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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162화 (162/184)

162화 자신만을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

청운이 일어나자 혼원벽력도도 따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삿대질을 하는 그이 모습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 전부를 포기했다는 행동처럼 보였다.

청운을 뒤따라 천리신개와 검후, 진소소도 대전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청운은 자신의 머리를 밟고 있던 코끼리가 그제야 한쪽 발을 머리에서 내려놓는 것 같다고 느꼈다.

누군가 자신의 목적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든, 흉내만 낸 정의와 질서는 언젠가는 모두 부서져야 할 허위일 뿐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청운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고 푸르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태양은 높이 떠올라 있었고, 하얀 구름은 그런 하늘을 배경으로 수시로 모양을 바꾸며 유유히 배회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자기의 할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자연은 법칙을 거스르는 일 없이 한결같이 자신의 질서를 지키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다시 살고 있었다.

자신을 비워서 다른 자신을 채우고 자신을 버려서 다른 자신을 얻고 있었다.

인간은 사실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한 것을 믿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 간의 합의를 통해 자신이 살 세상을 만들었고, 자신의 삶에 편한 제도를 만들었으며 자신이 지켜야 할 질서를 만들었다.

인간이 인간의 삶을 위해 만든 그 모든 것은 사실과 진실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합의에 근거해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위해 만든 세상과 제도와 질서는 그 믿음과 합의만큼이나 가변적이고 위태로운 것이다.

서로의 신뢰에 근거한 합의가 없으면 인간이 만든 그 모든 것들은 금방 혼란에 빠지고 위험에 처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을 위해 세상에 만든 제도와 질서에는 원래 규칙도 의미도 없었다.

오랜 세월 서로 간의 합의로 그것들에 수없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미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믿음에 근거한 합의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런 합의는 세상에 잘못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에.

지금 저 대전에서 떠들고 있는 자들은 잘못된 자신의 믿음을 너무 믿고 있다.

자신만을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믿는 자들은 더 위험하다.

자신의 잘못된 믿음과 집단의 잘못된 믿음이 합쳐져 세상에 더 큰 잘못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에…….

‘天’의 무리나 그것을 추종하는 남궁혁위처럼…….

청운은 생각했다.

‘天’과의 싸움은 어차피 혼자서 해 왔던 일이었다.

앞으로도 자신의 마음속 스승인 곤륜선인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하겠다고 작심했다.

청운이 깊은 회의감에 빠져 넋을 놓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천리신개 일행이 그에게 다가왔다.

검후가 위로를 했다.

“소협,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원래 저들을 믿었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은 원래 자신과 자신이 속한 문파와 세가밖에 모르는 그런 무리입니다. 그건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문파와 세가는 종교입니다.”

“…….”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신념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알아도 절대로 그걸 바꿀 사람들이 아닙니다. 소협, 우리가 열심히 돕겠습니다. 우리끼리 한번 해 봅시다. 저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되어 가는 세상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기에.”

청운이 검후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검후님 같은 분이 계셔서 그래도 세상이 이 정도라도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청운 일행이 무림맹의 성문을 막 나왔을 때 관복을 입은 누군가가 총총걸음으로 청운에게 다가왔다.

그는 관복을 입은 삼십 대 중반의 사내였다.

섬서의 진무사령 주호형이었다.

그가 청운 앞에 멈추어 서더니 깍듯하게 포권을 취했다.

청운도 마주 보며 공손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가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더니 청운에게 건넸다.

그 서찰은 놀랍게도 삼황자의 친서였다.

청운을 즉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감히 거절하기가 힘든 요청이었다.

청운이 주호형에게 언제 황궁으로 가면 되는지를 물었다.

짐무사령 주호형이 이십여 장 밖에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청운은 한 차례 고개를 끄떡였다.

청운은 돌아서서 천리신개 일행에게 다가가 추후 연락하겠다고 인사를 건네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 * *

관도에는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했다.

아직 먼 산등성이에는 기나긴 겨울의 흔적이 여전했지만 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길섶의 이름 모를 나무들의 가지마다 꽃망울이 지천으로 돋아 있었다.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나무들이 말하고 있었다.

이 따스한 계절을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꽃망울들이 한꺼번에 자신의 꿈을 터트릴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꽃망울이 달린 가지 끝마다 어김없이 화사한 봄날의 하늘이 약속처럼 올라탄 채 흔들리고 있었다.

청운은 살갗을 간질이는 따사로운 햇살을 오랜만에 마음껏 느끼고 있었다.

청운은 마차의 주렴을 반쯤 걷어 올린 채 봄기운이 가득한 바깥 풍경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청운은 사흘째 마차를 타고 있었다.

잠은 관의 객사에서 자고 밥은 객점에서 해결했다.

앞으로도 사나흘은 더 가야 할 길이다.

그동안 청운도 말이 없었고 주호형도 말이 없었다.

