 혈족에게 가한 고통을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은 네가 함부로 입에 담을 만큼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
“네놈 말대로 수 천 년 이상 쌓이고 쌓인 우리 혈족의 한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세상 전체가 차라리 공멸하기를 바라겠느냐. 너는 모른다. 아무것도…….”
그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다는 생각한 청운이 체념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상제,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당신들 거사와 별반 상관도 없는 하남, 하북, 산서, 산동표국 같은 작은 표국들을 왜 멸문시켰소. 그들이 당신네 혈족에 눈곱만큼의 해라도 가한 게 있소? 있으면 어디 말을 해 보시오.”
상제가 입가에 조소를 가득 베어 물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사실 나는 그런 하찮은 표국이 강호에 존재하고 있었는 지조차 몰랐다.”
상제는 옆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청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내 옆에 있는 사해표국주나 대륙표국주가 그렇게 했겠지. 그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거사에 걸림돌이 되었거나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겠지. 아니면 둘 다 이거나… 전혀 다른 꿈을 꾸는 너와 나 사이에 더 이상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느냐. 자, 이제 시작하자.”
상제가 막 자신의 검을 빼 들려고 했을 때 사사천주가 사마흔이 상제를 제지하고 나섰다.
그가 묵성풍혼도를 빼 들고 청운을 향해 다가왔다.
청운도 무영검을 빼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청운의 삼 장 앞에 멈추어 섰을 때 청운이 말했다.
“사사천주. 당신도 마족이오?”
사사천주 사마흔이 비꼬듯이 맣했다.
“그걸 꼭 대답해야만 알겠느냐. 나는 네놈과 더 이상 아무 말도 섞기 싫다. 그만 시작하자.”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에 있는 절심마환과 혈미륵도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장내로 진입해 천리신개 일행을 덮쳐갔다.
청운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천리신개와 검후 그리고 혼원벽력도가 비록 절세의 고수이지만 저들 모두를 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자신이 삼황자에게 부탁한 팔 시위들이 빨리 이곳에 나타나야 하는데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황궁 안에서 혹시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청운은 걱정했다.
청운은 이곳의 일을 마무리 짓는 대로 서둘러 황궁으로 가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청운이 잠시 황궁에 대한 걱정을 하는 사이 사사천주 사마흔이 마병 묵성풍혼도에 잔뜩 내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사사천주의 묵성풍혼도에서 고-오-오-오 하는 귀곡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명부(冥府)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소리 같았다.
청운도 무영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무영검이 우-웅 하고 한 차례 부르르르 검신(劍身)을 떨더니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삼 장 가까이 뻗어 나왔다.
청운의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사사천주와 상제가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사사천주 사마흔이 벼락처럼 묵성풍혼도를 휘두르며 청운을 짓쳐왔다.
청운도 즉각 쾌-타-절-변-회-접의 초식을 적절히 연동해 그를 상대했다.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교환되었다.
청운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사천주의 묵성풍혼도와 청운의 무영검이 맞닥뜨릴 때마다 이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는 전각들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이 흔들렸다.
두 사람이 밟고 있는 두께가 거의 한 척 이상이나 되는 바닥의 포석들이 마치 지진에 갈라지듯 쩌-어-억-쩍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묵성풍혼도에서 뻗어 나온 묵빛의 도기 속에는 마치 유부의 귀신이라도 들어있는지 사마흔이 도를 휘두를 때마다 사람의 영혼을 쥐어뜯는 것 같은 호곡성이 울려 퍼졌다.
거기다가 산발한 귀신이 피를 줄줄 흘리며 달려드는 듯한 환영이 어른거렸다.
청운은 그의 도법 자체보다도 그게 더 곤혹스러웠다.
청운은 마련주 제혼마검이 왜 사사천주의 묵성풍혼도가 일으키는 환각을 조심하라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오십여 초를 교환하고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자 청운은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사천주의 무위는 더 대단했다.
마련주 제혼마검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특히 그의 마병 묵성풍혼도가 뿜어 대는 괴이한 마가가 그의 실제 무위를 한 단계 정도는 더 격상시키는 것 같았다.
청운은 사사천주와 싸우면서 곁눈질로 장내를 흘깃 훑어보았다.
천리신개 일행의 싸움판이 살짝 걱정되어서였다.
절심마환 악무한과 맞상대를 하고 있는 검후는 막상막하였으나,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가 적들의 숫자 때문에 조금 밀리는 것 같았다.
청운은 조금 초조해졌다.
다음에 있을 상제와의 대결 때문에 사사천주와 대적할 때 힘을 조금 비축하려고 했으나 그래서는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