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59화 (159/184)

159화 그들의 기감이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천리신개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장내에서 백여 장 떨어진 널따란 암반이었다.

그곳은 사방이 뻥 뚫려 있어 적이 어느 곳으로 오더라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모두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극황지김술을 운기하던 청운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곳은 절대 안 됩니다. 화약 냄새가 납니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합니다.”

청운이 천리신개가 가리킨 암반 이십여 장 가까이 다가가서는 전력으로 암반에 전륜장을 쳐낸 후 신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전륜장의 경기가 암반을 때린 바로 그 순간 콰-콰-콰-쾅 하는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돌가루와 파편들이 허공에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자욱했던 돌가루가 가라앉자 모두 대경실색했다.

그들이 쉬려고 했던 널따란 암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곳에는 자갈돌만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표정에 공포감이 어려 있었다.

천리신개가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산을 내려가도록 합시다. 이미 산정을 넘었으니 관도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서두르면 내일 저녁 무렵이면 이 지긋지긋한 천문산을 벗어날 완전히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천리신개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청운을 비롯해 모두 제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각자 자신의 행낭에서 육포와 건량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두어 식경 지났을까 천리신개가 벌떡 일어서더니 말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대충 쉬었으니 이제 출발합시다. 산속은 생각보다 해가 빨리 지는 법이지요. 조금이라도 산을 더 내려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가다 보면 또 쉴만한 곳이 있겠지요. 자, 서두릅시다.”

모두 짐을 챙겨 들고는 다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리신개의 말마따나 얼마 가지 않아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에 다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달빛을 길잡이 삼아 그렇게 얼마를 더 갔을까.

사오백 장 정도 떨어진 먼 곳에 마치 마장(馬場)처럼 보이는 널따란 초지가 희미하게 보였다. 산 중턱쯤 되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긋지긋한 천문산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런데 그곳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바로 청운이었다.

청운이 그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는 먼저 신형을 날렸다.

나머지 사람들도 청운을 뒤따라 신형을 날렸다.

그곳에선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난마처럼 뒤엉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수백여 명의 갑주(甲冑)를 입은 병사 복장을 한 자들이 오륙십여 명의 사람들을 포위한 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이미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당해 널브러져 있거나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일반 무림인은 저런 복장을 할 수 없는데, 하고 생각을 하던 청운은 문득 설산의 기억을 떠올렸다.

설마! 모용후와 교룡조.

틀림없는 것 같았다.

청운은 속으로 잘됐다 싶었다.

이참에 모용후에게 당한 빚을 확실하게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고 그들 모두가 갑주를 호신구(護身具)로 입고 있어서 저들을 모조리 쳐 죽이려면 내력을 많이 소모될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그들의 숫자를 다시 한번 어림짐작해 보았다.

대략 삼백 이상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도 싸움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병장기 부딪는 소리가 서너 곳에서 났다.

청운이 높은 암반 위에 올라서 상황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청운의 짐작이 맞았다.

싸움은 모두 네 군데서 벌어지고 있었다.

한 곳은 이십여 명의 흰 도포를 입은 사람들이 무림삼비인 환화루(幻花樓)와 은비천(銀秘川) 그리고 광마혼(狂魔魂)으로 보이는 자들과 뒤엉켜 있었고, 다른 한 곳에서는 소림과 무당 제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사천의 첫째 절심마환과 셋째 혈미륵 무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 다른 한 곳은 화산파를 비롯한 구대문파 사람들이 수십여 명의 혈검사자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天’이 바로 이곳에서 모두를 몰살시키기 위해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청운은 우선 가장 열세인 곳부터 먼저 개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문제는 모용후와 함께 서 있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기감이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그들 중 특히 두 사람의 기감이 극황지감술을 운기할 때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강렬했다.

그들이 개입하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은 태도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세에 몰린 사람들을 내팽개친 채 곧바로 그들에게 달려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청운은 애초의 생각대로 교룡조에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사람들을 먼저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청운은 신형을 허공에 띄움과 동시에 쾌-타-절-변-회의 초식을 펼치며 갑주를 입은 자들을 후미에서 후려쳤다.

무영검의 검기에 격타당한 십여 명의 교룡조가 그대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그들이 구축한 포위망 한 곳이 뻥 뚫렸다.

그들을 모조리 궤멸시키기로 마음먹은 청운은 인정사정없이 무영검을 휘둘렀다.

무영검의 검기가 대기 속에서 번뜩일 때마다 칠팔 명의 장한들이 묵직한 신음을 토하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교룡조의 포위망에 갇혀 쩔쩔매던 사람들이 천신 같은 청운의 신위를 보고는 힘을 얻었는지 다시 맹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영검의 검기에 격타당해 나가떨어졌던 자들이 하나둘 다시 벌떡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착용한 갑주가 보통의 가죽이 아닌 것 같았다.

