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그것이 비록 나중에까지 최선이 아닐지라도.
청운은 지금의 이 황실과 삼황자에 대한 선택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청운은 삼황자가 이 시대 최고의 인물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청운이 지금 그를 만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나마 그들이 삼계(三界)를 열어 세상에 최악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天’의 무리보다는 조금은 더 낫다고 청운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자신의 선택 또한 시대가 바뀌면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
황실이 가진 힘 말고는 그들의 마수에 맞설 수 있는 다른 힘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이 워낙 급하기에 나중의 일은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당장은 어떤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의 야욕을 제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뿐이다.’ 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삼황자를 도우려는 진짜 이유는 그가 진정으로 훌륭한 정치를 구현할 성군의 자질을 갖춘 최적임자는 아닐지라도, 그가 삼계를 열려는 악의 무리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삼계를 열려는 악의 세력들이 황궁과 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쁜 세상이 현세에 도래하고, 더 나쁜 질서가 이 땅에 구축될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운은 황궁의 일을 돕기는 하되 삼황자의 권력 지지기반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돕지 않을 생각이었다.
청운은 오매불망 자신이 진정으로 꿈꾸는, 힘없는 약자들이 그나마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의 질서를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그를 도와주겠다고 작정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도와준 지금의 이 황실과 삼황자가 자기들만의 쾌락과 환락을 위해 해괴한 질서를 만들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혼란에 빠뜨린다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 다음 시대의 다른 누군가가 심판할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흘러온 유구한 역사가 그걸 말해 주고 있다.
청운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새삼 다짐했다.
그것이 비록 나중에까지 최선이 아닐지라도.
* * *
검법 수련에는 두 가지 길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나는 기존에 존재하는 비급을 곧이곧대로 해석해 한 치의 틀림도 없이 그 자세와 동작을 주구장창 파고드는 방식이고, 다른 한 가지는 기존의 비급을 자기 나름대로 창의적으로 해석해 자기 몸에 최적화하는 방식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전자는 너무 고지식해서 자기 몸에 맞지 않은 남의 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은 단점이 있고, 후자는 원래의 검법이 가진 진정한 오의를 놓치는 단점이 있다.
둘 다의 단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원래의 검법이 가진 오의를 놓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맞게 새롭게 해석하는 재창조의 과정이 핵심인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진정한 자신의 검은 자신의 외적, 내적, 영적인 면이 오롯이 담겨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사람의 지문이 모두 다 다르듯이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 전무후무 유일무이한 존재다.
다른 사람과 미세하게 다른 그 차이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런 자기 자신이 온전히 자신의 검에 담길 때 비로소 자신의 검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고유의 자신을 검에 온전히 담아내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검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그대로 빼닮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행위는 고유한 ‘나’가 가질 수 있는 재능을 스스로 박탈하는 짓이다.
자신이 유일한 존재임을 믿고 스스로의 방식에 매진할 때 그 검은 알아서 ‘그’를 완성될 것이다.
역사상 그 누구의 검도 완벽하진 않았다.
오직 스스로 자신이 완성한 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신조차도 다 완벽할 수는 없다.
모든 글자가 형(形), 음(音), 의(義)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듯 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형을 중심으로 수련을 하지만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음의 단계를 지나면 의미를 깨닫는 입구가 보인다.
그러면 언젠가는 자신을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헛된 색신(色身)은 부서지고 파괴된다.
이후 그 색신이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 진아(眞我)가 들어서면 견고한 법신(法身)을 이룰 수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황궁무고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계속 검법서만 읽었다.
그것은 청운이 자신의 검법을 더 완벽하게 보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청운은 혹시라도 황궁무고에서 흑황의 <구환마감>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그러고 있었다.
청운은 검선의 <자전십이파검>과 흑황의 <구환마검>이 ‘天’의 무리에 의해 황궁무고에서 강호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삼백 전 당대 제일인자였던 검선의 <자전십이파검>은 참으로 가공스러웠다.
만약 모용성이 조금만 더 <자전십이파검>의 오의를 깨우쳤다면 그 대결에서 죽은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사백 년 전 당대 일인자였던 흑황의 <구환마검>도 검선의 <자전십이파검>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꼬박 이틀 동안 검법서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구환마검>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검법서를 거의 다 읽고 나니 청운은 시간은 아직 삼 일이나 더 남았지만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았다.
갑자기 무력한 공허감이 밀려왔다.
청운은 자신이 책장에서 뽑아낸 검법서들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 자체도 귀찮았다.
책을 베게 삼아 잠이나 한숨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누워서 바라보니 서서 쳐다볼 때보다 황궁무고의 규모는 더 어마어마했다.
청운은 억지로 몇 번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았으나 환경이 너무 낯설어서 그런지 오히려 더 잠이 달아나 버렸다.
