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세상에 처음부터 신성불가침한 존재가 어디 있는가.
물론 이 상극의 원리에는 원래 정답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삶에는 저따위 부와 권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다.’ 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담장 안에 있는 자가 아무리 성군이라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성군이 베푸는 선정 역시도 알고 보면 담장 밖에 대한 ‘선량한 차별’일 뿐이었다.
저곳에서는 이런 진실을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바로 역적이 된다.
권력의 정점에 고립된 자는 그가 아무리 고매한 인격과 깊은 학식을 갖추고 있더라도 현명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것은 현 황실도 마찬가지다.
환관의 아첨과 귀비의 치마폭에 싸여 세월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는 황제에게 신하 중 그 누가 함부로 솔직할 수 있겠는가.
솔직하게 직언하는 순간 곧바로 자신의 목을 걱정해야 할 판국에.
세상에 처음부터 신성불가침한 존재가 어디 있는가.
단지 타인을 강제하고 강압해서 자신을 그렇게 떠받들게 만든 존재만 있을 뿐이다.
황족이, 고관대작이 백성에게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세상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홍수나 가뭄 같은 재앙이 나라를 덮치면 군주는 백성을 미혹하기 위해 어김없이 구휼 같은 관제 행사를 연다.
하지만 백성들은 권력이 이끄는 방향으로 무조건 따라갈 만큼 멍청하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는 물길도 물론 아니다.
왕조와 백성은 늘 서로 밀고 당기는 길항을 하면서 역사의 물굽이를 바꾸기도 하고 뒤틀기도 하면서 공생 공존하는 관계다.
현명한 군주는 마땅히 그걸 알고 처신해야 한다.
그래야 그 왕조는 오랜 세월 지속할 수 있다.
저 건물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해도 나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모래더미처럼 보인다.
저 속에는 음모와 협잡, 터무니없는 욕망이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이 살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다.
거짓된 세계를 벗어나려면 그 세계의 질서 바깥으로 나가야만 한다.
누군가가 정교하게 짜놓은 질서 안에서는 절대로 진실을 볼 수 없다.
그런 갇힌 상황에서는 질서 바깥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저 거대하고 웅장한 공간 속에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절대자의 침묵 같은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오만한 권력의 냄새가 진동했다.
청운과 주호형이 수문장이 가르쳐 준, 문 가까이 거의 다 다다랐을 무렵 청의에 관모를 쓴 관인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환관이었다.
주호영과 뭐라고 말을 하더니 청운을 보고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주호영은 되돌아서 황궁을 나갔다.
환관은 몇 개의 전각을 돌고 돌아 대전 앞에 멈추어 섰다.
환관은 대전까지 오는 내내 청운에게 황실의 예법에 관해 설명했다.
삼황자를 배알할 때 특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바로 그때 청운은 대전의 지붕에서 누군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기감을 강하게 느꼈다.
대단한 기감이었다.
화경의 고수들 같았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청운이 지붕을 올려다보자 그들이 청운을 포위하듯 날아내렸다.
모두가 어떤 특징도 없는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삼십 대 초반부터 사십 대 중후반까지 있었다.
단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의 표정이 마치 석상처럼 무표정하다는 것이었다.
‘삼황자가 자신의 무위를 시험하려는 모양이다.’ 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저들이 바로 황제와 황자들의 경호를 책임지는 팔 시위들인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청운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저들의 무위를 감안하면 이곳에서 비무가 벌어질 경우 아무래도 대전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청운은 백여 장 떨어진 연무장을 가리켰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이 한 줄기 섬광처럼 그곳으로 먼저 날아갔다.
팔 시위들도 곧바로 청운을 따라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청운은 무영검을 뽑아 들자마자 칠 성의 내력을 주입했다.
무영검이 주인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우-웅 하며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를 이 장 이상이나 토해냈다.
청운의 모습을 바라보던 팔 시위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청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기 되었으면 공격을 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팔 시위들은 한 마리 비조처럼 땅을 박차고 오르더니 청운을 향해 쇄도했다.
그들의 무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가벼운 시험이라는 생각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에도 짓쳐오는 검기가 살을 에는 것 같았다.
절대로 방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청운은 허공으로 몸을 솟구침과 동시에 쾌-타-절-변의 초식을 하나의 초식으로 연동해 그들의 검초를 맞상대했다.
까-카-카-캉 하는 금속성 울림과 함께 섬광 같은 일초가 교환되었다.
사방 십여 장 안의 땅거죽이 들고 일어나 허공을 뿌옇게 만들었다.
청운은 깜짝 놀랐다.
그들의 검과 맞부딪칠 때 무영검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손목이 살짝 저렸다.
상당히 강할 것이라고는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들의 무위가 이 정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청운의 짐작보다 최소 두 단계는 더 높은 것 같았다.
팔 시위들은 청운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청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들이 내력을 더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검에서 뻗어 나오는 예기가 두 배는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청운도 살짝 긴장했다.
자칫하면 망신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청운은 내력을 거의 십성 가까이 끌어올렸다.
