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저속한 사기술에라도 당한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회의에는 강호의 여러 문파와 세가의 인물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번 회합에서 그들 모두에게 이해 받을 수 있고, 그들 모두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킬만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염려가 강하게 일었다.
회의는 지루하게 진행이 되었다.
예상대로 각 문파와 세가의 이해관계로 인해 방향성도 없었고 좀처럼 의견일치도 이뤄내지 못했다.
모두 자기 문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바람에 다른 문파의 의견을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회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김이 빠지는 것 같았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배가 앞으로 나가는 법이다.
청운은 이 기회를 이용해 전 강호의 힘을 반드시 결집을 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청운이 회의를 주재하는 맹주에게 발언권을 요청했다.
맹주가 흔쾌히 청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청운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삼계(三界)가 열리면 무림은 끝장입니다. 아니, 세상 전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겁난에 휘말립니다.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모든 문파와 세가들의 사정이 전부 다르겠지만 강호 전체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겁난을 최소의 희생으로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삼계를 열려는 ‘天’의 무리는 온갖 주술과 법술을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회의에서 어떤 조직이 만들어지더라도 그 지휘권은 곤륜과 전전에 일임해야 합니다.”
청운이 말을 마치자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 그리고 검후가 “무위검 대협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라고 맞장구를 치며 강력한 지지를 표했다.
한 손을 들어 좌중의 소란을 가라앉힌 맹주가 청운의 말을 받았다.
“강 소협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각 문파와 세가에서 뛰어난 인재을 차출해 ‘天’의 무리를 토벌할 토벌대를 구성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지휘권 문제는 그 다음에 고려할 사안입니다. 각 문파와 세가에 인원을 어떻게 배분할지 우선 그것부터 논의합시다.”
“맹주의 말이 옳소. 그리고 차출 인원을 배분할 때 무조건 문파의 규모로 정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모두가 납득이 갈 수 있도록 공정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오. 아미타불!”
소림 장문인 무오대사였다.
“소림 방장 무오대사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오. 문파의 규모가 크다고 무조건 많은 인원을 차출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무당장령 현진자의 발언이었다.
“맹주님, 세가의 사정은 구대문파보다 더 열악하니 그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를 내보낼지는 세가 자체에서 결정하도록 자율권을 주어야 할 것이오.”
황보세가의 가주 벽력신장 황보연이었다.
“맞습니다. 구대문파와 세가는 규모도 다르고 고수의 숫자도 다르니 그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정합니다.”
진주언가의 가주 삼절풍권 언휘청의 말이었다.
맹주가 아무리 중재를 하고 제지를 해도 회의는 중구난방이었다.
하긴 지금 강호의 이 판도는 수천 년 동안 문파와 세가들 사이에 작용했던 갈등과 싸움과 타협을 거친 힘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평형과 균형은 아주 작고 사소한 이해관계로도 와르르 금이 가고 허물어질 수 있는 위태위태한 것이다.
백여 년 전 일차 정사대전 이후 무림첩이 발동되면 그 첩지를 받은 문파는 무조건 최하 오십 명 이상의 제자를 무림맹에 파견하기로 약조되어 있었다.
그것은 구대 문파를 비롯한 모든 문파와 오대 세가를 포함한 강호의 군소방파들도 모두 서명과 약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 각자의 셈법도 따라 변하는 법.
맹에 제자를 파견하지 않으면 그 문파와 세가는 겁난 이후에 벌어질 논공행상에서 배제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제자들을 차출해 파견하자니 뒷일이 걱정이었다.
자칫 자기 문파와 세가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핵심 제자들이 불상사를 당하면 차후 강호에서 자기 문파와 세가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강호에서 고수가 없는 문파와 세가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했다.
모두 자신의 문파나 세가가 심대한 타격을 입지 않으면서 최대의 이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모든 인간은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다.
그런 인간이 만든 단체도 제도도 질서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누구의 믿음과 신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장마철 먹장구름의 상태만큼이나 겹겹이고 그만큼 불안정하다.
그래서 각자의 진실 역시 자신이 가진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현재의 이해관계에 따라 모두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오직 자신만의 진실이 존재한다.
‘객관적 진실’이란 말은 그냥 말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믿고 있었던 확고한 진실이 명백한 증거로 허물어져도 다시 자신의 새로운 선입견과 편견에 경도되어 새로운 자신만의 주관적인 진실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참모습이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복잡한 거짓말과 방어적 농담 그리고 재치 있는 응수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현혹한다.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그때마다 그들은 다른 현란하고 엉뚱한 요설로 사태의 본질을 흐린다.
