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58화 (158/184)

158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길이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청운 앞으로 다가오자마자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구명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황보가의 황보연입니다.”

“나는 진주언가의 언휘청이오.”

청운도 마주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강호에 위명이 자자하신 황보가와 진주언가의 가주님이시군요. 저는 강청운이라 합니다.”

청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황보연이 말했다.

“대체 누군데 저 정도의 경악할 무위를 보여줄 수 있는가 했더니, 바로 현재 강호의 전설이신 무위검 대협이시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청운이 땅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한 차례 둘러보며 말했다.

“양 세가의 횡액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빨리 정리하고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 또다시 적들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때마침 그곳에 도착한 풍비양과 태허자까지 합세해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는 살해당한 양 세가의 사람들의 시체를 서둘러 묻었다.

나중에 알아볼 수 있게 바위 몇 개로 표식을 남기고는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함께 가고는 있었으나 그들 사이에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는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천문산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그게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만든 침묵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길이 있었기에 그냥 걸어갈 뿐이었다.

칠흑처럼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 치 앞의 상황도 감히 예상하지 못한 채.

그렇게 터벅터벅…….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天’의 모든 세력이 동시에 이곳 천문산에 집결한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이 정도의 전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걸 보면 ‘天’이 준비를 해도 단단히 한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천문산에 가용한 모든 전력을 집중한 걸 보면 ‘天’이 강호의 문파들이 무림맹에 모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만큼 그들이 강호의 힘이 한 곳으로 집결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벌써 닷새째 청운 일행은 잠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싸우면서 숨을 쉬었고 혈향 속에서 건량을 먹었으며 혈향을 풍기면서 물을 마셨다.

모두들 지칠 대로 지쳤다.

지금 이 천문산에 들어선 다른 문파나 세가의 사람들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깊고 광활한 이 천문산 전체가 지옥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지금 다른 곳에서 어떤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자신이 알 수 없기에 도울 수도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더 죽어야 이 상황이 끝날지를 생각할 때마다 청운은 마음이 착잡했다.

그리고 그 착잡함이 마음뿐이었기에 더 착잡했다.

쉴 새 없이 쏘아 올려지는 폭죽과 신호음,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정체 모를 살인귀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폐부를 쥐어짜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낮과 밤 구분 없는 급습과 응전.

청운은 참으로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쉴 틈도 먹을 틈도 전혀 없이 죽이고 또 죽였다.

이유는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기에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청운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들도 그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자신도 인성을 상실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이곳 천문산에서 만큼은…….

청운은 자신이 얼마를 더 죽여야 이 지긋지긋한 오늘 밤이 끝날 수 있는가 하는 절망감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길이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멀지 않기에 더 기나긴 길이었다.

그냥 길고 긴 길이 아니었다.

무의미한 살인이 만들어내는 깊은 회의감과 무력감이 내면을 황폐시키고 갉아먹는 잔인하고도 잔혹한 길이었다.

지금, 이 순간 청운은 자신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무작정 달려드는 저들의 무모함과 광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을 얼마나 더 죽여야 이 상황이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다.

평화는 안온과 안정 속에는 없다는 걸 천문산의 칠흑 같은 밤이 청운에게 확실히 가르쳐 주었다.

산은 진정한 평화는 처절한 투쟁과 저항 속에 존재한다는 걸 명확히 가르쳐 주었다.

고통과 죽음 속에서 찾아낸 평화만이 진정한 평화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얼마를 갔을까.

한없이 고요하고 푸르스름한 박명의 대기 속에 한줄기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또 의미 없는 하루가 밝아오고 있었다.

이 광활하고 장엄한 풍경 위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참담함과 비애만이 산정과 협곡에 가득한 것 같았다.

청운은 어느 순간 적들이 교묘하게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마치 사냥감을 몰 듯 자신들을 어딘가로 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가 또 들렸다.

청운 일행은 다급하게 그곳으로 내달렸다.

이백 여장 떨어진 숲속의 공터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후와 진소소,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 아미의 검정신니 일행이이었다.

모두가 절세적 고수들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양보 없는 팽팽한 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청운은 속으로 생각했다.

천하에 누가 있어 저런 고수들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단 말인가.

오히려 검후 일행이 적들의 숫자 때문에 조금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후는 시커먼 묵빛의 륜을 휘두르는 자와 맞상대를 하고 있었다.

검후의 상청비검도 눈부셨으나 그자의 무위도 가공했다.

묵빛의 륜이 발출될 때마다 먹장구름 같은 시커먼 묵기墨氣가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금정신니는 핏빛 혈포를 입은 괴인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괴인은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는 민머리였다.

그자가 양손을 휘두를 때마다 장심에서 붉디붉은 섬광이 번쩍번쩍했다.

둘 중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 그리고 진소소는 각각 십여 명의 괴인들에 포위당한 채 혼신의 힘을 다해 대적하고 있었다.