검기에 맞은 곳에 약간의 흠집만 있을 뿐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것 같았다.

청운은 내력을 더 끌어올렸다.

무영검에서 거의 삼장 가까이 되는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청운이 다시 갑주를 입은 자들을 짓쳐 갔다.

이번에는 갑주가 쩍쩍 갈라지면서 그자들의 입에서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삼십여 명의 갑주를 입은 자들이 무영검의 검기 아래 검하고혼이 되었다.

곧바로 갑주를 입은 교룡조의 전열이 우왕좌왕하며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쯤 천리신개와 검후 일행도 장내에 당도해 싸움에 가담했다.

그러자 모용후와 함께 서 있던 자들도 싸움판에 가담했다.

그들 중 기감이 가장 강하게 느껴졌던 두 명의 인물이 청운에게 날아왔다.

그들이 청운을 가로막고 섰다.

한 명은 자색의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핏빛의 혈룡이 수놓인 황금색 전포를 입고 있었다.

둘 다 사십 대 후반 아니면 오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자색의 비단 장포를 입은 자는 거무튀튀한 얼굴빛에 흰자가 거의 없는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살쾡이의 눈 같았다.

검은 눈동자를 번들거릴 때마다 오싹한 사기기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황금색 전포를 입은 자는 세모꼴의 교활한 하관에 눈에는 붉은 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쳐다보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독사의 눈빛이었다.

자색의 비단 장포를 입은 자가 입가에 사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자네가 바로 요즘 강호의 새로운 전설이라는 무위검 강청운이군. 나는 사마흔이라고 하네. 그리고 이쪽은 자네가 이미 짐작했겠지만 혈검령주 장무기라는 분일세. 자네처럼 뛰어난 인재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다른 분위기에서 다른 말을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서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런 자리에서 만나다니 유감일세.”

“…….”

“어떤가? 지금이라도 자네가 마음만 살짝 바꿔 먹는다면 다른 세상이 자넬 환영할 것이네. 마음은 한번 바꾸기가 어렵지 막상 바꾸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네. 자네는 누구보다 똑똑한 사람이니 내 말이 무슨 뜻이지 모두 이해했을 것이라 믿네. 자, 그래도 싸울 텐가 아니면 우리와 타협할 텐가?”

청운이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머금은 채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내가 원하는 세상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세상이오. 당신처럼 타인 위에 군림해 자기 혼자만 호의호식하는 그런 더러운 삶을 나는 원치 않소. 그런 개 같은 세상은 당신들이나 많이 가지시오.”

청운은 자색의 비단 장포를 입은 자를 보며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소. 당신들과 내가 꿈꾸는 세상이 이렇게 다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소. 거두절미하고 바로 시작합시다. 둘이 한꺼번에 할 거요. 아니면 따로따로 하겠소.”

혈검령주 장무기가 소름 돋는 광소를 터뜨렸다.

웃음을 그치자마자 곧바로 말했다.

“미친 놈! 네놈이 강호에서 명성을 좀 얻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감히 누구보고 협공 운운하다니. 네놈 정도는 나 혼자로서도 족하다.”

청운은 상대를 격동시키려는 자신의 계책이 나름 성공을 했다고 속으로 한 줄기 고소를 머금었다.

혹여 둘이 합공을 한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었다.

청운과 혈검령주 장무기는 오장 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청운은 장무기의 마환십팔수가 가공할 비도술이기에 거리를 좀 더 좁히려고 했으나 그는 교묘하게 보법을 밟으며 청운에게 좀처럼 거리를 내주지 않았다.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최고조로 운기했다.

장무기의 혈검비도는 손목에도 있었고, 팔꿈치에도 있었고, 심지어 겨드랑이에도 있었다.

모두 열여섯 자루였다.

나머지 두 개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걸 감지하는 것이 승부의 관건인 것 같았다.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양쪽 팔꿈치에 있는 두 개의 비도가 다른 비도와 조금 다른 걸 느꼈다.

그랬다.

그 비도는 한 개 같은 두 개였다.

그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꼼짝없이 당할 뻔 했다고 청운이 생각했다.

그걸 알아챈 청운이 입가에 빙그레 띄우자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장무기가 갑자기 인상이 확 이지러지더니 소매가 움찔거렸다.

바로 그 순간, 네 자루의 비도가 가공할 속도로 청운의 전신요혈을 향해 날아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음경의 비도술이었다.

당문의 천수귀수 당호의 암기술인 혈천만우와 비슷한 수법이었다.

청운은 호신강기를 최대한 끌어올린 채 쾌-타-절-변-회의 초식으로 혈검비도를 맞받아쳤다.

따-따-따-땅 하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혈검비도가 마치 바위에 떨어진 빗줄기처럼 사방으로 되 튕겨 날아갔다.

청운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장무기의 내공이 얼마나 가공한지 혈검비도를 맞받아친 무영검을 쥐고 있던 손목이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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