모두가 자기 문파와 세가를 대신해 참석했기에 자기 문파와 세가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려고 하는 점은 청운도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 했다.
청운은 그 한계 없는 ‘정도’ 때문에 짜증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회의를 주재한 맹주 역시 이후 무림에서의 자기 지분을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견해에 합치하거나 그렇지 않은 발언이 나올 때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추어지지 않은 표정의 변화가 장마철 날씨처럼 복잡하게 얼굴에 내비쳤다.
맹주의 태도에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회의를 끌고 가려는 저의가 다분히 엿보였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자신의 위엄이 실추될까 몹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맹주는 자신의 견해와 전혀 다른 발언이 나올 때마다 헛기침하거나 딴청을 부리며 의도적으로 회의를 지연시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대전이 술렁거렸다.
그러면 맹주는 잠시 회의를 중단시켰다가 완전한 정적이 만들어지고서 나서야 다시 회의를 재개시켰다.
맹주는 특유의 교묘하고도 고집스러운 방식으로 회의를 자신의 의도대로 주재했다.
맹주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 기회를 틈타 장로원에 집중되어있는 맹의 권력 구조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맹의 체제를 바꾸겠다는 속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가 청운은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회의는 여태껏 그래온 관성으로 그냥 진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청운은 자신의 입장을 굳이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태도와 분위기에서 자신의 속내가 저절로 우러나오도록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단호한 말투와 눈빛으로 말없이 모든 걸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청운은 아무도 자신의 진심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맥이 탁 풀렸다.
청운은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른 사람의 대화에 반쯤만 주의를 기울인 채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처음에 청운은 이 문제는 자신이 직접적인 이해의 당사자가 아니기에 자신이 성급하게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들 진지한 표정으로 회의에 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모두가 자기 문파의 잇속을 먼저 생각하며 딴생각을 하는 것 같아 청운은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결국 청운은 무한정 넋을 놓은 채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계속 미뤄둘 수만은 없는 일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의 주장 때문에 설사 기분이 상한 누군가가 자신을 원망하게 되더라도 청운은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바로 그 순간 혼원벽력도 팽추도가 맹주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서더니 일갈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앞으로 이 땅의 약자들이 경험할 수도 있는 고통과 아픔을 더는 일은 한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바로 내 부모 형제이고 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유예하고 방기하는 일. 그게 바로 악의 바탕입니다.”
팽추도는 그들 논리의 모순을 하나하나 빈틈없이 짚어가며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혼원벽력도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절대로 그럼 방식을 채택해선 안 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팽추도의 말은 구구절절 오른 얘기였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말 모두가 옳은 이야기였기에 모두가 그를 싫어했다.
회의장에 있는 그 누구도 팽추도의 진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모두 자기 문파와 세가의 잇속에 매몰되어 타인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하지 않는 것 같았다.
청운은 혼원벽력도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대로 놔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의 그런 과격한 행동은 웬만한 위선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나름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의는 오래도록 지속되었지만 결론 없이 지루하고 지리멸렬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진척은 없었고 계속 인원 차출에 대한 설왕설래만 난무했다.
어떤 결론도 도출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회의가 지루하기 짝이 없던 어느 순간 맹주의 얼굴에 엄숙한 표정이 떠올랐다.
곧이어 그는 어떤 단호한 결심을 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허공에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각 문파와 세가의 인원 차출에 대한 문제는 각 문파와 세가의 사정을 고려해 맹주의 직권으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총인원은 일천 명 정도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토벌대의 명칭은 제마대(制魔隊)로 하겠습니다. 제마대의 지휘는 각 문파 장문인과 세가 가주의 추천을 받아 정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맹주의 표정에는 위장할 수 없는 어떤 광적인 자신감이 엿보였다.
맹주는 밤새도록 그 자신답게 행동했다.
그는 위대한 사람 역할을 아주 매끄럽게 잘 수행했다.
타인의 말과 시선을 이용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서는 언제든지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오만까지 느껴졌다.
청운은 자신이 저속한 사기술에라도 당한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그들의 속임수에서라도 진심을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그들의 장황한 말을 찬찬히 모두 들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속에는 그들 자신의 잇속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청운은 실망스러운 눈길로 그곳에 배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미끄러지듯 훑어본 후 더 이상 이곳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겠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