청운과 마찬가지로 그도 상당히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가 청운에게 한 말이라고는 고작 황자를 만났을 때 청운이 어떻게 처신하는 게 더 좋은지에 대한 조언 정도가 전부였다.

* * *

마차로 이동한 지 칠 일째 되는 날 아침, 그가 청운에게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강 대협, 두어 시진 있으면 황궁에 도착할 것입니다. 어쩌면 삼황자께서 대협의 무위를 시험하고자 할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음속으로 미리 대비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황궁의 경호를 최종적으로 지키는 백팔 시위들의 무위는 모두 오래전에 절정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들 중에서도 황제님과 황자님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팔 시위의 경지는 추측이 불가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청운이 주호형을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비무와 목숨 건 대결이 여태껏 제 삶의 전부였으니까요. 주 사령님께서는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적절히 잘 대처하겠습니다.”

드디어 마차가 황궁 앞에 도착했다.

황궁 일천 장 앞부터는 그 누구도 말과 마차를 탈 수 없다.

신법과 경신술을 펼쳐서도 안 된다.

무조건 걸어야 한다.

그걸 어기면 즉참이다.

청운과 주호영은 마차에서 내렸다.

이 각 정도 걸었을까.

멀리 거대하고 웅장한 황궁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건물들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노을빛을 받은 황궁의 지붕이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커다란 붉은 성문들이 마치 눈을 굳게 감고 깊은 잠에 빠진 괴물의 눈꺼풀 같았다.

휘어진 눈썹 같은 처마들은 뭔가 불만이 가득 찬 것 같았다.

저곳은 질식할 듯한 형식적 예의가 사람의 정신을 옥죄는 곳, 온갖 권모술수로 세상의 부당하고 오만한 법이 만들어지는 곳.

그 부당하고 오만한 법이 만든 잘못된 질서가 이 세상 누군가의 눈물과 한과 삶과 죽음마저 결정하는 장소다, 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과 주호형이 성문 앞에 당도하자 다섯 척이나 되는 장창을 들고 있던 문지기들이 일제히 창을 가슴께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당장 제자리에 멈춰라. 더 이상 다가오면 목이 떨어질 것이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제 자리에 멈춰 선 청운이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성벽 탑에는 어느새 수십여 명의 병사들이 청운 일행에게 활을 겨누고 있었다.

진무사령 주호형이 품속에서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팔각패(牌)를 꺼내서 내보이자 수문장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왔다.

그는 주호형에게 패을 받아 앞뒤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뭐라고 말하더니 곧바로 되돌려 주었다.

그가 손으로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병사 둘이 문을 빼꼼히 열어 주고는 서둘러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수문장이 공터 끝에 있는 다른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육중한 궐문이 열리자 절대 권력의 거대한 공간이 청운의 눈앞에 펼쳐졌다.

고래 등 같은 전각들이 마치 산맥처럼 첩첩이었다.

날갯짓하는 봉황과 승천하는 용의 형상이 부조된 아름드리 기둥들이 전각를 떠받치고 있었다.

전각의 이마에 붙은 용사비등의 필체로 쓰진 현판이 그 위용에 위엄까지 더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전각들은 그 속에 사는 사람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권위를 내뿜었다.

청운에게 황궁의 담장 안과 바깥은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전혀 다른 이계(異界)처럼 느껴졌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애초부터 너무나 다른 삶의 질서와 규칙이 존재하는 공간이.

담장 안을 사는 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고 넘쳐서 날이면 날마다 더 자극적인 향락을 찾기 위해 안달하는 반면, 담장 바깥을 사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모질게 살아내기 위해 새벽부터 별이 뜨는 밤까지 자신의 영육을 쥐어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지X 같은 두 세계가 공존하는 곳이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세상이다.

담장 안을 사는 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을 대물림까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담장 밖을 사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가진 것 없는 것을 대물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게 어떻게 평등한 세상인가? 세상이 이래도 되는가? 이럴 거면 하늘은 도대체 뭣 때문에 필요한가?

타고난 탯줄의 차별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한 생을 너무 가지지 못해서 불행하게 살다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가진 것 때문에 불행하게 살다 간다.

너무 적게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최소한도 가질 수 없어서 불행을 살다 가고, 너무 많이 가진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깨닫지 못해서 불행을 살다 간다.

담장 안을 사는 자들은 담장 밖을 사는 자들이 그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들을 사람으로 여긴다.

혹여라도 담장 밖을 사는 사람들이 담장 안의 것을 탐내거나 욕심을 부리면, 담장 안을 사는 자들은 자신들이 맘대로 정한 질서와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처절하고 집요하게 담장 밖을 사는 사람들을 응징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담장 안을 사는 자나 담장 밖을 사는 자, 둘 다 부자는 아니다.

여전히 뭔가를 더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절대 부자가 아니다.

진짜 부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무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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