그들이 다시 청운을 향해 짓쳐왔다.
청운은 쾌-타-절-변-회-접의 초식을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전개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커다란 금속성 폭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청운과 그들이 대치하고 있던 연무장 곳곳에 커다란 웅덩이가 파였다.
새까맣게 허공을 뒤덮었던 흙먼지가 투-둑-투-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곧이어 장내의 풍경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청운은 몇 군데 옷이 찢어진 채,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반면에 팔 시위들은 곳곳에 적지 않은 검상을 입은 채 모조리 입가에 한 줄기 핏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대취한 사람처럼 연신 신형을 비틀거리며.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대전 앞이었다.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청룡이 수놓아진 화려한 은색의 비단 장포를 입은 자였다.
기개가 헌앙하고 얼굴도 영준했다.
얼핏 보기에 나이는 청운과 비슷한 이십 대 중 후반 정도로 보였다.
조금 전 자신을 안내했던 환관이 달려왔다.
대전 앞에 계신 분이 바로 삼황자라고 환관이 말했다.
황궁에 왔으니 황법에 따른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삼황자 앞 삼장 가까이 다가선 청운이 부복했다.
부복한 채 대전을 바라보았다.
한 아름이 넘는 서까래가 줄을 이루어 대전의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태사의 주변에 거칠 것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과 암투와 권모술수의 냄새가 떠돌고 있는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말했다.
“강호의 무면 소졸 강청운이 고귀하신 삼황자님을 뵙습니다.”
삼황자가 대전 계단을 내려와 청운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청운에게 말했다.
“무위검 강 청운이라 했던가. 잘 왔네. 내가 보고서를 통해 파악한 무위보다는 최소 곱절은 더 강한 것 같네. 황궁의 가장 고수인 팔 시위를 단, 이 초 만에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강 소협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최선을 다했더라면 팔 시위 중 아무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 같네.”
“…….”
“현 강호에 이런 탁월한 인재가 있었다니.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황자궁의 내 집무실로 가세. 강소협과 이야기할 것이 아주 많을 것 같네. 자, 어서 나를 따라오게.”
청운은 삼황자를 뒤따라가면서 생각을 했다.
자신이 삼황자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황궁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부탁하려고 하는가, 그게 어떤 부탁이든 간에 청운은 그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매불망 진정으로 자신이 꿈꾸는 것은 힘없는 약자들이 그나마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것만이 지기 삶의 유일한 이유라고.
청운과 삼황자가 도착한 황자궁의 외부는 오랜 풍우에 시달렸음에도 고색창연했고 내부는 중층의 상하 통층 구조로 품격과 위엄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삼황자의 집무실은 화려하면서도 검박했다.
청운과 삼황자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아까 그 환관이 의자를 빼 주고 시녀에게 찻물을 끓이라는 지시를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찻물이 끓기 시작하자 환관은 시녀를 내보내고 자신이 직접 삼황자와 청운을 챙기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삼황자가 청운에게 막 무슨 말을 시작하려고 할 때 청운은 짐짓 딴청을 부리는 척하면서 흘깃 환관을 쳐다봤다.
삼황자가 한 차례 헛기침하더니 환관에게 한 차례 턱짓을 했다.
하지만 환관은 못 본 척하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를 위한 찻잔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둘 사이의 대화에 끼고 싶어 안달했다.
잠시 후, 그는 찻주전자를 데우는 척하면서 요령 있게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결국 삼황자가 직접 환관에게 자리를 좀 비켜달라는 말을 하고 나서야 그는 집무실을 나갔다.
청운이 먼저 말했다.
“황자님, 지금 천장과 사방의 벽에서 열두 명의 강한 기감이 느껴집니다. 그들이 대화를 들을까 걱정입니다.”
삼황자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들의 기감까지 다 느낀단 말인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경지구먼. 강 소협, 그들은 상관없네. 그들은 자나 깨나 내 신병을 지켜주는 시위들이네.”
청운은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떡이고는 삼황자와 자신의 대화를 아무도 엿듣지 못하도록 강한 기막(氣幕)으로 주변의 공간을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는 이제 말해도 된다는 눈짓을 했다.
삼황자가 청운을 한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청운의 표정을 살피는 그의 눈길이 수없이 청운을 움켜쥐었다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삼황자는 사안의 경중을 가늠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크게 한숨을 한 차례 쉬고는 어렵게 운을 뗐다.
그의 말투에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자신의 실책에 대한 자괴감과 자책이 잔뜩 묻어났다.
“황궁 사람이 아닌 외부인에게 이런 말하기가 참으로 부끄럽네. 무엇보다 나로서는 강호인인 자네에게 황궁의 사소한 대소사까지 털어놓는다는 게 참으로 위험한 도박이기도 하네. 섬서의 진무사령을 비롯해 여러 경로를 통해 자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네.”
“…….”
“그래서 믿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네. 그래서 내가 부른 것이라네. 지금 황궁에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이상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네. 내가 충신이라 생각하는 신하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하나둘 관직을 박탈당해 쫓겨나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