진소소가 가장 힘겨워 보였다.

청운이 막 진소소가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수십여 개의 붉은 비도가 청운을 향해 쏘아져 왔다.

청운의 무영검에서 투명한 자황색의 강기가 번쩍하며 허공에 원을 그리자 따-따-따땅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여 개의 비도가 모조리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도에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것 같은 핏빛 혈룡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청운이 자신도 모르게 ‘혈검령!’하고 신음을 내뱉는 바로 그 순간 주변의 고목에서 수십 명의 인형이 장내에 날아 내렸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으스스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말했다.

“무위검 강청운! 네놈의 상대는 바로 나다. 엉뚱한 곳에 한눈팔지 말고 네 목이나 잘 간수해라.”

그자의 생김새는 특이했다.

수염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이 남자 같기도 했고 여자 같기도 했다.

나이도 짐작할 수 없었다.

삼십 대처럼 보이기도 했고 오십 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자를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청운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난 또 누구시라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혈검령의 제일사자 ‘음양혈마’이셨구료. 저번에 나한테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다시 날 찾아오다니. 오늘은 도망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청운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에 분기탱천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음양혈마가 오른손을 허공에 번쩍 들었다 내리며 소리를 꽥 질렀다.

“쳐라! 혈검비도를 쏟아부어 저놈을 고슴도치로 만들어라!”

음양혈마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수백여 개의 핏빛 비도가 소름 끼치는 파공성을 울리며 청운의 전신요혈을 노리며 날아왔다.

몇 달 전 안가의 대나무숲에서 상대했던 바로 그 저주의 혈검비진이었다.

상대가 죽을 때까지 혈검령의 붉은 비가 쏟아진다는, 하지만 오늘 청운의 손에는 그때와 달리 무영검이 들려 있었다.

그래도 청운도 바짝 긴장했다.

치우전륜공을 최대한 끌어올려 호신강기로 전신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무영검으로 혈검사자들을 사납게 짓쳐 갔다.

너무 많은 비도가 한꺼번에 쏘아져 오는 바람에 한동안 청운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청운은 다른 사람들의 싸움을 흘깃 살펴보았다.

풍비양과 태허자 그리고 세가의 고수들이 싸움에 가세했음에도 검후와 금정신니는 수적으로 너무 열세에 몰려 조금의 우위도 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력이 고갈되어 모두가 낭패를 볼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청운은 이 싸움을 여기서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무영검에 주입했다.

무영검이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투명한 자황색의 강기를 삼 장 가까이 뿜어냈다.

청운의 모습을 본 음양혈마가 순간적으로 무슨 위기감을 느꼈는지 돌연 삐-익 하는 신호음을 불었다.

바로 그 순간 혈검사자들을 비롯해 곳곳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자들이 돌연 장내에서 몸을 빼내 달아나기 시작했다.

청운은 달아나는 자들을 도륙하기 위해 쫓으려다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서였다.

청운이 몸을 돌리자 검후와 진소소 그리고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가 청운 쪽으로 걸어왔다.

청운이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자 그들도 공손하게 청운을 응대했다.

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몇 날 며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격전을 치러서 그런지 몰골은 도저히 사람 꼴이 아니었다.

자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는 연일 계속된 격전으로 인해 기가 다 빠져 모두들 거의 탈진 직전의 상태였다.

의복은 거지꼴처럼 이곳저곳 찢어져 있었고 자잘한 검상이 무수히 나 있었다.

상처에서 핏방울이 소름처럼 돋아 있었다.

물론 청운의 몰골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외상도 외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체력과 내력의 고갈이 가장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청운이 죄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들의 속셈은 뻔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체력과 내력을 최대한 소진시킨 후 한곳으로 몰아 최종 결판을 낼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계책을 안 이상 우리도 그 마지막 결전을 대비해 소진된 체력과 내력을 최대한 빨리 회복해야만 할 것입니다.”

청운이 검후와 금정신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검후님과 신니님이 상대로 싸우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자들의 무위가 엄청나던데.”

검후가 청운의 말을 곧장 받았다.

“나와 싸우던 자는 사사천의 첫째 절심마환인 같고, 신니와 싸우던 자는 셋째 혈미륵 같았습니다. 그자들의 무위가 워낙 절륜해 하마터면 낭패를 당할 뻔 했습니다.”

천리신개가 곧장 검후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자들이 펼치는 무공으로 봐서 아마 그들이 틀림없을 것이네. 그건 그렇고 강 소협의 말이 맞는 것 같네. 나도 그리 생각하네. 저들이 도대체 무슨 음흉한 계책을 꾸미고 있는지 계속해서 치고 빠지면서 우리의 체력과 내력을 고갈시키고 있네. 말이 나온 김에 저곳으로 가서 떨어진 체력도 보충할 겸 좀 쉬기로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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