청운이 일어나기 위해 다시 눈을 떴을 때 곧 폐기 처분할 것 같은 아주 낡은 책들만을 따로 모아둔 책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책장은 황궁무고의 우측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청운은 황궁에서 어떤 책들을 어떤 방식으로 폐기하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청운은 벌떡 일어나 그 책장으로 다가갔다.
서책의 태반이 겉장도 없었다.
표지가 반쯤 떨어져 나간 <~외사(外史)>라는 두꺼운 서책 하나가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그 책을 뽑아 들었다.
먼지를 털고 설렁설렁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무림(武林)의 정사(正史)에서 빠진 잡다하고 괴이한 사건들이 두서없이 적혀 있었다.
* * *
촤-르-르-륵-촤-르-르-륵.
대충 책장을 넘기던 청운의 눈길이 <마천(魔天)의 서(序)>라는 제목에 고정되었다.
마천(魔天)은 사백여 년 전 백도와 흑도를 통틀어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다.
마천은 현재의 마련(魔聯(과 사사천(邪邪天)의 실질적 모태이기도 했다.
사백 년 전 마천의 천주는 바로 흑황(黑皇)이었다.
그는 마족(魔族) 출신이었다. 그때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마도(魔道)의 무리조차 마족을 싫어했던 모양이었다.
흑황의 오십 번째 생일날 흑천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었다.
바로 그날 저녁 흑황은 자신이 가장 신임했던 부천주 악무천에게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한족 출신이었던 악무천은 흑황의 술잔에 한 방울이라 마시면 천 일 동안 깨지 못한다는 천일취를 발랐다.
한밤중 악무천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천일취에 취해 곯아떨어진 흑황을 난도질해 십만대산 근처에 있는 무저갱에 내다 버렸다.
악무천은 반평생 자신이 모시던 주군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흑황을 그의 고향인 십만대산에 버리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악무천은 반역에는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두 가지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하나는 구환마기를 극성으로 익힌 흑황은 목을 자르지 않는 한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고, 다른 하나는 흑황을 십만대산의 무저갱에 버린 것이었다.
무저갱 속에 수천 년 고여 있던 암흑의 지기(地氣)가 흑황을 되살렸다.
그 무저갱 속에서 쥐와 벌레로 생식을 하면서 흑황은 자신이 익힌 구환마기와 무저갱 속 암흑의 지기를 근간으로 저주의 검법을 창안했다.
그것이 바로 <구환마검>이었다. 흑황이 십만대산의 무저갱에 버려진 날로부터 꼭 오 년째 되던, 그러니까 정확히 흑황의 오십다섯 번째 저녁 마천(魔天)의 배신자들이 모조리 참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 흑황은 무림에서 사라졌다고 서책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 후 마천의 잔존 세력들이 갈라져 세운 것이 바로 지금의 마련과 사사천의 뿌리라고 외사는 기록하고 있었다.
청운은 흑황과 마천의 비극에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구환마검>은 두려웠다.
검의 실체를 접하지 않고 그것에 얽힌 비사(祕史(만 읽었는데도 가공할 기운이 청운에게 느껴졌다.
청운은 그 서책을 제자리에 꽂아 두고 돌아서려다가 바로 아래 칸 구석에 <~경(經)>이라고 쓰인 서책을 빼 들었다.
그 책 역시 표지 대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책을 펼쳐서 넘겨보았다. 고대 범어(梵語)였다.
그 범어는 황윤 노야로부터 받은 <다라패엽경>과 양촌댁에서 얻은 서책에 쓰인 글자와 같은 l시대의 것이었다.
서책의 곳곳에 인체의 도해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운은 그 서책을 탁자로 가져와 꼼꼼하게 정독하기 시작했다.
양촌댁에서 얻은 책자에 쓰인 내용과 흡사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았다.
논리가 달랐다.
특히 상단전을 열기 위해 폐맥을 뚫는 순서가 달랐다.
양촌댁에서 가져온 책에는 기를 단전에서 백회혈로 바로 돌리는 반면, 이 책에서는 기를 단전에서 용천혈을 거치게 한 후 백회혈로 다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청운은 곧장 가부좌를 틀고 새로운 방식으로 운기를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저번에 하도 큰 낭패를 당해서 조금 주저했다.
청운은 서책을 덮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시도하자니 겁이 났고 하지 않으려니 너무나 궁금했다.
게다가 아직 삼 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인생은 어차피 이판사판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을 여기까지 보낸 하늘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청운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었다.
책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운기를 시작했다.
뭔가 달랐다.
전에 하던 방식보다 힘도 훨씬 덜 드는 반면에 기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왕씨 마을 촌장으로부터 받은 치료 때문인지 아니면 기를 유도해 폐맥을 뚫는 방식이 달라서 그런지 하여튼 뭔가 달랐다.
청운은 둘 다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느낌이 좋았다.
어느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가부좌를 튼 지 채 일각도 안되어 청운은 무아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청운이 쉬지 않고 계속 운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